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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
여자애는 열일곱이 되면서부터 나이 세기를 멈췄다. 누군가 “몇 살이니?” 물어보면 “열일곱이요.” 대신 “고등학교 1학년이요.”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이를 잊었다. 열일곱 살이 되는 해, 여자애 주변의 많은 것이 변했다. 특히 집이 그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자애가 기억하는 이사는 단 한 번. 그 한 번이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살아오던 동네를 떠났…다기엔 바로 이웃한 지역이었지만, 그래도 여자애가 해본 단 한 번의 큼직한 행사였다. 낯선 지역으로의 첫 등교. 집과 제법 먼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더욱 긴장했을 것이다. 여자애가 다닌 고등학교 교복은 주변 학교들에 비해 예뻤다. 짙은 쥐색에 단정한 디자인, 옷깃에 와인색으로 잔잔히 놓인 체크무늬가 여자애는 마음에 들었다. 잘 다린 교복을 처음 입고 등교하던 날, 반을 찾아 교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빨간 머리띠를 한 소녀였다.
여자애는 살면서 그렇게 새하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흰 피부라면 자신 있는 여자애가 고개를 돌릴 정도로 눈이 부신 피부였다. 까맣고 긴 머리카락과 빨간 가방, 나이키 로고가 유난히 귀엽던 동그란 코르테즈. 새카만 눈동자, 작고 오똑한 코, 빨간 입술, 새하얀 피부, 너무 마르지도, 통통하지도 않은 몸과 아담한 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소녀를 위해 맞춰진 것처럼 잘 다듬어져 있었다. 교실에 있는 많은 학생이 소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여자애와 소녀는 금세 단짝이 되었다. 처음 어떤 대화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둘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실도, 체육실도, 매점도, 급식실도, 화장실도 함께 가는 사이가 되어 아주 많은 걸 공유했다. 대부분 단둘이 모든 걸 해냈지만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섞였다. 여럿이 어울리는 시간도 많았지만 둘은 최선을 다해 서로를 ‘단짝’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어쩌다 다투는 날이면 다른 친구들과 매점을 가는 대신 엎드려 자기를 택했다. 그러다 둘 다 점심을 굶고 엎드려 잔 날엔 어느 한쪽이 자는 친구 옆에 초코우유와 쪽지를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화해하곤 했다.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함께 생활하면서도 둘은 헤어지면 문자 메시지로 시시콜콜 떠들며 시간을 공유했다. 주말이면 사복을 빼입고 만났고, 일주일에 두어 번씩 A4 용지 양면 빼곡하게 깜지 같은 편지를 써서 주고받기도 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았을까.
두 아이는 3년 내리 같은 반에서 지내며 매일매일 당연한 듯 일상을 공유하며 지냈다. 소녀의 하루는 여자애 것 같았고, 여자애의 하루는 소녀의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평범하게 급식을 먹고 매점에서 세 개 천 원 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머지 하나를 누구에게 줄까 고민하던 점심시간. 계단을 밟아 올라가던 소녀가 말했다. “나, 호주에 갈 거야.” 매점에 가자는 정도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기에 여자애는 되물어야 했다. “뭐라고?” 소녀는 일사천리로 유학 절차를 밟았다.
소녀는 떠날 준비를 마쳤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얼마쯤 시간이 흘렀고, 두 사람은 대학생이 되었다. 새빨간 머리띠 대신 새카만 하이힐을 신은 소녀는 여전히 새하얀 피부와 새카만 눈동자, 너무 마르지도, 통통하지도 않은 몸과 아담한 키로 캠퍼스를 누볐다. 소녀를 위해 모든 게 맞춰진 것처럼 잘 다듬어진 대학 생활이었고, 캠퍼스에 있는 사람들이 소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걸 여자아이는 여러 차례 보았다. 둘은 대학생이 되고도 자주 만났다. 여자애는 소녀의 학교에 자주 놀러 갔다. 소녀의 친구들과 싸이월드 일촌을 맺기도 했다. 여자애는 소녀를 좋아하는 남자애와 소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소녀의 동기들과 만났다. 자주 만나고 매일 소식을 주고받았지만 소녀와 여자애의 세계는 조금씩 변해갔다. 소녀는 여자애가 마실 줄 모르는 따듯한 사케를 마셨고, 여자애는 잘 모르는 동네에 단골 카페가 생겼으며, 여자애가 모르는 남자애 이야기를 즐겨 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요란스럽고 시끄러운 축제에서 다른 학과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자꾸만 더 많은 사람을 여자애에게 소개했다. 여자애도 소녀가 모르는 일들을 자주 하게 되었다. 소녀가 모르는 책을 읽었고, 소녀 모르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소녀에게 알리지 않고 어디론가 실습을 나가기도 했고, 코코아 대신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주말엔 공연을 보거나 혼자 서점에 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각자 세계를 만들어 가면서도 두 사람은 편지 쓰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만나더라도 짧거나 긴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편지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만났을 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우체통에 넣어 사나흘 내지 엿새, 이레씩 걸려 편지를 받아본다는 것이었다. 둘은 만났을 때 “편지 썼어?”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마치 친구 자아와 편지 쓰는 자아가 따로 있는 것처럼, 편지를 쓰고 부치는 일에 관해서는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여자애는 소녀가 호주로 떠나기 전에 이야기를 충분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6개월쯤 편지 보내기가 이어졌을까, 점점 늦어지는 유학 소식에, 여자애는 어쩌면 소녀가 떠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 소녀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보내왔다. 2주 뒤 호주로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소녀의 출국 날 여자애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거기서 소녀의 가족, 친구들과 모여 소녀를 배웅했다.
