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안의 작은 박물관

도록

손안의
작은 박물관

여운이 긴 전시도 시간이 지나면 감흥이 옅어지기 마련이다.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을 때 도록을 꺼내본다. 작품과 대화하던 그때의 감정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어 주는 책. 도록은 오래도록 남아있는 작은 전시장이다.

도록을 왜 사냐고
묻는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엔 도록을 사는 것이 그저 멋져 보였다. 전시를 완벽하게 이해한 듯 보였고 예술을 잘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제 다시 펴볼지도 모르지만 모아두고 싶었다. 내 첫 도록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에서 산 것이다. 당시 거금을 주고 사면서도 이걸 언제 열어볼까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 정리를 하다가 혹은 가끔 무료함을 느낄 때 도록을 펴보게 되었고, 보다 보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21살 한창 친구들과 예쁘게 차려입고 미술관에 갔던 기억, 그림을 보고 느꼈던 감동,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 관람하는 사람의 모습, 관람을 마치고 바로 옆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수다를 떤 기억까지.

도록 한 권으로 추억을 되짚고 다시 그림을 감상하곤 했다. 이사를 하면서 잃어버린 건지 요즘엔 그 도록이 통 보이지 않는다. 새해 목표에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좋은 전시를 보면 도록을 사서 모아보자는 것.

요즘 전시를 많이 보러 다닌다. 당연히 도록에 관심을 두게 되는데, 도록 디자인을 보면 일반 서적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어떤 도록은 전시에서 받은 감명과는 무관하게 그냥 예뻐서 사고 싶은 것도 많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전시장에서 미처 보지 못한 작품을 도록에서 처음 보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 작품이 마음에 와 닿은 경우도 있다. 나도 책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일조하고 있지만 도록을 만드는 작업은 어떤 것인지 새삼 궁금했다.

수집하고 싶은
워크룸프레스의 도록들

워크룸프레스

워크룸프레스는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의 출판 브랜드다. 두 곳 모두 그래픽 디자인과 편집 디자인을 한다. 각 디자이너들의 성향이 달라서 다양한 형태의 디자인 작업을 엿볼 수 있다. 워크룸이 탄생할 즈음 우연치 않게 작업한 첫 도록을 통해 문화예술 분야의 출판을 시작했다.
H. workroompress.kr

INTERVIEW
워크룸 공동 대표 겸 디자이너 이경수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수없이 많은 공을 들이잖아요. 그런데 그 위에 글자를 올리면 작품을 해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어떻게 도록을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도록은 아니지만 우연히 문화예술 분야를 다룰 수 있는 일을 의뢰받았어요. 전시의 홍보물을 제작하다가 도록도 같이 제작하게 되었죠. 몇 년 전만 해도 저희 스튜디오가 이 길에서 독특한 편이었어요. 예쁜 카페도 많이 없었고요. 그리고 이 서촌이라는 동네에 작가분들이 많이 거주하잖아요. 당시 작가분들이 호기심에 들어오셔서 뭐 하는 공간이냐고 물어보곤 했어요. 그러다가 한 작가분이 개인전을 여는데 초청장 같은 것도 만들어주냐고 문의를 하시고 그 제작을 하면서부터 더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첫 도록은 무엇이었나요?

워크룸은 전 안그라픽스 편집자인 박하선 씨와 디자이너 김형진 씨, 그리고 제가 만든 회사예요. 당시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워크룸을 준비하는 사이에 김형진 씨는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때 김형진 씨가 저에게 도록 디자인 일을 하나 연결해줬어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 전시를 했었는데, 그 도록을 디자인하게 된 거죠.

도록 작업을 처음 해본 느낌은 어땠나요?

도록을 만드는 과정은 여태까지 제가 했던 작업과는 전혀 달랐어요. 예전에는 기업과 일을 해서인지 아무래도 갑을 관계가 뚜렷했거든요. 그런데 큐레이터와 장 뒤뷔페 재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서로 협업 관계에서 작업한다는 걸 느꼈죠. 책 디자이너로서 제 의견도 많이 공유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그만큼 저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미술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장 뒤뷔페가 굉장히 유명한 프랑스 화가인데, 당시 저는 몰랐어요. 도록에 논문 내용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죠.

본인에게도 공부가 된 경험이었겠네요.

맞아요. 하나하나가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그 작가의 도록은 이미 세계적으로 굉장히 많이 나와있어요. 가장 유명한 것은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에서 전시했을 당시 만들었던 도록이죠. 그만큼 작업 과정이 까다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미술관마다 수장고가 있잖아요. 당시 덕수궁 미술관 수장고에도 들어가보는 경험을 했어요. 보통 재단에서 작품 이미지를 받아서 작업하거나 그보다 더 좋은 이미지를 발견하면 직접 요청하기도 해요. 그런데 실제 작품을 보지 못한 상황이잖아요. 책을 만들면서 작품을 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재단 이사장도 실제 작품을 봐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디자인이 얼추 완성되고 가제본을 가지고 작품과 비교해보는 과정이 있었어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실제로 보니까 감이 오더라고요. 색도 잘 맞출 수 있었고요.

이전엔 도록을 만드는 디자인 회사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저희도 몰랐는데 당시에 도록 출판 시장이 굉장히 획일화되어 있었어요. 리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처럼 큰 규모의 전시 도록을 제외하고 개인 작가들의 도록을 만드는 전문 업체가 있어요. 인쇄 업체죠. 일정한 포맷이 정해져 있고, 페이지와 작품 수만 알려주면 바로 견적을 알 수 있고 제작에 들어가는 거죠. 그 견적을 보고 계산해보니, 그 비용이면 저희가 더 잘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웃음).

