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마을]

적당히 소란스러운

파도치지 않는 자리

“엄마 나 배 속이 파도쳐. 울렁거려.“
“왜?”
“몰라, 토할 것 같아.”
“뒷좌석에서 뭐 했어?“
“책 읽었어.”
“그러니까 그렇지!”

이게 무슨 말이지? 집에서 책을 읽으면 구역질이 나지 않는데, 차에서 읽으면 구역질이 난다고? 독서는 좋은 거라고 배웠는데,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왜? 휴게소에 내려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숨을 헐떡이면서 이건 너무 고약한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프고, 배 속에서 크고 작은 파도가 쳤다. 눈물이 핑 돌면서 울기 직전까지 갔을 때, 아빠가 등을 쓰다듬으며 공기를 크게 마시라고 했다.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혀 줄 거라면서. 공기가? 매일 마시는 건데, 이 공기가 약이라고? 자동차에서 노래를 크게 부르는 건 괜찮은데, 책을 읽으면 배 속에 파도가 생긴다고? 그때는 모든 게 새롭고 모든 게 이상했다. 멀미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을 때의 일이다.

유치원 시절, 소풍 가는 날이면 귀 뒤에 뭔가를 붙이고 나타나던 애들이 있었다. 그땐 그게 뭔지 몰랐다. 굳이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내 짝꿍 이름을 부르면서 “엄마가 잊지 말고 ‘키미테’ 붙여주라고 하셨어.” 하길래 그게 뭔가 유심히 보았더니 소풍날에만 나타나는 그 작고 동그란 밴드 같은 거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멀미하는 친구들이 그걸 붙이고서 파도치는 속을 잠재운다는 것을.

좋아하는 만화책에 이런 장면이 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여자 주인공은 버스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책에 흠뻑 빠져 내리는 걸 잊은 주인공을 친구가 허겁지겁 데리고 내린다. 주인공은 버스에서 헐레벌떡 내리자마자 “우엑! 메스꺼워!” 하고 어릴 적 나처럼 허리를 숙여 헛구역질한다. 친구가 말한다. “비 오는데 책을 읽으니까 그렇지.” 아, 그렇구나. 버스에서 책 읽는 것도 힘들지만, 거기에 비까지 내리면 완벽히 멀미하게 되는구나.

꼭 멀미 때문은 아니지만 버스보다는 전철이 확실히 좋다. 버스는 하차 벨을 눌러 ‘저 내려요!’를 알려야 하고, 그 행동이 버스 기사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 같아 멋쩍고 부끄럽다. 반면 전철은 모든 역에서 자유로이 타고 내리게 하니까, 좀처럼 누군가를 신경 쓰이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좋다. 어려서는 인천에, 조금 커서부터는 줄곧 부천에 살았다.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는 집도 한 군데 있지만 그걸 포함하더라도 서울에 살아본 적은 없다. 그런데 왜 어른이 되고 나서 다닌 학교는, 회사는 전부 서울이었을까.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 점이 이상하다.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되고 나서는 약속도 대부분 서울이다. 

“어디서 만날까?” 물을 때의 ‘어디’는 대체로 서울시다. 보통은 연남이나 연희, 서촌이나 망원 등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나는 집 밖으로 나가는 날이면 항상 이동 시간이 길었다. 목적지까지는 짧으면 한 시간, 길면 두 시간, 아주 길면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까지도 걸린다. 오가는 시간을 합하면 교통수단에서 두 시간에서 다섯 시간까지도 머무는 셈이다. KTX였다면 대전이나 대구는 물론이고, 부산에 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쓰고 보니 굉장하다. 그 시간 동안 전철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전철에서 특히 좋아하는 일은 책 읽기고, 내릴 역에 딱 맞춰 책 한 권을 끝내는 날이면 무척 기분이 좋다. 집에서 한 권 읽을 때보다 뿌듯하고 생산적인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심지어 집중도 잘된다. 그렇게 믿다 보니 이러저러한 이유를 붙여 전철에서 더 바지런히 책을 읽게 되었다. ‘전철에서 책 읽는 사람’이라는 역할도 (침착해 보여서) 마음에 들고.

