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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한 혀끝의 기억
‘부성유치원’의 거의 모든 걸 기억한다. 유치원 아래층에 있던 ‘민다방’, 얼굴에 큰 점이 있는 체육 선생님, 파스텔톤 미끄럼틀, 둥근 안경을 쓰고 둥글게 웃으며 둥근 방식으로 버스를 운전하는 원장 선생님, 노란색 원복을 입고 오가는 친구들, 폭신한 매트로 가득하던 놀이방 풍경, 내 손을 잡지 않으려 애쓰던 짝꿍 이름 같은 걸. 나는 유치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이상한 구멍에 손을 넣고 찌릿한 감각을 느끼는 일이나 낱말 카드로 국가의 수도를 외우는 일도 그랬지만 특히 좋아한 건 리코더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유치원 정규 수업이 끝나고 간단하게 리코더를 불던 이 시간을 위해 유치원이 끝나도 쉽사리 집에 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새빨간 리코더를 입에 물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유치원의 시간을 연장하던 나는 욕구를 채우고 나면 허기가 졌다.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과자부터 찾기 바빴다. 엄마는 여느 엄마들처럼 밥을 먹으면 간식을 준다고 했고, 밥 한 그릇을 느릿느릿 비우곤 득달같이 찾던 과자는 ‘칸쵸’. 분홍색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은색 봉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칸쵸 상자 색깔과 꼭 닮은 물건을 보면 “칸쵸 색!” 하고 이름 붙일 정도로 칸쵸 색은 오랜 시간 그대로 머물러 왔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라는 건 시간과 함께 공고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해 본다. 매일같이 칸쵸를 먹는 딸이 걱정되었는지 어느 날 엄마는 말한다.
“주연아, 칸쵸 알맹이에 구멍 보이니?”
“응!”
“벌레가 먹어버렸네. 구멍 없는 칸쵸 골라 먹을까?”
그땐 몰랐다. 그게 초코 주입 구멍이라는 걸. 나는 칸쵸의 은색 포장지를 뜯어 작은 손으로 칸쵸 알맹이를 집어 올렸다. ‘음… 벌레가 먹었네.’ 그다음 칸쵸 알맹이를 들어 올렸다. ‘음… 벌레가 먹었네.’ 그다음 칸쵸 알맹이도 ‘음… 벌레가 먹었네.’ 한참을 칸쵸 알맹이를 살펴보다 보니 한 봉지가 전부 벌레 먹은 칸쵸라는 걸 알았다.
“엄마, 칸쵸를 벌레가 다 먹었어.”
“벌레 먹은 칸쵸는 배 ‘아야’ 하겠지?”
엄마는 칸쵸 봉투를 야무지게 묶어 부엌의 작은 창문틀에 올려두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실컷 유치원 이야기를 하곤 허기가 져 여느 때처럼 칸쵸를 찾으면 엄마는 밥부터 먹였고, 그걸 먹고 나서 다시 칸쵸를 찾으면 “벌레 구멍을 잘 살펴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 몇 봉지의 칸쵸를 벌레에게 빼앗겼던가. 한동안 나는 자린고비가 굴비를 쳐다보듯 부엌 창틀의 칸쵸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몇 시간, 며칠, 몇 주 동안이나. 언젠가는 칸쵸 알맹이에서 벌레가 기어 나올 거라 믿으며.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아빠 한마디에 신이 나서 아이스크림 장수를 찾아다녔다. 주걱 같은 것으로 젤라토를 힘껏 퍼서 얹어주는 아이스크림 장수들이 곳곳에 보였다. 아이스크림 카트에는 과자 콘이 수십 개 쌓여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어떤 카트에는 영화 <UP>(2009)처럼 헬륨 풍선 더미가 매달려 곧 날아갈 듯 기세가 등등해 보이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퍼주는 어른들은 대부분 선캡을 쓰고 허리에 히프색을 메고 있었다. 쨍쨍한 해를 피해 밀려드는 인파에도 당황하지 않고 거스름돈을 건네기 위해서이리라. 아빠는 젤라토 카트를 볼 때마다 “저기로 갈까?” 물었고, 나는 아빠의 물음에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저기로 갈까? 주연이 좋아하는 노란 풍선이 매달려 있네.”
“(도리도리)”
“저긴 어때? 아이스크림을 3층으로 쌓아주네!”
“(절레절레)”
“제일 멋있게 쌓아주는 아이스크림 차를 찾아갈까?”
“아니야, 쌓아주는 아이스크림 말고 빙빙 돌려주는 아이스크림.”