여자애는 그날 상실감이란 걸 배웠다. 소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소녀는 승강장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여자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대학 친구들과만 긴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소녀가 여자아이에게 건넨 인사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짧게 한 포옹이 전부였다. 소녀가 여자애를 마치 투명 인간처럼 대한 건 왜였을까. 여자애는 소녀에게 그날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없다.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여자애는 그날 일을 빨리 잊고 싶어 했다.
소녀가 호주에 간 뒤로 여자애와 멀어졌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둘은 온라인 세계에서 연결되어 있었고 계속해서 안부를 주고받았다. 남자친구와 다툰 이야기부터 새로 사귄 친구까지 시시콜콜 나눴다. 여자애는 한국에 남아 있는 소녀의 친구들과 소녀 없이 만나기도 했다. 여전히 둘 사이는 끈끈했지만 여자애는 끝내 물을 수 없었다. 왜 출국하는 날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냐고.
소녀가 떠나고 얼마쯤 지났을까, 여자애는 생경한 풍경을 목격한다. 늘 거닐던 거리의 풍경이 묘하게 바뀐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도, 카페도, 마트도, 미용실도, 나무들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 자꾸만 허전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눈이란 매일 보는 것에 둔감해지기 일쑤여서 무언가 변했다고 생각할 땐 분명히 균열이 일어났을 터인데 며칠을 지나며 살펴봐도 여자애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거닐며 길목을 살폈지만 계절의 변화 말고는 무엇이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아하는 시인의 낭독회에 갔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건 ‘우체통’에 관한 것이었다.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사라지면서 길목에 놓인 우체통이 철거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누구나 끄덕일 만한 그 이야기에 번뜩 소름이 돋은 건, 늘 오가던 길목이 낯설어진 이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시인은 뒤이어 말했다. 우체통이 사라지는 기준은 3개월 동안 아무 편지도 들어오지 않을 때라고. 여자애는 손가락을 헤아려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소녀에게 편지를 부친 게 언제였는지. 3개월. 그러니까 딱 3개월 전이었다.
우체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쓰레기봉투가 생겼다. 버스 정류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곳에 일회용 컵이나 담배꽁초, 과자 봉지나 전단지 같은 것을 버린다. 커다란 봉투가 가득 차면 쑤셔 박거나 그 주변에 대충 던져둔다. 여자애가 1-2주 간격으로 찾아가 곱게 봉한 편지 봉투를 넣던 우체통이 있던 그 자리다. 혹여나 중간에 떨어질까 물풀로 편지 봉투 입구를 봉하고 좋아하는 스티커를 고민해서 붙이던 시간이 쓰레기로 뒤덮이는 것 같아 어지간히도 슬펐다. 여자애는 그 길목으로 다니지 않게 되었다. 3개월 동안 아무 편지도 들어오지 않아 철거된 우체통. 소녀가 떠난 지 3개월 되던 때 사라져 버린 우체통. 여자애는 자꾸만 밀려드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애쓴다.
시간이 지나 소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우체통이 있던 자리엔 여전히 만인의 쓰레기봉투가 있다. 여자애는 지금도 간간이 서랍 속 편지를 만지작거린다. 아직 부치지 못한 마지막 편지. 공항에서 소녀에게서 느낀 거리감과 단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를 묻는 문장이 조심스러운 필체로 적혀 있는 편지다. 여자애는 그 편지를 완성하기 위해 여러 번 문장을 골랐고, 단어를 고쳤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찢어버린 편지지도 여럿이었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하는 친구야,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그래도 우리가 같은 세계에 머물던 시절을 정말 좋아해.” 여자애와 소녀는 그날 일을 뒤안길에 묻은 채 여전히 사이좋게 지낸다. 이쯤에서 여자애는 결심해 보기로 한다. 부치지 못한 14년 전 편지를 이번엔 꼭 부쳐보자고.
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