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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을 유영하며
어린 시절엔 셔틀버스를 타고 커다란 수영장에 다녔다. 일주일에 세 번이었나, 다섯 번이었나, 아무도 안 입을 거 같은 자주색 수영복을 입고 푸른 물속에서 물장구를 치는 날들이었다. ‘음파음파’ 숨쉬기를 배웠고, 발차기를 배웠고, ‘킥판’이란 걸 잡았고, 팔 돌리기를 배웠고, 팔 꺾기를 배웠고, 자유형을 했고, 배영을 배웠고, 평영을 배웠다. 나는 개구리헤엄이라 불리던 평영을 가장 좋아했다. 수영은 별로 어렵지 않았고 물속에서 숨 쉬는 건 뭍에서 숨 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수영 생활은 접영 발차기를 배우기 시작하고부터 달라졌다. 나는 전에 없이 전투적인 어린이가 되었다.
나보다 접영 발차기를 잘하던 여자애가 있었다. 자유형도, 배영도, 평영도 비슷한 수준으로 잘해서 늘 1, 2번을 앞다투던 아이와 나였지만, 접영 발차기만큼은 그 애처럼 아름답게 할 수 없었다. 인어처럼 두 다리를 웨이브 치며 엉덩이를 볼록 내미는 접영 발차기는 왜 내가 하면 각기 춤처럼 삐거덕거리는지.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어 자주 얼굴이 뜨거워졌다. 물 위로 엉덩이만 아름답게 솟아올라야 했는데, 허리까지 쑥 나오거나 허벅지까지 올라와 영 보기 흉한 자세가 됐다. 발차기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팔 돌리기로 진도를 못 나갔고, 나보다 (조금) 잘하던 그 아이만 돌고래 같은 허리 웨이브와 함께 상체를 일으켜 나비처럼 날았다. 어린 마음에 나보다 잘하는 아이가 있다는 게 무척이나 속상했다. ‘접영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안 되는 거람, 쳇.’ 접영을 배우는 날이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수영 수업이 끝나면 자주 생각에 빠져 있던 탓에 정신 차려보면 친구들은 사라지고 샤워실에 휑뎅그렁 혼자 남아 있곤 했다. 부랴부랴 비누 거품으로 온몸을 닦고 작은 수영복을 꽉 짜서 나오면, 머리가 푹 젖은 채 수영장 로비에 모여 있는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자판기에서 ‘그것’을 뽑아 절반 이상 먹은 상태였고 나는 늘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자판기 앞에 섰다. 셔틀버스가 떠날 시각이 다가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버튼을 누르고 입천장이 데는 것도 모르게 훌훌 털어 먹던 그것. 그건 커피 자판기도, 음료 자판기도, 장난감 뽑기 기계도 아니었다. 이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달걀 자판기’였다. 날달걀도, 삶은 달걀도 아닌 무려 프라이가 나오는 기계. 반숙과 완숙 두 버튼만 있던 자판기 앞에 처음 선 날을 기억한다. 반숙이 무엇인지, 완숙은 또 무엇인지 알지 못한 나는 친구들을 곁눈질로 살펴보며 완숙을 선택했다. ‘조리 중’이라는 글자에 불이 들어왔던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둥글넓적한 종이컵이 툭 떨어졌다. 그 안에 이불처럼 담겨 있는 건 푹신한 달걀. 그것은 작은 인형 위에 덮어줄 수 있을 정도로 컸고, 종이 그릇 절반 이상을 채울 정도로 두툼했다. 종이 숟가락과 작은 소금이 함께 나와 취향껏 소금을 살살 뿌려 숟가락을 구부려 떠먹으면 되었는데, 수영하고 허기진 배 속을 채우기에 이 간편한 음식은 어찌나 완벽했는지. 접영 발차기를 더 잘하고 싶어 허리와 엉덩이를 구부리며 걷던 나는 수영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달걀 자판기 덕분에 셔틀버스에 오르기 전이면 늘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나보다 접영을 잘하는 친구는 어느덧 꿈틀거리는 발차기를 넘어 양팔을 나비처럼 펼치는 버터플라이 영법을 해 보이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그 애가 잘 해낼 때마다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수업이 끝나도 더는 아이들과 달걀을 뽑아 먹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수영장에 들어오길 기다려 같이 수영을 했고, 엄마에게 가끔 달걀을 뽑아달라고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엄마를 기다리고 있으면 슬그머니 가까이 오던 남자애가 있었다. 거리를 조금씩 좁혀오던 그 애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던 건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고, 그 애가 찾는 건 내가 아니라 언제나 엄마였기 때문이다.
“아줌마, 여기 몇 년 다녔어요?” 처음에는 우리 엄마에게 ‘아줌마’라 부르는 게 이상해 유심히 쳐다보았고, 그다음엔 엄마에게 유독 관심이 많은 게 이상해 엄마 곁을 오래 얼쩡거리게 됐다. 그 아이는 준비 운동을 하면 엄마 곁에 서서 열심히 체조를 했다. 엄마가 허리 운동을 하면 “어떻게 이렇게 유연할 수 있어요?” 물었고, 엄마가 한 바퀴 레인을 돌고 오면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다 큰 어른처럼 웃곤 했다. 그 애는 영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수영을 하는 아이였는데 항상 물장구를 너무 세게 쳐서 수영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남자애를 귀찮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답해 주었고, 가끔 엄마가 먼저 수영이 왜 재미있는지 묻기도 했다. 둘의 대화엔 귀를 뗄 수 없는 구석이 있어 나는 자꾸 귀를 쫑긋 세우게 됐다.