벗어나선 안 되는 자리

전철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다 보면 그 안에 함께 머무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휴대폰을 보고 있다. 드라마, 혹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거나 유튜브, SNS를 보는 것도 같다. 그들은 대체로 웃음을 한껏 참는 얼굴로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를 하고 있다. 그 부자연스러움이 어디서 오는 걸까 한참 생각하다 알게 됐다. 다소 기이하게 뻗어 나온 목 때문이다. 그 자세를 인지한 뒤부터는 휴대폰을 볼 때 의식적으로 눈높이까지 액정을 추켜든다. 목이 길게 뻗어 나온 채 매일 두세 시간씩 이동한다면 훗날 몹시 이상하게 구부러진 할머니가 되어 있을 테니까. 목이 길게 뻗어 나와 구부러진 할머니, 눈이 나빠 인상을 찌푸려 미간에 주름이 진 할머니, 엄지를 많이 써서 손가락 하나만 기역 자로 구부러진 할머니…가 되는 건 조금 싫다. 애써 휴대폰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런 다짐도 마감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전철은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작업실이어서, 나는 신경 써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휴대폰을 눈높이까지 올리는 걸 면죄부 삼아 모바일로 원고를 쓴다. 이동 시간에 짬짬이 하는 글쓰기는 생각보다 효율적이다.

모바일 화면으로 보는 원고는 컴퓨터 모니터로 볼 때와 행갈이가 달라져 확실히 다른 느낌을 준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입체적으로 읽어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작업이 거듭돼 귀찮아질 때도 있다. 잘 마쳤다고 생각한 글이 별로일 때도 하고, 컴퓨터 모니터로는 잘 읽혔는데 휴대폰으로 보니 한 호흡으로 읽히지 않는 글도 있다. 괜히 이동하다가 원고를 꺼내보는 바람에 수정하게 됐다고 여길 때도 있지만, 이동 중에 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짐 내려놓는 기분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전철을 작업 공간으로 쓰니 내 시간이 늘었다. ‘마감러’ 행세를 하며 새벽에 깨어 있는 일이 비교적 줄었고, 바쁘다는 이유로 내 시간에 소홀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나. 시간을 쪼개 쓰는 쏠쏠함을 알게 되고 재미를 붙이다 보니 점점 무모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내릴 타이밍이 지나서도 계속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전철에서 내릴 때도, 환승 플랫폼으로 걸을 때도, 열차를 기다리면서도, 계단을 오르면서도 원고를 닫지 못하고 휴대폰을 보면서 이동하는 그런 무모함. 그것은 마치 바퀴 달린 의자 위에 올라서서 책장 가장 높은 칸의 책을 꺼내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속도가 붙은 원고 작업을 끊지 못하고 이동하던 중에, 붐비는 환승역 계단에서 발을 잘못 디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넘어지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이대로 넘어지면 치아가 부러질 것 같아 입술부터 앙다물었다. 양손으로 휴대폰도 감싸 쥐었다. 그런 모습으로 계단을 뒹굴었다. 천만다행으로 치아도, 휴대폰도 지켰지만 수정하던 원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가방에 넣어둔 텀블러는 내 것이라 하기 민망할 정도로 멀리서 나뒹굴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어깨가 아팠다. 작은 욕심으로 작업 공간을 너무 멀리 벗어난 대가였다. 계단 아래 엎어진 채 “아프다….” 말하면서 얄궂게도 작업 공간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작업 공간은 멈춰 있을 수도, 움직일 수도 있으나, 작업자가 움직이며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넘어지고 나서야 하는 이런 생각은 고통과 창피함에, 사라져버린 원고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지루할 수 없는 자리

