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함과 단순함 사이

단출한 메뉴판

메뉴판을 빼곡하게 채운 요리들. 처음 들어보는 이름부터 몹시 익숙한 것까지 도저히 한 가지를 고르기가 어렵다. 이러한 메뉴 과부하 시대 속에서도 메뉴 미니멀리즘을 시도한 식당들이 있다. 선택과 집중을 택한 그들을 찾았다.

“한 메뉴 식단의 장점이라면 선택하기 쉽다는 거죠. 요즘 아침, 점심, 저녁 전부 챙겨먹는 사람들이 적다 보니 한 끼라도 제대로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매일 한 메뉴에 집중하고 있답니다.”

류지 Ryuji

A. 서울시 마포구 포은로 11 H. instagram.com/ryuji.homemeal 

T. 02 338 9759

합정역 근처에 위치한 ‘류지’는 주인장의 이름 ‘류지현’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름과 식당 분위기를 보고 일본 가정식을 판매하는 곳으로 오해받곤 하지만 국적을 막론하고 매일같이 다른 식단을 제공한다. 한 메뉴 식당을 운영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선택을 쉽게 하는 것과 더불어 제대로 된 한 끼를 챙겨먹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류지의 아담한 공간 안에 있으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마주할 수 있다. 그렇게 방문한 손님들이 그대로 단골이 된 경우가 많아, 이제는 장난도 주고받고 주인장을 위해 손님들이 먹을 것을 사오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식단 정보와 운영 날짜 공지를 올리고 있다. 류지의 식단 선정 과정에는 재미있는 비밀이 하나 있다. 메뉴 결정 중심에는 주인장의 호기심이 있는 것. 보통 제철 재료를 고려하여 메뉴를 결정하지만, 특히 주인장이 흥미를 느끼고 궁금증이 생기는 메뉴를 시도해 본다. 솥밥을 많이 제공하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마솥밥이 가장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보통 식단은 만이천 원 선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편이다. 전복이나 성게알처럼 단가가 비교적 높은 재료를 사용하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날에는 다른 날보다 혼자 찾아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제대로 챙겨 먹고, 혼자만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합정동 작은 골목의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는 곳, 그곳의 이름은 류지다.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에요. 진부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할 때 가장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 지잖아요. 요리는 마음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홈메이드밥 Homemade Bap

A. 서울시 광진구 구의로 6 신호빌딩 T. 02 455 0037

‘홈메이드 밥’은 2호선 구의역 근처에 위치한 밥집이다. 요일마다 한 메뉴를 정해 판매하고 있으며 토요일에는 최용범 셰프가 만들고 싶은 메뉴가 선정 된다. 반찬은 계절에 따라, 셰프의 선택에 따라 바뀐다. 홈메이드 밥의 콘셉트는 ‘집밥’이다. 집에서 육수 하나를 만들어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이른 아침부터 점심 전까지 그날의 메뉴와 반찬만을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한두 시간만으로는 식단 준비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동네에서 가장 먼저 식당 불이 켜진다. 요일에 정해진 메뉴 외에 연말 기념으로 갈비찜과 스테이크도 판매한다. 최 셰프는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으로 스테이크가 판매되기 시작할 즈음에 2주 연속 하루도 빠짐없이 스테이크를 찾던 손님을 꼽았다. 

매일 아침 직접 도정한 쌀로 지은 밥과 토요일 마다 직접 담그고 숙성시킨 김치와 장아찌만을 취급하는 것은 뭐든지 집에서 하는 방식과 똑같이 하고 싶은 그의 바람 때문이다. 유난히 집밥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는지 묻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간단해요. 한식은 집밥이 제일 맛있잖아요. 힘들어도 정직하고요.”

그릇을 무척 사랑하는 그는 강원도 홍천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도예가 박철찬 작가의 그릇만을 식기로 사용한다. 쇠숟가락이 도자기에 부딪히는 묵직한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겨울철에는 다른 것 보다 무가 제일 맛있다며 그는 무나물, 무조림, 무국 등을 추천했다.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해 제철 재료를 손질하는 그의 손이 맑아 보였다.

“기회가 된다면 외국인들에게 한국 가정식을 소개하고 싶어요. 보통 대표 음식은 알지만 소소한 가정식은 접할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미미 식당이 그런 경험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미미 Mimi

A.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29길 14-10 H. instagram.com/mimi_homemeal 

T. 070 4154 0768

가정식 밥집 ‘미미’는 모녀가 함께 운영하는 곳이다. 홍대 골목 어귀를 돌아 들어가면 작은 계단이 반지하 층으로 이어져 있는 대문이 나타난다. 노란 조명이 사람들을 반기는 곳에 식당이 있다. 이곳의 음식은 색을 중요하게 여긴다. 푸릇푸릇하고 다채로운 색감을 띤 식단이야말로 다양한 영양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메뉴뿐만 아니라 소스까지도 직접 만드는데, 완제품이나 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간이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만큼 건강에 좋고 자극적이지 않아 마냥 먹을 수 있는 맛이다. 

