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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은 귀한 것이다. 설사 당신이 악당을 좋아하고 있을지라도. 귀한 마음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누군가는 상냥한 존댓말로 답장을 보내왔고, 누군가는 꽤 단단해 보이는 원고를 보내왔다. 일기 같기도, 편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글들이 모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혹시라도 훼손될까 봐 무엇도 수정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딱 하나. 네 사람이 좋아한 그것의 정체를 맨 뒤에 살포시 공개해 보는 일.
시인 김복희
ʻ첫눈에 반해 오래오래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을 믿지만, ʻ신경은 쓰였지만 사랑한다고 인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습니다.’라는 말이 저와 이 대상 간의 관계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것 뭘까요. 기억나는 순간부터 늘 함께였던 것 같습니다만 사실,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도 이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지금도 제가 이 대상을 알고 좋아하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왜 그런 노래 가사 있지 않나요. “난 널 사랑해. 너의 모든 몸짓이 큰 의미인걸.” (신효범, ʻ난 널 사랑해’) 모든 몸짓이 큰 의미라는 건, 볼 때마다 해석을 새로이 하게 된다는 뜻이고, 총체적으로 대상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바로 그런 것 아닌가요? 다 안다면 재미없는 것 아닌가요? 사랑을 재미로 하냐고요?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랑은 명백히 재미있습니다. 이를테면 삼자의 시선에는 너무나도 의도가 명백하고 투명하게 보이는 행위일지라도, 사랑하는 당사자인 나의 눈에는 해석 불가의 신비로 남는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이 대상에 대한 저의 사랑은 해석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당겨 앉기 의지에 가깝습니다. 파악을 못 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 대상은 저한테 별 관심이 없어 보이므로, 제가 놓아버리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자 이 대상은, 그렇다면 사람일까요? 사물일까요? 사람은 아닙니다. 사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이 대상에게 물성을 부여할 수는 있으나, 이 대상 자체를 사물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단수일까요? 복수일까요? 셀 수 없는 수를 포함한 하나의 수가 아닌가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단수로 쓸 수도 있고 복수로 쓸 수도 있습니다만, 통칭할 때는 단수형을 주로 사용하기는 합니다.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존재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자꾸 이렇게 표현하게 됩니다.
삽화가 임진아
4년 만에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해서 하늘을 나는 걸 좋아한 건 아니었구나. 처음으로 비행 공포를 느끼며 두 주먹을 꽉 쥐었고 비행기는 보란 듯이 상공을 향해 전속력을 냈다.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도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늘을 나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여행이었던가, 떠나는 일이었던가. 잘 모르겠지만, 따지자면 하늘을 날아야만 만날 수 있는 목록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건 만나고 싶은 걸 만나기 위해 움직이는 일에 가까웠다. 4년 만의 비행기. 약 6년 만에 도착한 간사이 공항. 코로나19를 길게 건너온 사람치고는 두리번거릴 여유도 없이 곧장 교토로 달려가는 하루카 열차에 몸을 실었다. 교토역에 있는 뮤지엄 에키 교토Museum EKI Kyoto에 가서 전시를 보는 게 이번 여정의 유일한 일정이었고, 그 밖에는 어떤 하루를 보내도 상관이 없었다.
오랜만에 낯선 호텔에서 낯선 밤을 보내고 일어난 아침. 어제는 교토역에서 호텔로, 오늘은 호텔에서 다시 교토역으로. 작은 미술관 안에서 두 시간 넘게 서성이며, 그림 하나하나를 자세히 바라보며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던가. 이제는 없는 사람이 남기고 간 뚜렷하고 다정한 자국들은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다음을 기대해 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나에게 다음이 있던가? 다음을 그려볼 여유가 있었나? 그런 힘 빠지는 질문은 미술관에 입장 불가. 전시장을 휘휘 돌아다니다 보니 오랜만에 화방에 가고 싶어졌고, 다시 붓을 잡고 싶어졌다. 애써 그린 그림들이 나도 모르게 버려진 이후로 나는 실물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오랜만에 버려진 그림들이 생각났지만 이제는 덤덤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도 꽤 지났구나, 옛일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니구나, 더는 어두운 웅덩이에 빠지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씩씩해졌구나. 전시장 안에서의 나는 평소의 나와 조금 달랐다. 좋아했던 그림 곁에는 그림을 그린 나이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가 62세에 그린 그림. 처음으로 내가 모르는 먼 날의 내가 궁금해졌다. 나도 62세에 붓을 잡고 싶다. 하던 걸 계속하는 게 아니라, 그때도 그리는 일을 내가 필요로 했으면 좋겠다고. 이 말풍선을 스스로 그려내다니. 이 구역에서 가장 마음 부자인 사람인 것처럼 미술관 기념품 숍에서 굿즈를 잔뜩 사서 나왔다. 한참 동안 그림을 마주하고 서 있던 기억과 손에 들린 아름다운 굿즈들은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갈까.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행기를 타길 잘했다고, 이런 일이라면 앞으로도 두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꼭 감고 하늘을 날아오르자고, 거듭 희망적인 색채의 말풍선을 띄우던 나였다.