전철 소리에 귀 기울이면 청각이 먼 곳으로 내달린다. 쿠궁, 쿠궁, 쿠궁, 일정하게 바퀴가 구르고 선로와 부딪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정차 역을 알리는 소리…. 반복되는 소리에 정신을 맡기면 청각부터 하나씩 감각이 소실되고, 이내 집중하고 싶은 것 한 가지만 차분하게 남는다. 학창 시절에도 적당한 소음이 있는 곳에서 공부하길 좋아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독서실에서 책을 펼치면 엉덩이부터 등허리까지 근질근질해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책 넘기는 소리가, 연필로 쓰는 소리가 남들에게 거슬릴 것 같았고, 숨소리마저 조심하게 되어 뭔가 옥죄는 기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잠잠한 독서실이나 교실보다는 적당히 소란한 방구석이나 후미진 카페가 좋았다. 그러니까 전철에서 들리는 일정한 소음 속에서 집중을 더 잘하게 되는 건 나한텐 당연한 일이었다. 전철에서 글자에 훨씬 깊이 빠져들 수 있다고 믿고 나니 정말로 점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철에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글자를 읽는 것도, 글을 수정하는 것도, 이야기를 생각해 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손 글씨만큼은 쉽지 않다. 적당한 진동과 움직임 때문에 책에 밑줄만 그어도 직선으로 곱게 그려지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친구에게 줄 편지를 끝맺지 못하여 전철에서 쓰려다가 이름 두 자도 쓰지 못한 채 엉망이 된 편지지를 마주한 적이 있다. 너무 괴발개발이라 헛웃음이 났다. 편지지를 가방에 넣고 전철에서도 못 하는 게 있다면서 하릴없이 주변을 관찰하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쩍 벌린 다리가 눈에 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그런 자세를 가리켜 ‘쩍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체로 흉이다. 그러나 그날 본 ‘쩍벌’은 좀 달랐다. 눈살 찌푸리며 고개 돌리게 되던 이전의 ‘쩍벌’과는 달리 자꾸 시선이 가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입꼬리에 힘을 주어 아래로 당겨야 했다. ‘쩍벌’의 주인공은 입가에 끈적한 침을 흘리며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아이. 엄마 팔에 머리를 기대고 작고 짧은 다리를 한껏 벌려도 1인용 의자에 가득 차기는커녕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모습은 만화에 담긴 자그마한 한 컷 같아 정겹고,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이라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냥 지나쳐버리고 싶지 않아 가방에서 편지지 대신 일기장을 꺼냈다. 엉망이어도 좋을 글씨로 눈앞의 풍경을 그리고 적었다. 전철의 흔들리는 진동에 맞춰 아이의 실루엣은 전기 오른 피카츄처럼 뾰족뾰족 솟아올랐지만 그런 그림만으로도 좋았다. 집에 돌아와 그 장면을 복기하며 나 홀로 몇 번이나 “귀여워!” 몸서리쳤던가.

결국 그날 맺지 못한 편지는 전철에서 내려 한 자 한 자 적어 완성했다. 플랫폼 계단께 어딘가가 대리석으로 마무리되어 매끄러운 책받침이 되어주었다. 선 채로 글자를 적으니 플랫폼은 거대한 작업실이 되었고, 대리석은 좋은 책상이 되어주었다. 작업실이란 내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도록 품을 내어주는 공간이고, 집중할 수 있도록 친히 존재감을 지워주는 공간이며, 때때로 너무 익숙해서 작업실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음 사이에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가면서 나는 편지를 적고, 봉투에 담고, 스티커를 붙이고, 받는 이의 이름을 적었다.

나는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는 이 작업실을 좋아한다. 가끔 책에 밑줄을 긋다 연필을 떨어뜨려 머쓱해지기도 하고, 이동길에 바지런히 작성한 원고가 다시 보니 엉망이라 뒤엎을 때도 있고, 작업을 끊지 못해 몇 정거장 더 가버릴 때도 있지만, 일정한 소음과 관찰할 거리가 있고, 지금껏 해온 것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내팽개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곳. 나는 이 공간의 무신경함과 덤덤함, 그리고 언제나 품을 내어주는 아량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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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