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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머무름 속’에 있다
친구와 떠난 파리 여행에서 열흘 동안 머물, 나는 인상이 각각 다른 세 곳에 집을 구했다.
레아Lea의 집, 설렘
파리는 첫날부터 날 애먹였다. 짐은 잔뜩인데 비마저 내렸기 때문이다. 에펠탑에서 가까워 선택한 레아의 집 열쇠는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건물 1층 바에 맡겨져 있었고, 겨우 들어선 건물은 끝이 보이지 않는 목조식 나선형 계단이 빼곡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5층 계단을 올라 낡은 문을 지나쳐 방에 들어섰다. 여행 첫날 맞이한 레아의 집에서 그 기분을 파리의 로맨틱함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쩔지 모르는 그 어중간한 기분에 나는 서있었다. 낮에는 시내 곳곳을 구경하고 저녁을 먹고 레아의 집에 당도하면 친구는 1층 간이침대, 나는 2층에 누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 후 밤이 깊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푸른 새벽. 핸드폰에 뜬 메시지 알람에 번뜩 정신이 깼다. 어제 연락이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내가 파리에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내 파리 여행의 기대가 실현되듯 ‘그’에게 온 문자였다. 프랑스 낭트Nantes라는 지역에서 와인을 먹다 이 새벽녘에 연락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혹 이게 내가 바라던 파리 여행의 모습이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낡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레아의 집에서 그녀가 친절히 남긴 물품 사용법이라던가, 사람들이 남긴 메모라던가, 창밖 기다란 바질 화분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으니까.
다비드David의 집, 기대의 실현
두 번째 숙소인 다비드의 집도 우리의 발길을 안으로 들이기 거부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 기분은 레아의 집에서보다 한결 나아져 있었다. 아마 ‘그’를 만난다는 설렘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피어나고 있는 듯했다. 다비드 집에서 맞이하는 이튿날, 같이 여행을 간 친구는 시티바이크인 벨리브Velib를 타고 파리 곳곳을 둘러보겠다며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외간남자’의 분위기가 그득한 집에서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머리는 어떻게 할까?’ 고민만 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열쇠는 건물 옆 작은 레스토랑에 친구가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맡겨놓고 그를 만나러 갔다. 이번 여행에서 세 번째로 들리는, 다비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노트르담 성당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 앞 광장을 가로질러 그가 걸어왔다. 근 일 년 만에 만나는 그는 프랑스 특유의 따가운 가을 햇살 탓인지 얼굴이 붉게 익어있었고 역시나 말라있었다. 그 앞에 서서 나는 쑥스럽기도, 기쁘기도 하여 입술 가장자리가 들썩였다. 그와 센 강 길을 걷고 가고 싶던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도 먹었다. 늦은 시간까지 시내 곳곳의 와인 집을 돌아다니며 그간 서로 연락이 끊겼을 때의 이야기를 나눴다. 밤길의 가로수 빛을 따라 걷다 보니 우리는 다시 노트르담 성당으로 돌아와있었다. 택시를 타고 우리 집 앞으로 돌아갔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그와 함께 비 오는 파리 시내의 아파트 앞에 서있자니 꼭 내가 살고 있는 집 앞에서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연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주디Judi의 집, 아쉬움
파리에서 마지막 사흘을 머물 집. 그 집의 주인인 주디는 파리에 집이 있는 미국인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집을 빌리는 어플리케이션으로 본 그녀의 머리카락은 보라색이었고, 그 머리카락 색과 꼭 닮은 집을 볼 수 있었다. 친구와 둘이 침대에 누워 다리를 뻗으면 머리끝과 발끝이 벽 끝과 다른 벽 끝에 닿을 듯 작았고 벽과 벽 사이 내가 누워있는 공간은 분홍과 보라빛의 향연이었다. 그녀의 집은 마레 지구 가까이 있었는데 낮 시간엔 일찍 일어나 동네 곳곳을 걷다가 낮잠을 청할 수 있는 여유, 저녁엔 눈여겨본 음식점이나 바를 다시 찾아 친구와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들이 더 생겨났다.
‘그’와 갔던 레스토랑 또한 주디의 집에서 멀지 않았고, 그때 그가 레스토랑에서 선택한 양고기스테이크Lamb chop가 생각나 친구와 찾아가기도 했다. 마지막 집에서 사흘. 나는 ‘그’와 연락을 놓지 않았다. ‘그’는 파리의 공항 근처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파리 시내에 나오게 되면 연락하겠노라 했다. 하지만 그에게 한 번 더 보자며, 늦은 밤이라도 좋으니 나오라는 말 한 번 못 꺼냈다. 결국 ‘그’와의 만남은 주디 집을 떠날 때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내가 파리 여행을 하며 묶은 세 곳의 숙소는 여행자가 많이 다니고, 힙한 가게들이 즐비하거나 유명 관광지 길목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은 아니었다. 그저 ‘동네’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에 위치한, 숙소라고 하기보단 누군가의 집이었다. 집 안 냉장고에 남겨진 작은 메모에 친구의 집에 머무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남성 제품이 즐비한 화장실에 들어서면 지난 밤 클럽에서 만난 이름 모를 남자 집에 방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또 내가 분홍색을 엄청 좋아해서 내 머리색도 분홍색으로 염색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각각 분위기가 다른 세 집과 함께 나는 ‘그’를 기억한다. 잠이 쉽사리 오지 않던 새벽녘 ‘그’의 문자를 처음 받은 레아의 집, ‘그’와 헤어지기 싫던 다비드의 집 앞, 그리고 언제쯤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깊게 고민하던 주디의 집. 내가 머물던 파리의 집엔 ‘그’가 있다.
로버트 엣 루이스
Robert et Louise
양고기스테이크Lamb chop가 일품. 사람이 북적이는 걸 보면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레스토랑인 것 같다. 고기 굽는 냄새와 사람들 말소리가 잘 어우러지는 곳이다.
글 사진 김숙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