시인 이소호
첫눈에 반하는 순간을 더듬어 보자, 대체로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만은 선명하다. 바가지 머리에, 앳된 얼굴로 열심히 카메라의 붉은 빛을 찾던 너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을 기억한다. ʻ누나는 너무 예쁘’다던 수줍던 고백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을까. ʻ시간에 맘이 무뎌질 거라’ 믿었던 순간을 거쳐 나는 너에게 묻는다. ʻ이대로 네게 닿을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이 사랑의 답을 안다. 이 사랑은 공허한 질문과 슬픈 대답만이 영유할 뿐이다. ʻ주위만 빙빙 돌다 끝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도 우리었다. 서로에게 던진 고백을 전부 모으면 우주를 전부 채우고도 남을 테지만, 사람들은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각각이 생각하는 모양을 인정한다. 인정하기 때문에 나는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누군가는 낭비라고 불렀다. 너를 위해 아끼지 않았던 시간도 돈도 전부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거라던 말도 있었다. 그러나 두 눈에 가득 담을 수 없어도 가까이 있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단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한 채로 끝날 수 있는 걸 알고도 시작한 사랑도 세상에는 있다고 나는 너를 통해 말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사랑이란 너비가 아주 비좁은 평행선을 함께 걷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존재만으로 서로 의지하며 ʻ네 평행선이 되어’ 기꺼이 ʻ함께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 나는 ʻ지친 내 하루 끝’에 네 목소리를 덮고 눈을 자주 감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ʻ함께 꿈꾸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래 그거면 충분했다.
가수는 노랫말을 따라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나는 그 말이 두렵기도 했다. 네가 정말 ʻ빛났다 사라’질까 겁이 났다. 하지만 나는 네가 풀어놓은 다른 말도 믿는다. ʻ같은 자리’에서 ʻ결국 이뤄지는 두 주인공처럼’ 우리를 믿는다. 이 사랑은 언제나 미완이리라. 누군가 한쪽이 서툰 마침표를 찍더라도 이 이야기는 한쪽에 의해 계속해서 쓰여지리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도 결코 안정적이지 않으니라. ʻ우린 영원히 서툴걸.’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늘 처음과 같은 눈빛으로 어색하게 내게 눈 맞춘 채 말하고, 나는 다시 너의 말로 답한다. ʻ알아.’
작가 박참새
이제는 책을 읽을 때마다 간절히 바라게 돼.
제발 이이만큼은……. 제발,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날 구해줬으면…….
마지막이라는 생각 없이 오늘도 책을 읽었어.
나는 곧장 책의 끝으로 달려갔어 단박에 도착하는
연보로. 언제 태어나 누구의 아들딸이었으며 국적 몇 권의 책
그리고 몇 개의 상패 그것과 비슷한 명예들이 나열되겠지.
하지만 나는 다시 끝으로 가. 단박에 도착하는
생의 끝. 아주 단정하고 잘 정리되어 있는 한 인간의 삶. 그 끝.
그리고 어떤 강직한 허탈함이 내 근육을 찢는 것 같았어.
ʻ스스로 생을 마감함’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고?
자살이야. 그냥 자살이라고. 또 자살이라고.
미칠 듯이 허무해서 욕지거리가 나왔어.
