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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우 — 사진작가
박종우 작가는 세상 곳곳을 거닐며 옅어져 가는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내 그 흔적의 소매를 꼭 쥐기도 한다. 그러니까, 박종우 작가는 사라지는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는 부산을 기록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부터 더듬었다. 시대의 풍파에 휩쓸리던 가족들과 무엇이든 꽉 들어찬 좁은 도시. 파란 물탱크와 높이 솟은 굴뚝. 소년의 마음으로 되새겨본 부산에는 어떤 감정과 기억이 담겨 있을까.
작년에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전을 여셨죠. 작가님이 바라본 부산의 모습을 담아서요.
한국에 사진미술관이 두 곳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이에요. 그곳에서 우리나라의 사진가 중 중진 다큐멘터리 작가들로 하여금 부산을 기록하게 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특이한 점은 부산에 거주하지 않는 사진가에게 작업을 의뢰한다는 거였어요. 도시를 너무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정형화된 모습만 볼 수도 있으니까.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곤 이 프로젝트로 매년 한 명씩 사진전을 열었고, 제가 여덟 번째 작가였어요.
흑백으로 작업한 점이 눈에 띄어요. ‘부산 이바구’라는 이름의 의미도 궁금했고요.
하나의 도시를 두고 다룰 만한 주제는 앞서 많이 나왔던 터라 내가 아는, 내가 기억하는 부산의 모습을 꺼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걸 중심축으로 삼으니 컬러보다는 흑백이 잘 어울릴 것 같더라고요. 전시 이름은 참 정하기 어려웠는데요. 우선은 부산을 회상한다는 의미에서 ‘Busan Evoked’라고 정해두고, 단어 음을 차용해서 ‘이바구’라는 단어를 넣어봤죠. 이야기라는 말의 경상도 사투리기도 하고 이제 보니 꽤 부산적인 이름 같아 만족스러워요. 흑백 작업도, 이런 방식의 이름 짓기도 저한테는 특별한 시도였어요.
작가님이 말하는 부산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가족 역사부터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요.
친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독립, 전쟁, 경제 발전 같은 시대의 격동을 전부 겪은 분이세요.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느라 연락이 끊겨버려서 외동 아들이던 제 아버지와 이북에 사셨어요. 아버지가 먼저 월남하고 나중에 할머니까지 내려오셔서 서울 영등포에 자리를 잡게 되었죠. 아버지가 국방부 직할 부대 장교였는데 6·25전쟁이 터져 얼떨결에 소식이 끊겨버렸어요.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할머니는 동네에 숨어 있었다고 해요. 당시에는 세력이 바뀔 때마다 밀고가 참 많아서 군 장교의 가족은 살아남기 힘들었거든요. 다행히 우리 할머니를 밀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할머니 존함이 유순홍이에요. 이름처럼 유순하고 인자한 분이라서 주변에 인정을 많이 베푸셨죠. 이웃들에게 퍼주기 좋아하시고 잘 챙겨주던 분이라 다들 지켜주었대요. 이후 인천 상륙 작전이 벌어지면서 숨통이 트이나 했는데 곧 중공군이 참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전세가 다시 뒤집힌 거죠. 이때까지 할머니와 아버지는 만나지 못했고, 할머니는 북한군이 점령했던 시기에 대한 공포로 피난 열차에 오르셨어요. 그때는 모든 피난 열차가 부산으로 가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할머니가 난생 처음 부산진역에 도착했는데 낯선 동네라 갈 데도 없고 돈도 없었대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역사의 한 장면이네요. 개인의 의지나 선택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일생이 흘러가던 시기였고요.
그때는 다 그렇죠.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가 갈 곳은 절뿐이라는 생각에, 역에서 가장 가까운 절을 수소문했고 결국 수정구 연등사라는 절에 머물게 되셨어요. 사실 이때 아버지는 중공군과 황해도에서 전투를 하다가 총상을 입고 부산 수정구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어요. 당시에 워낙 헤어진 사람들이 많으니까 영도다리에 가면 누군가를 찾는 팻말과 쪽지가 가득하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그렇게 컸다고 해요. 할머니와 아버지도 매번 영도다리를 맴돌았지만 서로 엇갈려 만나지를 못했어요 그러다가 반찬거리를 사러 간 구멍가게에서 우연히 아버지와 마주치면서 마치 영화에 나오는 듯한 기적의 상봉을 한 거예요. 그 후 아버지가 어머니와 만나 결혼하고 60년대에 경남 진해의 육군대학 관사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제 기억은 그때부터 시작되는데, 할머니가 한국전쟁 당시의 부산을 많이 들려줬어요. 부산이 바로 코앞인데 자주 못 가서 아쉽다는 말씀도 하셨고요.
