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될 것만 같은 그 일의 오해와 진실

큐레이터 김현진

세련될 것만 같은
그 일의 오해와 진실

큐레이터 김현진

한때 문화재를 공부한 적이 있다. 당시 졸업 후에 무엇을 할 거냐는 물음에 “나는 큐레이터 할 거야. 멋있잖아.”라고 대답하곤 했다. 사실 큐레이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단지 세련된 일이 아닐까 추측하며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공부를 끝까지 마치지 않았고, 결국 큐레이터는 상상 속의 일로 남게 되었다. 진짜는 어떨까.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여전히 아무렇게나 오해할 수 있을까.

INTERVIEW
큐레이터 김현진

조금 더 깊은
큐레이터의 일

먼저 큐레이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
큐레이터라는 말의 어원에는 ‘Care(돌본다)’라는 의미가 있어요. 작품을 돌보는 사람이죠. 처음 뮤지엄이 생겼을 당시만 해도 유물을 수집, 보관, 관리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기에 큐레이터는 관리자의 역할이 컸다고 봐요. 그런 큐레이터가 미술계에 부상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예요. 이전까지 작가의 작업을 평가하고 미술계의 트렌드를 제시하는 게 평론가의 일이었다면, 미술이 글로벌한 지평으로 확장된 후에는 현장의 구도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거든요. 큐레이터 업무의 핵심은 작가와 함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관으로 통칭되는 미술관 현장에서 양쪽의 입장을 조율하는 것도 큐레이터의 몫이죠. 그 외에도 세계 곳곳의 작업을 리서치하는 것 역시 큐레이터의 역할이 되겠네요.

큐레이터라고 하면 한적한 미술관을 거닐며 관람객에게 작품을 설명해주는 고상한 이미지가 떠올라요.

대중매체가 그려내는 이미지에 비해 훨씬 더 현장 중심적이고 역동적인 작업을 해요. 물론 전시 오프닝 파티를 하는 순간만큼은 손님을 맞기 위해 세련된 복장을 갖춰 입죠.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그 이전까지는 전쟁터나 다름없어요. 큐레이터는 고상한 작업을 한다는, 일종의 부르주아 문화로부터 오는 편견이 있는데 실제 미술 현장의 많은 작가나 큐레이터의 인식과는 괴리가 있어요.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연기하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사실 그런 겉치레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문화적으로 미술 본원의 가치를 드러낼까 방법을 고민하죠.

현장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하나의 영화를 만들 때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가 필요하듯 작가의 작업을 실현하기 위해 전시 공간을 디렉팅해요. 작가와 협의해 작품을 배치하고 더 나은 구조를 만드는 거예요. 이때 같은 작품을 놓고도 큐레이터마다 맥락과 내러티브가 달라 전시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발현되기도 해요. 가령 개인전을 기획한다면 작가가 가진 다양한 모습 중 어디에 더 집중해 장점을 드러낼 수 있을지, 어떻게 정수를 뽑아낼 수 있을지 먼저 판단하는 거예요. 

공간을 기획할 때 어디에 중점을 두나요?
아르코미술관에서 니나 카넬Nina Canell의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한국의 문화와 미술적 맥락을 고려해서 초대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하나의 전시를 기획하더라도 전체 공간에 비전을 가지고 의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독립 큐레이터로 작업할 때는 프로젝트별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지만 미술관 같은 기관 큐레이팅의 경우 기획 간의 연결성이 요구되죠.

독립 큐레이터와 기관 큐레이터가 크게 다른가요?
기관은 안정적인 예산과 조직력 같은 하드웨어가 장점인데 반해 독립 큐레이터는 전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스스로 조달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기관에서 일하는 게 더 나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기관의 대중성이 반드시 전문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고루하거나 보수적인 면 때문에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죠. 반면 독립 큐레이터는 굉장히 규모도 작고 열악하며 불안정하지만 자신의 관점을 보장받으며 활동할 수 있어요. 창의적인 활동이 가능하죠.