사랑하는 죽은 사람들의 목록 속절없이 길어져만 가.
내 친구 선생들 다 죽고 나만 살아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아무도 해주지 않았지.
아무도 탓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덮었어. 게다가 애들 저녁을
챙겨줘야 하기도 했고……
애들 밥투정 들어본 적 있어? 얼마나 어이없고 논리적인지.
헛웃음이 나올 정도야.
내가 가고 나면 너의 그 아름답고 완벽한 머리가 뱉을 애정 어린
비난이 벌써 들리는 것만 같아, 이 헛똑똑이!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냥 읽어.
책을 읽으라고. 거기에 모든 게 있어.
어떤 분명한 사실과 성취가 내 인생과 영혼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
잘 알아.
내게 주어진 재능과 기품도 느껴져.
그것들을 충만히 느끼고 살며 낭비하고도 모자랄 풍요라는 것도.
하지만 그보다 선명한 다음의 생이 자꾸만 나를 따라다녔어.
나를 가지고 싶어 했어.
그리고…… 그랬어.
너무 춥다.
혹독히 춥다.
백 년만의 추위래.
그런데 계절이 계절다운 거면
좋은 거 아닌가?…….
미친 듯이 활자가 쏟아져 나올 때는 정말…… 내가 이 순간을 위해
나머지의 삶을 견딘 것만 같았고
보상을 뛰어넘은 새로운 언어를 발명한 것만 같았지.
아마 나는 그때 이미 알았던 것 같아.
내 정신의 살결이 모두 모였다.
그때부터 난 다음 생이었던 거야.
나로 존재하는 죽음을 그저 받아 적었을 뿐이었던 거야.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거야.
아이들이 걱정돼. 나의 무엇도 닮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줘버린 것 같아.
백 년 전에도 나 같은 여자가 있었을 거야. 백 년 뒤에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게 내 딸이라면……
그러니 부탁할게.
이 편지가 나의 마지막이 아니길
지금 이 순간 그것을
죽음보다도 더 원하고 있어.
당신마저도 잊을 수 있게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는 그런 거,
하지 말고.
다른 것 버릴 생각
추호도 말고.
내가 펜을 멈추는 순간에
박자를 맞춰.
오븐에 넣어.
그리고 내일 아침을 준비해.
할 수 있지?
문을 닫는 당신을 상상할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너는 내 곁에
없었어. 출구도 입구도 아닌 그 문을 박차고 나간
당신의 손에 맡겨진 우리의 신화를
잘 생각해.
내가 정말 당신의 뺨을 뜯어 먹었어?
그래도 당신을 만난 건 사랑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믿어.
난폭하게 사랑하고 가식적으로 의존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동행하는 게 진짜 사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을 거야.
종이의 썰물이 매서운 나의 사르가소 바다, 모든 것이 기록된
백지수표.
거기를 잘 찾아 봐.
나는 펼쳐지지 않은 채로 영원히 살아 있을 거야. 알고 있으라고.
당신의
S.P
김복희
ʻ산다는 건 좋은 거지.’ 하면서 쓰고 읽고 마시는 삶을 열심히 해보는 시인이다.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인간》, 《희망은 사랑을 한다》, 《스미기에 좋지》와 산문집 《노래하는 복희》,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가 있다.
임진아
읽고 그리는 삽화가. 생활하며 쓰는 에세이스트. 만화 풍의 생각을 쓰고 그린다. 종이 위에 표현하는 일을 좋아하며, ʻ임진아 페이퍼’라는 이름으로 지류를 선보인다. 만화 에세이 《오늘의 단어》를 쓰고 그렸다.
이소호
아이돌과 함께 자라, 직장인 시절에는 올림픽 시즌마다 퇴사를 감행할 정도로 모든 덕질을 섭렵했다. 현재는 시와 소설과 산문을 쓰며 좋아하는 것에 대해 늘 골몰하고 있다.
박참새
읽고 쓴다. 말하는 대신 듣는 쪽을 택한다. 시와 시가 아닌 것을 쓰고 있다. 어쩌면 언제나 시이고 싶은 것을 쓰고 있다.
에디터 이주연
글 김복희, 임진아, 이소호, 박참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