부산에 머물던 시기가 길지 않은데 할머니 마음에 고마움이 깊이 남았나 봐요.
맞아요.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전쟁 기간 동안 머물렀던 부산의 절에 있게 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할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 부산에 가게 됐죠.
작가님이 처음 마주한 부산이었네요. 부산의 첫인상, 어땠나요?
진해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낙동강 구포다리를 지나야 해요. 낙동강이라는 무척 큰 강을 건너는 것도 놀라운데, 다리를 지나자마자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투리로 이것저것 사라고 소리쳤어요. 연등사에 도착해 바라본 주변 풍경, 산복도로와 산 비탈길에 빼곡하게 들어찬 판잣집이 잊히지가 않아요. 저는 열 맞춰 지어진 관사에서만 살았으니 부산을 보곤 참 별세계가 다 있다는 생각을 했죠(웃음).
이후에도 이모님을 만나러 영도에 자주 가셨다고 하니 즐거운 추억도 많겠어요.
함께 서울에 살던 이모가 영도로 이사를 가면서 자주 놀러 오라고 했죠. 이모가 부산 사람과 결혼했거든요. 방학을 틈타 꽤 오랫동안 부산을 오갔기 때문에 60-70년대의 모습이 생생해요. 사촌들이랑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그때 처음 해운대도 가봤어요.
빽빽한 마을과 오래된 집, 파란 물탱크처럼 기억 속 모습을 사진에도 옮겨 두셨죠.
원래 부산은 산이 많고 평지가 넓지 않기 때문에 큰 규모의 도시가 들어올 수 없어요. 초량이라는 동네는 예전에 해안선이었고요. 지금의 부산역은 바다를 흙으로 메운 매립지예요. 매립을 해서 탄생한 도시에 갑자기 5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몰려오면서, 도시가 굉장히 기형적으로 발달하게 됐죠. 사람이 절대 살 수 없는 급경사에 집이 세워졌고, 산꼭대기 마을까지 물을 끌어오기 힘드니 집 위로 물탱크를 두게 되었고요. 빽빽하게 지어진 집마다 머리에 파란 물탱크 하나씩을 얹게 된 거예요. 시대의 흔적이 남은 것들은 사진으로 남겼어요.
목욕탕 굴뚝을 포착한 작업도 흥미로워요. 부산에는 원래 목욕탕이 많나요?
학생 때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딱 도착하면 눈앞에 굴뚝이 꽤 많았어요. 아까 말했다시피, 물이 귀하니까 집마다 목욕을 할 공간이 없어서 자연스레 목욕탕이 들어선 거예요. 전국에서 공동목욕탕이 가장 많은 도시이죠. 전성기에는 2,000여개가 넘는 곳이 영업을 했다고 해요. 굴뚝이 높은 것도 신기하죠? 굴뚝을 낮게 지으면 산꼭대기에 있는 집들이 연기 때문에 창문을 못 열거든요. 그래서 굴뚝도 이렇게나 높은 거예요.
지역적 특색과 시대적 특색이 퍼즐 맞추듯 이어져요. 이런 장소들은 도대체 어떻게 찾으셨어요?
목욕탕은 지도에서 검색이 잘 안 돼요. 하지만 눈에는 띄잖아요. 동네를 훑다가 발견하면 GPS 좌표를 지도에 표시하는 식으로 1년 동안 자료 조사를 했어요. 참 재미있는 게, 목욕탕 굴뚝에 세상 좋은 이름은 다 갖다 붙여요(웃음). 건강탕, 에덴탕, 장수탕… 목욕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 공간을 넘어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서로 소식을 주고받던 공동체의 소통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집집마다 샤워시설이 갖춰지고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그 많던 부산의 목욕탕들이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떠나니까 빈집이 많아지고 가게들은 문을 닫고, 그럴수록 마을은 황폐화 되기 쉬워져서 아쉽죠.