도록을 디자인하는 것과 인문학 서적을 만드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일단 주어지는 재료들이 달라요. 인문학 책은 완성된 원고가 있잖아요. 그리고 책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죠. 그런데 도록은 완료된 것이 없어요. 계속 전시를 준비하면서 도록도 함께 제작하는 거죠. 그래서 전시 콘셉트나 계획이 바뀌면서 도록의 방향성도 계속 바뀌어요. 완성된 원고가 있으면 전부 읽어본 후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떤 느낌으로 읽겠구나’라는 감을 잡을 수 있어요. 그럼 디자인할 때 글자체나 배열 등을 미리 생각할 수 있죠. 전시 도록은 글보다 전시 주제에 집중해요. 대표 전시 작품이 중간에 바뀌면 도록도 계속 바뀌고요.

책의 가치도 조금 다를 것 같아요.

인문학 서적이나 단행본은 책 자체가 전부잖아요. 그런데 도록은 전시의 부가적인 요소로 생각하기 쉬운 것 같아요. 유명한 작가가 아니고서야 개인 작가분들은 전시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산도 전시에 많이 투자를 하죠. 사실 도록이 오래도록 남겨지는 것이어서 더 잘 제작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도록에 분배된 예산이 적으면 아무래도 디자인에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

한번은 회화 작가의 도록을 만들게 되었는데, 회화 작품은 보통 4도 인쇄를 해야 돼요. 그런데 예산이 넉넉하지 않았죠. 그래서 제가 생각했던 것이 제본을 다르게 하자는 것이었어요. 글만 들어가는 부분은 얇은 종이에 1도 인쇄를 하고, 색이 들어가는 페이지는 발색이 잘되는 종이에 4도 인쇄를 하는 방법으로 만들었죠. 그래서 내지 종이가 다 달라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그 도록이 작가분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나 봐요. 다른 작가분들도 와서 도록을 의뢰했죠.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몇 권을 만들었어요. 제본을 아예 안 한 도록도 있었어요. 공정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인쇄와 제단만 하고 작가가 직접 접어서 완성한 것도 있었죠(웃음). 적은 예산으로 만들었지만 고민을 많이 한 도록들이에요.

도록은 전시를 본 후의 여운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해주고, 미처 놓쳤던 작품에 대해서 알게 해주잖아요. 도록을 디자인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도록은 전시를 본 사람들에게는 작품을 구체적으로 알게 하는 기회가 되는 거고, 전시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정보를 줄 수 있잖아요. 책의 기능이 일반 서적과는 다르니 디자인할 때 집중하는 부분도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도록을 디자인할 때 제 역할은 읽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정보를 제공하는 거예요. 사실 어떤 책이든 독자로 하여금 그 글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면 그 기능에 충실했다고 보거든요. 이건 도록뿐만 아니라 모든 책을 디자인할 때 생각하는 것인데요. 제가 책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보는 사람들의 글에 대한 미적 감각을 조금씩 높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책에 대한 기준이 있잖아요. 그런데 전 배열이나 글자 등의 디자인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그 기준들을 높이는 거죠. 사람들이 접하는 책들이 다양해지고 미적으로 좀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워크룸프레스의 작업들을 보면 디자이너마다 성향이 다른 것 같아요.

다양한 디자인을 할 수 있으면 의뢰자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잖아요. 그래서 한 스튜디오지만 다양한 스튜디오들이 모여있는 거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초반에는 회사 대표 전화로 의뢰를 하시다가 요즘에는 특정 디자이너와 작업하고 싶다고 의뢰하는 사람도 많아요. 저 같은 경우는 되게 단순해요. 예전에는 기업들과 일을 하다 보니 인위적이어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연출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이미지에 대한 반감이 있어요. 정직한 것들을 찾다 보니 심플한 것을 추구하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원재료 자체를 가공하지 않는 모습이 가장 좋은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글자를 선택하게 되고 타이포그래피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죠.

표지 디자인에도 타이포그래피를 많이 활용하시죠?

도록도 마찬가지예요. 요즘에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특히 작가분들이 자신의 대표 작품이 꼭 표지에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어요. 그러면 표지 이미지에 글을 얹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싫었어요.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수없이 많은 공을 들이잖아요. 그런데 그 위에 글자를 올리면 작품을 해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글자만으로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해주고 싶었죠. 그래서 작가의 이름이나 전시의 주제를 아예 BI나 CI처럼 만들기도 해요. 한번은 작가분한테 표지로 활용할 소스를 요청했던 경우도 있었어요. 그 작가의 작품이 마티에르Matiere적이었어요. 그래서 스탬프를 만들어주고 시안을 보여주면서 이런 식으로 표지를 디자인하려고 하니 직접 스탬프를 좀 찍어달라고 요청했죠. 그 소스로 표지를 만들었어요. 제가 작가도 아닌데 그 사람의 대표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긴 했어요. 수위 조절을 못 하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적정선을 찾기 위해 노력하죠.

도록의 내지에도 작품을 해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전시 도록에 작품이 들어가는 것은 공간에서 보지 못한 작품을 지면으로 보게 하는 거잖아요. 또 하나의 공간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온전하게 작품만 감상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그런 도록을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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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정혜미

포토그래퍼 윤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