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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화가
맑은 어느 날, 우리는 완만한 산을 오르며 작은 새들을 보았다. 초록 숲 사이의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숲이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포뇨’가 어른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포뇨의 집이 바다라면, 그녀의 거처는 나무일 것이다. 김혜나 작가는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오래된 기억을 마음에 소중히 담아두고 이따금 꺼내어 그림에 옮긴다.
만나자마자 함께 산책을 했네요(웃음). 집 뒤에 바로 산이 있다니 부러워요. 먼저 소개로 시작해 볼까요?
우리가 걸었던 길은 봉제산에 딸린 작은 동산이었어요. 코스가 꽤 탄탄하죠(웃음). 반가워요. 추상화 작가 김혜나입니다. 흐르는 듯한 자연물의 형상, 아름다운 색, 멋진 기억들이 녹아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멋진 기억들이라면 어떤 걸까요?
어릴 때 추억이요. 제가 아직 연륜이 있는 작가가 아니고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사람들과 부딪혀서 어떤 사건 사고를 겪어본 것도 아니고요. 정말 그림만 그리며 살아왔는데 아주 어릴 때 기억들이 남아서 그림 작업의 탄탄한 바탕이 되고 있어요. 초등학교 때였는데 당시에 아버지가 대한항공에 다니셔서 제주에 꽤 오래 살았거든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영을 했고 새카맣게 타서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어 물고기를 보던 장면이 선해요. 부모님께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자라던 그때를 떠올리면 어제처럼 느껴져 금방 행복해져요. 그 기억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그림에 담은 저만의 감정을 그대로 안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종종 엄마와 어릴 때 기억을 되짚어 보기도 하거든요. 이것저것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고 제 기억과 다른 비하인드도 많은데요. 결국 이 추억들의 조각을 맞추다 보면 저는 되게 즐거운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오래된 영감을 가지고 있네요. 그림은 언제 처음 그렸나요?
어릴 때부터 항상 그리고 있었어요. 부모님이 물량 공세를 엄청 하셨거든요(웃음). 가지고 싶은 스케치북, 물감, 크레파스가 있으면 아끼지 않고 사주셨어요. 셋집이었는데 벽에 그림을 그려도 야단치지 않으시고 응원해 주셨고요. 아, 어릴 때 그린 웃긴 그림이 있는데 가져올게요. (그림을 가져온다.) 엄마가 반지름의 원리를 알려주신다고 종이를 꺼내셨는데 뭘 배우기 싫었나 봐요. 그 종이 위에 엄마 얼굴을 못되게 그리고 장난을 친 그림이에요. 그림 그리는 일은 저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작업의 원동력은 가족에 있기도 하네요.
큰 원천이에요. 엄마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셨거든요. 화가가 된 저를 보면서 꿈을 이룬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해요. 엄마는 최근에 오일 파스텔 작가로 조그만 전시를 진행하셨고, 동생은 수채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저한테 가족은 너무 소중한 존재라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요.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그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어요. 또 다른 원동력이라면, 늘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 속하고 싶다는 꿈을 꿔요. 저는 저 자신을 망치지 않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 이 튼튼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잘 만들어 평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작업실을 둘러보니 일과가 궁금해져요. 밖에 잘 안 나가신다고 들었어요.
키우고 있는 강아지 ‘코코’ 덕에 매일 밖으로 나가긴 해요. 다만 차를 타는 이동은 잘 안 하는 편이에요. 작년 교통비를 계산해 보니 총 14만 원이 나왔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체력 관리를 소홀히 하면 안 되니까 산책을 빼놓지 않으려 해요. 그림 그리는 일엔 체력이 중요하거든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나태해지기도 하니까요. 산책하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칩거인처럼(웃음) 지내고 있어요. 만나는 사람만 만나려 하고, 작업실에서 생활하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아서요.
산책이 작업 전 중요한 준비 과정이기도 하네요.
산책을 하며 좋은 에너지를 받아요. 늘 이 자리에 앉아서 작업하는데 무릎 꿇은 자세로 있을 때가 많거든요. 온종일 굽히고 있다가 유일하게 몸을 쭉 펴는 시간이에요. 그림 작업과 거리를 두는 귀한 시간이기도 하고요. 그림 아이디어를 산책하면서 얻기도 해요. 좀더 새로운 것을 그려야겠다는 자극은 산책에서 얻는 것 같아요. 그림 생각을 할 때는 머릿속에서 작은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 많은 생각들을 산책이 정돈해 주기도 하고요.
산책할 때 꼭 챙겨 가는 것이 있나요?
산에 버려진 것들이 꽤 많아서 쓰레기 담을 봉투를 곧잘 챙기는 편이에요. 아까 걸은 산에는 청설모가 두 마리 살아요. 새들도 많고요. 곡식이나 밤, 호두, 아몬드 같은 걸 가져 가는데요. 나뭇가지 사이에 꽂아 놓으면 다음 날에는 사라져 있어요.
거의 산을 위한 지킴이 역할을 하시는 것 같아요(웃음).