이 도시는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부산은 전근대적인 옛날 모습부터 초현대적인 모습까지 공존하는 곳이에요. 굉장히 특별한 도시죠. 이곳을 바라볼 때마다 ‘도시의 변신Metamorphosis To Metropolis’이라는 말이 떠올라요. 메타모포시스는 변신, 변태를 의미하는데요. 곤충이 껍질을 깨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잖아요. 나비가 변태를 하고 확 날아오르듯, 부산을 보면 그 생각이 들어요. 구도심의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착각에 빠지는 반면, 해운대 마린시티로 오면 미래도시에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듭니다.
멋있는 은유예요. 한편으로는 변해가는 모습이 서운하진 않으세요?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언제나 있지요. 부산은 발전이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형태라 원도심이나 산복도로의 집들은 가만둘 수가 없을 거예요. 몇십 년 후에는 내가 기록한 이 모습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죠. 더 많이 기록해 두고 싶네요.
작가님은 세계 곳곳을 다큐멘터리 사진과 영상으로 포착하시잖아요. 결국 모든 작업은 기록하기 위함에서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사진예술에서 기록성이라는 특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사진도 흥미롭죠. 하지만 앞으로 10년, 20년 지났을 때 과연 순간의 생각을 해석한 작업물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앞으로 점점 더 많이 변하게 될 장면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죠. 사라지는 것을 박제하고 기록해 두고 싶다는 게 작업의 의미로서는 가장 커요. 누구라도 해두면 좋을 텐데 다른 사람이 할 마음이 없다면 내가 하면 되니까요.
셔터를 눌러 기록한 공간 중 부산 외에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딜까요?
2009년에 우리나라 비무장지대를 촬영했어요. 그때 해외 스케줄이 많았는데 제의를 받자마자 모두 캔슬하고 2년 동안 뛰어들었죠. 사진 찍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보고 싶지 않겠어요(웃음)? 한반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한데 사람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독특한 환경이었죠. 히말라야 산맥 구석구석과 티베트의 험준한 교역 루트인 차마고도 등지도 오랫동안 드나들었습니다. 낯선 곳을 향해 떠날 때마다 기대하지 않았던 엄청난 광경을 마주하면 숨이 탁 막혀요. 세상에 이런 데가 있구나, 하고.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어요.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으신가 봐요.
막상 가기 전에는 어떤 장면을 담게 될지를 모르잖아요. 그 순간이 불안하지 않고 기대감이 충만하게 느껴져요. 끝까지 가보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어떤 마을을 찾게 되면 그 마을 위에 다른 마을이 있는 걸 참지 못하겠더라고요(웃음). 아무리 구석진 오지라도 사람 사는 기척이 얼핏 보이면 어떻게든, 언제라도 꼭 가보고 싶어져요. 히말라야 같은 큰 산에 가면 저 산의 뒤쪽에는 뭐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몇백 킬로미터를 돌아서 찾아가 보기도 하고. 이런 마음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 같네요.
그래서 그런지 작업실 벽 한쪽이 온통 세계 지도예요.
그렇죠? 어릴 때부터 세계 지도를 즐겨 봤어요. 쫙 펼쳐놓고 어디 가야겠다, 그런 것도 연구를 많이 했고요. 아직도 바라보면서 어딜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사진이라는 일을 매번 새 마음으로 대하시네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작업이 많겠어요.
사실 요즘엔 다른 일로 바쁘긴 해요. 팬데믹 때문에 어디 가는 게 쉽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뭘 할까 연구하다가, 마당에 장미를 몇 송이 심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거기에 완전 빠져버려서 거의 장미 밭을 관리하고 있죠. 촬영을 가려고 하면 장미들이 눈에 밟혀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네요(웃음). 그래도 가야죠. 차마고도처럼 낯선 장소를 소개하고 싶기도 하고, 비무장지대처럼 사람의 왕래를 막는 세계 곳곳의 장벽에도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요.
작가님이 또 한 번 남겨주실 기록들이 기대돼요.
일종의 사명감이기도 해요. 공간 그 자체, 그곳이 가진 의미를 기억하던 사람들까지 사라져버리기 전에 찍어두려고요.
에디터 이명주
사진 박종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