독립 큐레이터로 오래 활동했다고 들었어요.
저 같은 경우 처음부터 독립 큐레이터의 길을 선택했어요. 당시에는 제가 하고 싶었던 작업과 기관 사이에 좁히기 힘든 틈이 있었거든요. 대안공간 루프, 쌈지 스페이스, 아트선재센터와 네덜란드 반아베미술관Van AbbeMu￾seum 등에서 객원 큐레이터로 일을 했죠. 

관람객은 주로 어떤 전시를 선호하던가요?
저는 우리나라 일반 관람객의 문화 수준이 결코 낮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것들을 역동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적 소양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도 굉장히 높은 편이죠. 단순히 돈으로 그럴싸하게 만든 전시가 아니라 내용적으로 성숙하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일수록 더 오래 집중하면서 관람하는 문화가 있어요. 제가 일민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 역시 지식생산형의 시각 예술 전시였어요. 내용이 급진적이라는 일부 평가가 있었지만 실제 관람객의 숫자나 반응은 성공적이었거든요. 아이러니한 일이죠.

대중성이 전시의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은 아닌 거네요.
보통 문화 정책을 세우고 판단하는 건 관련 공무원이나 기관장이에요. 저는 그들이 ‘무엇이 더 대중적인가’를 판단하는 근거가 굉장히 협소하다고 생각해요. 현장의 흐름을 전문적인 시각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보거든요. 관람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고, 그들이 가진 지적 호기심과 시각적 새로움에 대한 욕구, 시각과 사고의 연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거죠. 이때 작가와 큐레이터 같은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거예요.

현장에서 본 미술계, 특히 작품의 흐름이 궁금해요.
사실 지역과 국가별로 다른 부분이 있어서 통일된 하나의 흐름을 말하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크게 보자면 2000년대 이후에는 정치와 미학의 갈등, 혹은 양자의 병합을 다룬 작품이 눈에 띄어요. 일반 사회적인 문제, 정치적·윤리적 갈등, 타자에 대한 이슈, 이민사회의 문제 등이 화두가 되는 것처럼 미술 작품 안에서도 현실과 관계를 맺는 주제에 주목하는 것 같아요.

형식적으로는 어떤가요?
흔히 알고 있는 회화와 조각의 영역뿐 아니라 진화한 형식 언어, 그러니까 퍼포먼스의 영역으로도 나타나요. 오늘날 미술의 수용력이 커짐에 따라 다른 장르의 예술을 흡수하는 성향을 보이는 거죠. 현대무용 같은 공연계의 퍼포먼스나 영화 장르 역시 미술적 언어 안에서 흥미롭다면 미술작품이 될 수 있겠죠. 

미술적 언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주세요.
어떤 장르든 나름의 언어가 있고 그 형식 안에서 비평적 판단을 해요. 미술 역시 오래된 역사 속에서 성장해왔기에 그 전체를 보지 않고는 파악하기 힘들어요. 제가 미술 언어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그동안의 역사와 만나는 역사성, 고도의 통찰력, 어떤 통렬함 같은 거예요. 

대화가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는데요(웃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큐레이터와 비평가의 역할이 모호해지네요.
보통 큐레이터를 글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기도 해요. 이 때 글이란 간단한 전시 소개 외에 전문성이 요구되는 글을 말하죠. 예전에 평론가가 했던 역할을 나눠 갖는 건 사실이에요. 그건 처음에 이야기했던 큐레이터의 역할 변화와 연결되는데요. 현대예술의 급격한 변화로 평론가와 작가 사이에 미묘한 괴리가 생기면서, 상대적으로 작업의 진화를 더 가까이에서 목격한 큐레이터가 직접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어떤 작업은 단순히 결과물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수한 문화적 배경 안에서 읽히기도 하거든요. 활자에 기대는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예산이라든지 이런저런 제약들로 전시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에요. 작가와 큐레이팅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기에 실전에 대비한 연습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개의 전시는 언어적 구성과 닮은 점이 많아요. 전시 공간 자체와 그 안에 들어가는 콘텐츠, 내러티브가 다음 전시로 어떻게 이웃해서 만나는지를 엮어내는 과정 속에 있거든요.