이렇다 할 에피소드 없이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었고, 나는 접영 발차기에서 진도를 더 나가지 못한 채 수영을 그만두었다. 어느덧 스물이 되어 그 남자애도, 수영장 냄새도 거의 잊었을 무렵 《염소의 맛》이라는 그래픽 노블을 만났다. 척추가 서서히 굽어 내장을 위축시키는 ‘척추옆굽음증’이란 특이한 병을 앓는 남자. 그의 치료법은 한 가지다. 수영장에서 배영만 하는 것. 《염소의 맛》에는 자연스럽게 물속을 거닐고 유연하게 턴하는 여자도 나온다. 수영 선수였던 그녀의 몸짓을 보면서 엄마를 생각한 건 왜였을까. 나는 책을 펼칠 때마다 익숙한 수영장 냄새를 맡곤 했다. 염소와 락스가 만드는 그 파란 냄새.
나는 엄마와 남자아이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헤엄치곤 했지만, 이제 와 말하건대 실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 옆에서 떠드는 남자애 목소리가 궁금했고, 그애 말에 열심히 대꾸하는 엄마의 말들이 궁금했다. 어느 날 수영하며 돌아오던 중에 “저 애는 아줌마 딸이에요?” 하고 묻는 남자애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적이 있다. 목소리는 물을 타고 웅웅거리며 들려왔는데, 그렇다는 엄마 대답 이후의 이야기는 내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날부터 접영을 잘하는 법보다 남자애와 엄마가 나눈 대화를 더욱 궁금해했다. 나는 그 아이와는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고, ‘나는 너에게 관심 없어.’라는 얼굴로 곧잘 등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엄마랑 남자애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물안경 안에서 곁눈질하는 것도, 물속에서 목소릴 듣기 위해 애쓴 것도.
얼마 전부터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있으니 모든 영법은 전처럼 쉬울 거라 생각했고 이젠 버터플라이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러나 생활 습관은 무서웠다. 숨찰 정도의 운동을 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였기에 기다란 레인을 돌고 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다. 어른이 된 나는,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누구도 안 입을 것 같은 빨간색 수영복을 입었다. 선생님은 자주 나를 기준 삼아 “빨간 수영복 회원님”이라 불렀는데, 어떤 동작에선 “빨간 수영복 회원님 잘하십니다.” 하셨고, 어떤 동작에선 “빨간 수영복 회원님, 잠깐만!” 하고 나를 멈춰 세웠다. 어느덧 나는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꺼내면 “어!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는 빨간 수영복 회원님이 되어 있었다.
빨간 수영복 회원님은 이상하게 자유형이 어려웠다. 옛날엔 두 바퀴 정도는 가뿐하게 헤엄쳐 돌아온 것 같은데, 음파음파 숨 쉬는 것마저도 왜 이리 자연스럽지 못한지. 배영을 할 땐 목이 문제가 됐다. 빳빳하고 꼿꼿한 자세로 컴퓨터 작업을 하니까 목과 어깨가 굳어 목에서 힘을 빼지 못했다. 힘 빼는 방법을 모른다는 게 나를 자주 곤란하게 했다. “빨간 수영복 회원님, 목에 힘 빼세요. 집에 가면 아파요.” 선생님 목소리에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바보 같이 묻기 일쑤였다. 집에 가면 선생님 말씀처럼 목이 너무 아팠다. 눕는 건 자신 있던 내가 배영을 이렇게 힘들어했던가? 오로지 평영만이 나를 물 안에서 자유롭게 했다. 세모 모양으로 뻗는 다리에 물줄기가 부드럽게 휘감기면 조금 뿌듯해졌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빨간 수영복 회원님, 우리 평영 배운 적 없습니다. 자유형 하세요.” 가끔은 선생님 몰래 접영 발차기도 해봤다. 어쩐지 잘될 것만 같아 두 다리를 물결쳐 보았지만… 안 봐도 뻔했다. 엉덩이가 아름답게 솟아오른다는 느낌은 아마 느낌뿐이었겠지.
어느 날엔가 수업 전, 깊숙이 잠영하며 마음 속으로 초를 세다가 아주 작은 반짝임을 본 일이 있다. 그것은 <인어 공주>에서나 보던 바닷속 산호초를 떠올리게 했다. 푸른 타일이 만들어낸 수영장의 물색은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에메랄드빛 바다처럼 아름다웠고, 딱딱한 타일 바닥은 바닷가를 노니는 물고기 행렬처럼 보였다. 나에게 마법과 같은, 그러나 뻔하고 진부한 이 장면을 선물한 건 누군가 떨어뜨린 액세서리 파편이었다. 혹여 밟으면 아플 것 같아 얼른 건져 수영장 직원에게 건넨 그날 밤, 나는 마법과 같은, 그러나 뻔하고 진부한 꿈을 꾸었다.
짙고 푸른 물속, 그 안엔 푸른 산호초가 가득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홍색, 붉은색, 노란색 해양 생물이 춤을 추고 있었다. 빨간 수영복을 입은 나는 수경도, 수모도 없이 자유로이 그 안을 헤맸다. 숨 쉴 필요가 없어 자유형이 쉬웠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배영도 가뿐했다. 평영은 개구리보다 잘하는 것 같았고, 언제나 제대로 할 수 없던 접영 발차기마저 유연하게 성공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아름다운 물방울. 꿈속에서도 꿈인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깨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선가 그때 그 남자애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듯했지만 그건 그냥 느낌뿐이었겠지.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애 목소리가 들릴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장비 없이 빨간 수영복만으로 바닷속을 헤매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물거품이 나를 에워싸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걸 알면서도,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