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우아한 시

아이보리 앤 그레이

시간에 이미지가 있다면 흐릿하고 모호한 형상이지 않을까. 낙엽에 경계 없이 지어진 오묘한 색들처럼. 아이보리 앤 그레이IvoryandGray의 주재료는 ‘시간과 자연’이다. 불분명하지만 셀 수 없는 가능성을 가진, 쓰임이 열린 물건을 만든다. 천 조각에 식물 색을 입히고, 나무 조각에 붓질을 덧대어 새로운 질감을 일어내는 작업들. 자연과 시간의 합이 지어낸 물건은 우리의 일상에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배어든다. 아름답게 새긴 얼룩처럼 오래 볼수록 애정 어린 존재들. 곁에 두고 나만의 서사를 기록하는 순간이 쌓여간다.

아스라이 쌓인 것들

겨울이 묻어난 정원. 앙상한 가지만 달린 나무에는 쓸쓸함보다 먼저 차분한 온기가 느껴졌다. 서울 중에서도 가장 서울 같은 동네, 강남의 한 전원주택에는 소박하고도 우아한 두 사람의 작업실이 있다. 오래된 구옥이 주는 고요한 정서가 담긴 이곳에는 자연에서 온 재료, 작고 섬세한 도구, 부드러운 천 조각, 가볍고 뭉툭한 나무 조각들이 저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였던 임수정 작가와 건축 디자이너였던 왕혜원 작가는 같은 대학에서 만나 연을 쌓아왔다. 차림새부터 사소한 말투까지 다른 두 사람은 서로를 멀리서 바라보며 오랜 우정을 지켜왔다. 잔을 부딪치며 무언가를 함께 하자고 도모한 대화 속에서 여러 이름이 탄생했고 그중 하나가 ‘아이보리 앤 그레이’였다.

“이름을 지을 때 꼭 하나의 이유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서 추구하고 있는 가치가 있지만 정작 자신은 모를 때가 많죠. 오랜 시간 디자이너로 살아오면서 그것이 뭘까, 곡괭이질 하듯 생각을 이어왔어요. 그 시간들이 쌓여서 새하얀 바탕에 물든 아이보리와 그레이가 가진 색감을 떠올리게 했죠.”

두 사람은 아이보리 앤 그레이가 탄생한 순간을 되돌리며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낀 외로움을 말했다. 그래서 두 번째 전시 제목에는 ‘Lonely’라는 단어가 오르기도 했다. 끝내 그 외로움은 작업자가 느끼는 영감의 순간과 숨어 있던 두 사람의 취향이 발견했다. 아이보리 앤 그레이의 시작은 자신을 알고자 하는 오랜 고민의 흔적에 있었다.

그곳의 아침 산책

작업실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날엔 가장 먼저 차를 내린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나선 산책길에선 계절의 실감을 불어오는 자연과 마주한다. 가벼운 걸음을 돌려 작업실에 도착하면 작업 시작 전 각자의 준비 과정에 돌입한다. 왕혜원 작가는 주변을 정리하며 작업에 집중을 돕는 움직임을 반복하고, 임수정 작가는 빵 반죽을 시작한다. 베이킹은 천에 자연을 물들이는 그의 작업 과정과 닮아 있다. 두 과정 모두 재료의 양, 발효 시간, 온도와 습도가 결과물을 달리한다. 붕 뜬 작업자의 마음을 다듬는 가벼운 의식이기도 하다. 작업 전 여유로운 일상을 챙기는 습관은 아이보리 앤 그레이의 또 다른 작업 공간이었던 중국의 평화로운 도시 ‘항주’에서부터 이어진다.

“둘 다 디자이너로 오래 살아오면서 쌓아온 고민들이 있어요. 뭐든 빠르게 변화해야만 하고 화려함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었죠. 변화의 계기가 있다면 항주에서 보낸 일상에 있어요. 일을 하기 위해 도착한 도시였지만 길에서 마주하는 놀라운 풍경에 매번 감탄하는 일들이 반복됐죠. 항주에서 평화로운 일상의 습관을 얻었고 디자이너로서 느꼈던 괴로움은 두고 온 셈이에요.”