공간을 구성하는 공식이 있나요?
큐레이터마다 자기만의 방식이 있을 거예요. 저 같은 경우 다른 전시를 볼 때 그 작업의 배경과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단일 전시로는 성공적일지 몰라도 그 전후의 전시와 함께 엮었을 때 무리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고전문학과 통속 작품을 나란히 놓고 읽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단일 전시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우선적으로 관람객의 움직임을 생각해요. 단순한 동선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시가 만들어질까 고민하는 거예요. 기관에 속한 큐레이터가 조직 운용에 강점을 갖는다면 저는 큐레이팅이 예술적인 영역 안에서 어떻게 더 정밀하고 특수하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지는 편이에요.

‘전시에서 공간은 마치 시를 써내려가는 종이와 같다. 언어의 개념과 의미에 구속되지 않고 리듬과 단어의 마찰음, 여백, 문법 전복 혹은 양식화되거나 정형화된 통사 운용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방법을 통해 새로운 시가 쓰이고 이러한 속에서 시의 실체가 만들어지듯이, 나에게 전시 과정도 다분히 그러하다.’ 

– 김현진, <위태롭고 자유로운> 중에서

전시 공간에 대해서 쓴 글을 본 적이 있어요. 이 말을 도발적으로 해석한다면 작품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편집자의 역할보다는 창작자의 영역에 가까워 보여요.
아무래도 빈 전시관에 서있을 때 흥분되는 무엇이 있어요. 직접 작품과 작품 사이를 걸으며 몸으로 시간을 재고, 그 순간에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거든요. 그만큼 전시 기회가 쉽게 주어지는 경험이 아니라서 더 애착이 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과정들은 독단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고 작가와의 원만한 관계가 우선이에요. 인간 대 인간으로 일하는 것이기에 서로 존중하고 지지하며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죠.

같은 맥락에서 네덜란드 반아베미술관에서 기획한 <규정되지 않은 군중들Undeclared Crowd>이 흥미로웠어요. 기울어진 벽을 이용한 전시였지요?
당시 미술관이 새로운 디렉터를 맞이하면서 외부 기획자들의 수혈을 받겠다고 선언했어요. 관행적인 소장품 전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만들겠다는 의미였죠. 저는 기울어진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작품을 걸었어요. 멀리서 볼 때는 알 수 없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벽이 쏟아지는 듯한 경험을 주고 싶었어요. 작품을 안전하지 않은 방식으로 위치시키고, 불안정한 상태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거 같아요.

조금 더 나은
큐레이터를 위하여

전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요?
당시 서구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이성 위주의 모더니즘 영역을 반성하는 시도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여전히 미술관은 수직과 수평을 엄격하게 지키며 이성적인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죠. 통제와 규율, 고답적인 하얀 공간. 자신들이 가진 한계를 외부인의 처지에서 경험하게 하고 싶었어요. 제가 시도한 건 작은 제스처에 불과할 테지만 전시를 통해 흥미롭게 방해하는 것이 일종의 영감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에 누가 전시를 기획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자주 회자되었다고 들었어요.

관람객의 반응이 궁금해요. 어렵다고 느끼지는 않았나요?
대체적으로 흥미로워했어요. 사실 이런저런 시도를 할 때면 제가 관람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작가든 큐레이터든 관람객이 없다면 전시를 만들 이유가 없겠죠. 물론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타협을 하지는 않아요. 어떻게 하면 사람과 미술이 서로를 열고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에요. 일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환기하면서 닫힌 영역을 만날 수 있는 경험 말이에요.

환기의 경험이요.
그 환기가 단순히 여가생활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조금 더 통렬한 경험이기를 바라요. 단순히 쉬기 위해 미술관에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각적인 경험은 다른 의미의 지적 경험이거든요. 