단어가 부족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딸에게 아빠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아이스크림 카트나 슈퍼마켓에 들러 대충 아무 아이스크림이나 쥐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빠는 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연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스무고개처럼 이것저것 물었다. 빙빙 돌아가는 아이스크림을 슈퍼에서 찾을 수 있는지, 매점에서 찾을 수 있는지, 젤라토랑은 다른 것인지 몇 번 질문하다가 알겠다는 듯 검지와 엄지를 퉁겨 ‘딱’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소프트아이스크림?” 아빠는 내 손을 잡고 내가 원하는 빙빙 돌아가는 아이스크림이 있는 데로 데리고 갔다. 그것은 아이스크림 통에서 힘을 주어 퍼 올리는 젤라토가 아니라, 한 손으로는 기계 레버를 내려 아이스크림을 뽑아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콘을 쥐고 빙빙 돌리면서 똥 모양을 만드는 아이스크림이었다. ‘딱’ 하고 말했는데 ‘척’ 하고 찾아주는 아빠는 어린 내 눈에 뭐든 다 아는 박사 같았다.
“무슨 맛 줄까? 바닐라, 초코, 혼합이 있어요.”
“아빠, 혼합이 뭐야?”
“응, 바닐라랑 초코를 합쳤다는 뜻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 하나를 고르는 데 취약한 나는 바닐라와 초코가 합쳐진 ‘혼합맛’을 선택했다. 빙빙 돌리는 아이스크림을 찾은 것, 두 개 맛을 두루 먹을 수 있는 것, 먹고 싶다는 욕구를 해결한 것,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소프트아이스크림에 대한 애정은 크게 부풀었다. 지금도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보면 마음이 둥글둥글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그런 연유이리라. 그 뒤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만날 때면 나는 항상 ‘혼합맛’을 택했다. 그리고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그날로부터 다섯 해가 지날 때까지 ‘혼합맛’이 ‘초코와 바닐라’를 뜻하는 고유명사인 줄 알았음을. 일기장에 “혼합맛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셀 수도 없다.
엄마랑 시장에 갈 때마다 주전부리를 샀다. 보통 떡이거나 빵이거나 뻥튀기거나 생과자였고, 자주 왕소라형 과자와 고구마형 과자를 골랐다. 왕소라와 고구마형 과자는 어째서인지 꼭 세트로 사게 되었는데, 나는 고구마형 과자를 좀더 좋아했다. 왕소라형 과자는 입천장이 까져 껍질이 벗겨졌기 때문이다. 고구마형 과자는 한 번에 많이 먹으면 목이 꽉 막히긴 했지만, 과자 덩어리를 ‘꿀꺽’ 삼키게 해줄 흰 우유만 있다면 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하루는 평소와 같이 고구마형 과자를 먹다가 문득 그 이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왕소라형 과자는 왕소라 모양인데 고구마형 과자는 왜 고구마 모양이 아니야?” “음… 그러게?” 흔히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고구마는 가운데가 둥글넓적하고 끝으로 갈수록 오므라드는 형태에 자색이 아닌가. 하다못해 고구마 속살처럼 노란빛이라면 이해가 되었을 텐데 나이테처럼 둥글게 그려지는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선생님한테 물어봐도 적절한 대답을 들을 수 없어 답답해진 어느 날, 나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느 때처럼 엄마랑 고구마형 과자, 왕소라형 과자를 사서 들어온 그날, 포장지를 쏘아보다 문득 전화번호 하나에 눈길이 미쳤다. 청우식품 고객센터였다. 우리 모녀는 항상 청우식품의 고구마형 과자를 골랐는데, 그건 엄마의 축적된 경험의 결과였다. ‘먹어보니 청우식품 게 가장 맛있더라.’ 하는. 투명한 봉투에 속이 다 보이게끔 포장된 봉투를 몇 분쯤 바라보던 나는 용기를 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무엇입니까, 고객님?”
“제가 지금 고구마형 과자를 먹고 있는데요. 고구마형 과자는 왜 고구마형 과자예요?”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왕소라형 과자는 왕소라 모양이라 왕소라형인데, 고구마형 과자는 전혀 고구마 같지 않아서요.”
지금처럼 콜센터에 질 나쁜 전화가 오가던 시절이 아니어서일까, 너그러운 목소릴 가진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대꾸해 주셨다. ‘조금만 알아보고 다시 전화해 주겠다.’고. 무척 평온하고 따듯한 목소리에 우리 집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불러주며 전화를 기다린 기억이 난다. 머지않아 울린 전화벨 소리, 득달같이 달려가 받으니 아주머니가 설명해 주신다.
“옛날에는 간식거리가 많지 않아서 지금처럼 과자를 많이 사 먹지 않았대요. 아마, 전화 주신 고객님의 할머니께 물어보면 아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옛날에는 과자 대신 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렸다고 해요. 쨍쨍 내리쬐는 햇빛에 말리면 고구마에 이 과자처럼 나이테 문양이 생기거든요. 그 모양을 본떠 만들어서 이 과자 이름이 ‘고구마형 과자’인 거예요. 궁금증이 해소되었나요?”
목소리에 묻어 있던 옅은 웃음과 온기 어린 마음을 아직 기억한다. 아주머니는 어린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모든 문장을 천천히 꼭꼭 씹어 이야기해 주었고, 나는 그 친절이 고마워 지금껏 청우식품 고구마형 과자를 고집한다. 여러 개를 입안에 넣고 우걱우걱 씹다가 흰 우유와 함께 꿀꺽 삼키면, 목구멍부터 따듯해지는 기분이 든다.
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