그런가요(웃음). 반대쪽 2차선 도로 하나를 건너면 봉제산이 있어요. 제가 어릴 때 그 산 밑에서 살았거든요. 이 동네를 벗어나지 않아서 제 주변에는 늘 산이 있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봉제산에 나름 오랜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산책하면서 마주한 풍경 중에 지금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요즘엔 한강을 많이 걸었어요. 걷다 보면 바다처럼 흙과 물, 풀이 모여 있는 장소가 있는데 그곳을 발견하고 혼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어요. 제목은 ‘통나무 집 로맨스’인데, 한 사냥꾼이 작은 동물을 오두막에 데리고 오는 이야기예요. 보이는 것은 어두운 낙엽뿐이지만 오두막 주변에는 가끔 눈인사 나누는 사슴이 한 마리가 있고, 잠들기 전 내 침대를 미지근하게 데워 놓는 작은 강아지가 있어요. 이미 죽은 동물을 데리고 오는 사냥꾼이니 사냥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단상을 글로 적기도 했고요. 그 풍경을 보자마자 사냥꾼이 떠오른 건 아마도 제가 전생이 사냥꾼이 아니었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기도 해요(웃음).
풍경 하나에 동화 한 편을 완성했네요. 어린이의 마음이 엿보이기도 해요. 어릴 때 기억이 강하게 남은 까닭일까요?
그런 것 같아요. 거의 평생을 그때 기억을 끌어 살고 있으니까요. 어릴 때 인형 놀이만 하고 놀았는데 지금도 인형 옷을 만드는 취미가 있어요. 인형 놀이만 주야장천 했어도 늘 모자라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나중에 할머니가 되면 편하게 인형 놀이만 할 거야(웃음), 다짐도 했고요. 그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죠.
곳곳에 인형들이 보여요. 박스 안에 뭉텅이로 모아두시기도 했죠. 인형 옷이 다 예뻐서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웃음).
감사해요(웃음). 재봉틀을 배운 게 아니라서 아마추어 수준이에요. 인형 옷을 만드는 건 저에게 휴식과 같아요. 그림 그리는 게 아무리 좋아도 본업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거든요. 이제 막 전시를 앞두고 있는데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기운을 받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이 있어요. 그런 생각들로 복잡해지다가도 재봉틀 앞에 앉으면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 들어요. 여기 앉으면 그림 그리는 자리가 보이거든요. 그러면 제삼자가 되어 그림을 바라보게 돼요. 고쳐야 할 점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인형 옷은 언제부터 만드신 걸까요?
대학생 때부터 만들었는데 손바느질로 대충대충 하다가 동생이 사 준 바비인형을 보고 열정이 생겨 본격적으로 만들게 됐어요. 마음속에 불이 막 타오르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처음엔 인형을 하나씩 모아볼까 하다가 가만히 보니 인형들이 입은 옷이 다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제 취향이 아니기도 하고 더 예쁘게 꾸며주고 싶었고요. 제가 면 옷을 좋아하는데 인형도 면 옷이 좋겠지(웃음)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만들어 왔죠.
인형 옷 만드는 건 왜 그렇게 즐거울까요?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작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요. 어릴 때 워낙 인형을 좋아해서 많은 인형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반 친구들 모두 저희 집에 놀러 와서 함께 인형 놀이를 한 기억이 생생해요. 엄마가 그런 친구들을 챙겨주는 걸 좋아하시기도 했고요. 인형에 구체적인 직업을 붙이고 개개인의 이야기를 만들기도 해요.
이야기요?
네, 완전 오타쿠죠(웃음). 이야기가 좀 긴데, 저는 항상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리다 보니 사회구성원으로서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환경미화원, 소방수, 변호사, 의사, 흔히 사회에서 각자 역할을 다하는 직업들이 있는데, 저는 작가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예술인복지재단에서 하는 파견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제가 했던 작업이 좋은 평가를 받아서 이듬해 재단에 유용한 예산을 받게 된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제가 사회의 일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때 느꼈던 가치들이 이어지면서 인형 옷을 만드는 취미에 이야기를 입히게 된 거죠. 사파리 직원부터 커리어우먼, 제가 스케일링 하는 걸 좋아해서 치위생사 인형을 만들기도 하고요(웃음).
인형 안에 소중한 의미를 숨겨 놓았네요. 가장 아끼는 인형의 스토리로 마무리해 볼까요?
세 친구가 있어요. 첫 번째 친구는 화가인데, 옷에 물감을 잔뜩 묻힌 말괄량이 같죠. 제 20대 초반의 모습이 담겼어요. 그때는 옷에 물감을 묻히고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보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졸업을 앞두고 고민도 많았고 꿈도 많이 꾸던 시절이었어요. 가끔 이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다음 친구는 현재의 저예요. 작업복도 업그레이드되었고 더 이상 물감을 묻히지도 않아요. 조금 성숙해진 모습이죠. 마지막 친구는 휴양지에서 유유자적하는 사람을 상상했어요. 제 바람을 담은 친구인데 아마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았는지 아주 여유로운 모습이네요(웃음).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김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