사실 영화관이나 서점보다는 미술관에 갈 때 조금 더 진지한 마음을 가지게 돼요. 어떤 의미로는 부담스러운 느낌. 그런 점에서 최근 몇몇 상업적으로 성공한 전시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사진전이 눈에 띄어요.
제가 지향하는 영역은 아니기에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모든 미술관은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성공한 사진전들 역시 일부 ‘힙스터 컬처’만을 발생시킨다는 우려가 분명 존재하죠. 하지만 전시 자체도 수려하고 젊은 층에게 접근성이 높아 미술관을 즐기는 문화를 창출하는 데 공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분명히 생각해볼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고 시집이 필요 없는 게 아니듯, 그런 류의 전시가 미술관의 대표적인 예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하는 의문이 있어요.

미술관의 올바른 예시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어느 순간부터 미술관이 백화점처럼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등 부대 서비스가 전시보다 더 주목받는 현상이 두드러지죠. 언젠가 남미의 미술관을 둘러본 적이 있는데 작품과 전시의 수준이 상당했어요. 그 흔한 카페도 하나 없이 오로지 미술을 사랑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느껴지더라고요. 저는 그런 고전적인 미술관 모델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절에 방문하는 목적이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아니잖아요(웃음). 어느 순간 잊힌 미술관 본연의 역할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요. 지금의 미술관은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어요.

아름다운 공간은 곧 아름다운 전시를 통해서만 가능할까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향점이 정확했으면 좋겠어요. 미술 지평의 변화 안에서 역사를 알지 못하면 그저 눈으로만 그런 ‘척’ 하는 힙스터 코드만을 생산할 뿐이에요. 계열과 계통의 깊이를 무시한 채 단순하고 가벼운 자극만을 추구하는 건 원치 않아요. 저는 미술이 많은 것을 수용하는 확장력만큼이나 그 안의 엄밀성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넓게 확장하는 것과 깊이 들어가는 것, 두 가지가 공존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모든 큐레이터를 대변하는 건 아니고 저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최근 1~2년 동안의 전시를 살펴보면 산뜻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디자인적 요소에 치우친 경우가 많았어요. 취향의 반영일 수 있겠다고 양보해 봐도 아무런 영감도 받지 못했죠. 어떤 부분에서 저는 굉장히 편협한 사람일 수도 있고요(웃음). 물론 디자이너가 책을 만들고 전시를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마치 전시가 최종 성취인 양, 모든 장르가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상이 우스꽝스럽더라고요. 남발되는 전시는 공해와 같아요. 그건 기획자의 탓이 크다고 생각해요. 기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전시를 서비스 콘텐츠처럼 남발하고, 소재가 고갈되면 미술적 심도를 키우기보다는 관점 없이 이것저것 다른 장르를 융합해 마치 트렌디한 것처럼 제공하는 것. 그리고 성공을 하면 다시 재탕 삼탕 활용하는 것들이 개인적으로는 재미없더라고요.

관점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인가요?
어떤 영역이든, 설령 그것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깊이가 있다면 영감을 준다고 생각해요. 미술관에서 만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타당한 이유와 당위성을 가져야겠죠. 미술관을 운영하고 기획하는 사람에게 비전과 철학은 필수적이에요.

철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어가 볼게요. 큐레이터 작업을 하며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사건이나 경험이 있나요?
저의 성장의 시기에는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눈 작가 동료들과 선배 큐레이터들이 있었어요. 운이 좋게도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나 찰스 에셔Charles Esche 같은 세계적인 큐레이터와 일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들은 조직과 미술관 모델을 진화시키는 훌륭한 디렉터이자, 혁신적인 비전을 제시한 큐레이터였어요. 이론과 현장의 리더십을 동시에 갖추는 법을 배울 수 있었죠.

좋은 큐레이터의 조건이란 크게 기술과 리더십 두 가지로 볼 수 있는 거네요.
사실 그 두 가지를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는 없어요. 결국 어떤 기술적인 작업이든 가장 먼저 관계하는 것은 작가, 즉 사람일 테니까요. 현장의 모델을 바꾼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요소가 필요해요. 단순히 정책을 내놓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대화와 소통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죠.