처음에 미미 자리를 발견한 것은 딸이었다. 다른 사업의 목적으로 공간을 접했다가 마음에 쏙 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은 잡화점이 아니라 밥집을 하는 자리라는 부동산 사장님의 말에 지금의 미미가 시작되었다. 다소 충동적인 시작이었지만 주변의 좋은 이웃들덕분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밥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밥이다. 밥심으로 하루를 버티는 많은 이들을 위하여 미미米米라고 식당 이름을 지었다. ‘오늘의 정식’ 두 종류와 덮밥 한 종류가 매일 바뀌는데 일주일 단위로 인스타그램에 공지된다. 점심시간에는 덮밥이 가장 인기가 많은 편인데 반찬은 물론 쌀 한 톨까지도 깨끗하게 비우는 사람들이 많다. 부담스럽지 않은 맛과 가격, 그리고 위치. 부드럽게 발음되는 이름만큼 어느 것 하나 자극적이지 않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모토가 하나 있어요. 최상의 스테이크를 최저의 가격으로 제공하는 것이에요. 이 원칙을 스스로 잘 지키고 싶고 라구도 잘 지키고 싶어요. 절대 잃지 않고.”

라구 Ragu

A. 서울시 용산구 신흥로 42 1층 T. 02 796 877

‘라구’는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 지방의 특산 요리로 파스타와 함께 전통적으로 제공되는 고기소스를 말한다. 이곳에서는 오늘의 스테이크와 두 종류의 샐러드 그리고 할머니라구 파스타만을 판매한다(오늘의 스테이크와 동일한 부위로 330그램짜리 빅사이즈 스테이크도 있다). 다양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판매하는 다른 이탈리아 정통 레스토랑에 비하면 아주 단출하다. 할머니라구 파스타는 이무용 셰프가 이탈리아의 식당에서 일하던 시절 셰프의 부인이 알려준 볼로네제 파스타이다. 스테이크를 더욱 맛있게 즐기기 위해서는 와인의 힘이 필요하다. 약간의 와인과 함께 하면 스테이크의 맛과 향이 배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라구에서는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와인 한 잔을 서비스로 제공한다.  

다양한 메뉴를 두는 것보다 비교적 단순한 가짓수의 메뉴를 두는 것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 셰프는 요리를 하는 사람의 집중력이 음식의 균일함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 가장 크다고 전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한정된 에너지가 있는데 한곳에 집중을 쏟아붓는 것이 요리 메뉴의 퀄리티를 더욱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로는 ‘감사’를 꼽았다. 항상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손님들은 물론, 지금 우리가 함께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상황까지도 감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이다. 라구를 찾는 사람들의 설렘과 행복감을 직접 느끼면서 그들은 누군가의 저녁을 아름답게 지켜주고 있다.

“모든 걸 다 잘하며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나 포기해선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죠. 사람들은 바빠지고 경제적으로 위축되면 가장 먼저 식비를 줄여요. 편의점에서 대충 때우거나 끼니를 거르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바쁘고 힘들더라도 최소한 누구나 하루에 한 끼는 건강하게 먹을 수 있어야 해요.”

슬로비 Slobbie

A.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로166 경기청년문화창작소 1층 카페슬로비 

T. 031 293 0858

슬로비가 위치한 수원 경기청년문화창작소를 찾는 사람 대부분은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젊은 청년이들거나 아이를 데리고 책 놀이터에 산책을 나온 엄마들이다. 슬로비의 집밥 메뉴는 이들이 마음 편히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됐다. 슬로비에는 어느 식당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특이점이 있는데, 바로 셰프들이 ‘영셰프스쿨’ 출신이라는 것이다. 영셰프스쿨은 청소년요리대안학교로 사회적기업 오가니제이션이 운영하고 있다. 수원 슬로비는 랑 매니저와 폴베 매니저가 담당하고 있다. 열아홉과 스물넷. 어린 나이지만 매일 소박하고 새로운 식사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슬로비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메뉴는 ‘닭개장’이다. 카페 공간이라 조리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탓에 닭육수 대신 채수로 끓이기 시작했는데 깔끔하다는 호평이 따라왔다. 매일 다른 종류의 나물밥과 가지구이, 멸치볶음, 계란말이, 감자볶음 등이 토핑 겸 반찬으로 올라간다. 날씨가 한껏 추워지는 만큼 매일 새로운 국물 메뉴도 함께 올라간다. 음식의 조화와 단출함이 그대로 식단에 묻어 있다. 

슬로비의 뜻은 ‘Slower, but better working people’의 줄임말이다. 느리지만 자기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을 의미한다. 주변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챙기는 일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함께하는 식사에서 시작된다. 슬로비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슬로비는 느리게, 당신은 건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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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오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