항주는 자연과 도시가 혼재된 지역이다. 커다란 강, ‘서호’에서는 금융맨들이 조깅을 하고 한쪽에선 남루한 차림의 노인들이 마작을 두는 장면이 매일 펼쳐진다. 지긋한 노부부가 거리의 나무를 다듬는 그림 같은 풍경, 잎이 그대로 달린 과일과 채소를 파는 상점들이 줄을 잇는다. 두 사람은 사소하고도 꾸밈없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찾았다고 말한다. 느리고 평화로운 모드, 작은 순간들이 만든 자연스러운 하루하루가 모여 아이보리 앤 그레이의 작품에 담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영감의 순간은 사실 우리 안에 깊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그곳의 아침 산책에서 깨달았다.

우린, 연약하고도 강인한 존재

천을 정제하고 삶아 우유와 콩, 식초, 소금을 배합해 발효를 시작한다. 발효와 말림을 삭히듯 오래 반복한 뒤 색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천을 바라보며 어떤 재료를 입힐지 고민한다. 자연 재료는 되도록 계절에 맞는 것으로 택한다. 작년 여름에 재워 놓은 해바라기 잎을 올해 봄에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 지난 계절에 미련을 두지 않고 아쉬움은 아쉬운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다. 작업 중 놓쳐 버린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삶에서 스스로 자연스러워지는 과정과 같다고 말한다. 뽀얗게 발효된 천에 색을 입히는 단계부터 작품은 말 그대로 진정한 자연의 흐름에 맡겨진다. 

“염료가 스미는 정도는 재료가 결정할 일이에요. 의도한 것과 다르게 연한 색이 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하게 강하게 물들기도 하죠. 어쩌면 사람과 같아요.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예상하기 어렵죠. 그게 자연의 본질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 꽃과 우리가 다르지 않은 거예요. 작업을 반복하면서 우린 모두 같은 존재이고 결국엔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요.” 두 사람의 작업 과정과 만들어내는 작품은 완전히 다르지만 여러 본질을 한데 모아 느낀다는 점은 같다. 한 사람에게 다양한 표정이 있듯 완성하는 작품 안에서도 각각의 의미가 탄생한다. 왕혜원 작가가 만드는 오브제는 특정한 쓸모를 가지지 않는다. 가볍고 딱딱한 우드 클레이 바깥에 무겁고 질퍽한 파이버 페이스트를 덧대어 만들어진 오브제는 책 읽을 때 쓰는 문진이 될 수도 있고, 그저 두고 바라보며 일상 향유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겉은 건축적인 질감이라 무거워 보이지만 속은 나무로 이뤄져서 사실은 가벼워요. 우리도 같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에게는 여러 모습과 감정이 있죠. 하나의 오브제에 쓰인 재료를 뜯어보면 누군가의 솔직한 모습을 보는 일과 같아요. 이해하기 어렵고도 흥미로운 일이죠. 제가 만드는 물건이 누군가의 일상에 용도 없이, 자유롭게 영위하길 바라요.”

지긋이 바라보는 태도

무릇 작업자에게 평생을 가져갈 작업이 있다는 건 앞으로의 모든 하루가 풍성해짐과 같다. 오랫동안 디자이너로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가 믿는 아름다움을 꾸준히 실현하고자 한다. 아이보리 앤 그레이는 물건을 만드는 브랜드이기 전에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함에 가깝다. 하얀 바탕에 색이 더해져 조금씩, 천천히 자연스러운 얼룩이 생기는 과정. 작은 순간이 모여 하나의 시와 같은 삶을 바란다.

‘길을 걷는 어린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오는 많은 꽃잎을 개의치 않듯이’ 하루하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아이보리 앤 그레이만의 소박하고 우아한 시가 여기에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부드럽고도 강인한 문체, 오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할 소중한 시다.

Ⓒ 아이보리 앤 그레이

H. ivoryandgray.com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