잘은 모르지만 작가와 큐레이터의 관계가 그렇게 편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요.
깊은 우정과 신뢰가 있으면서 동시에 갈등도 하는 그런 관계예요. 사실 좀 복잡한 문제이긴 한데 저 같은 경우는 작가와 개인적으로 가깝게 교류하지만 어느 순간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하려 해요. 기본적으로 작가를 존중하며 전시를 기획하지만 제가 확신 있을 때는 논쟁이 있더라도 원하는 방향을 이끌어내려 하죠. 바로 그 부분에서 갈등이 생기는데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몰라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훌륭한 작업을 두고 스스로 염세적이 되어 가능성을 저해할 때 작가가 미워지곤 해요(웃음).

원석을 발굴해 닦아주는 역할이네요. 상대적으로 큐레이터는 작가나 공간에 비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큐레이터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서 서운하지는 않나요?
꼭 다수에게 이름을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크게 서운하지는 않아요(웃음). 요즘에는 일부나마 전시관 앞에 큐레이터를 명시하기도 하고, 그룹 전시의 경우 큐레이터가 저자화 되는 경우가 강해서 오히려 작가들이 불만을 가질 때도 있어요. 나름 공평한 기회가 있는 거죠. 그보다는 오히려 함께 전시를 꾸미는 작가들이 동등한 동료의 입장으로 큐레이터의 작업을 인식하지 못할 때 더 서운해요. 작가의 미술적 지향과 큐레이터의 리서치를 공유하며 함께 비전을 이야기했으면 하거든요. 제가 큐레이터로서 갖는 존재감이나 명성과는 별개로 가장 존중하는 작가와 관심의 지형도가 변하거나 갈라지는 순간이 생길 때 고민을 하게 되죠.

이제까지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큐레이팅을 생각하며 전시를 관람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잘 보는 법’에 대해 조언해줄 수 있나요?
작품 하나하나의 의미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의 연결고리를 함께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 사이 관계가 위배적일 때도 있고 유사하게 연동될 때도 있을 텐데, 모든 요소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보이지 않게 흘러가는 흐름과 두드러지는 요소들, 무게감, 전시를 통해 건드리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늠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네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머리가 아닌 살갗으로 작품을 감상할 때 더 많은 영감을 받는 편이라 어떤 게 옳은지 모르겠더라고요.
전시에 따라서 감상법이 다를 거예요. 미학적 체험 위주의 전시는 가급적 집중해서 오래 보는 것으로 충분할 거고요. 머리로 이해하는 전시는 작품 주위에 정보가 제공되니 그것을 참고하면 돼요. 둘 모두 시간을 오래 두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겠네요. 사실 작품을 읽는 근육과 문학적 소양의 차이로 저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어요. 그런 능력이 없다고 쉽게 좌절하기보다는 꾸준히 감상하는 것이 중요해요. 당장 눈앞의 작품에 대해 몰라도 나중에 찾아본 뒤 처음의 이미지와 연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확장하며 또 다른 영감을 불러올 테니까요.

마지막 질문은 다시 처음의 마음을 물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은 어떤가요?
처음에는 글 쓰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작가들과 현장에서 생생하게 교류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는 있어요. 하지만 무엇이든 직업이 되면 순간적인 즐거움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힘들죠. 그래서 요즘 관심사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어떻게 극대화시킬까 하는 부분이에요. 독립 큐레이터로 일하는 이상 행정 업무나 조직 관리같이 정신을 갉아먹는 일에서 자유롭잖아요(웃음). 그만큼 저의 동료와 작가 그리고 다른 아티스트와 함께 흥미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일하고 싶어요.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피폐함을 어떻게 하면 익사이팅한 지적 교류의 상태로 전환할지 고민하면서 말이에요.

‘작가나 큐레이터는 자기 전시와 작업에 대해 늘 너무 많이 떠들면서 스스로 전시의 은밀하고 풍요로운 영역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그 때문에 스스로 자기 전시를 해제하고 설명해야 하는 큐레이터에게 이것은 일종의 저주와도 같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물론 나 역시 입을 다물고 전시를 공간의 살아있는 시간 속에서 발각될 무언가로 남겨두고 싶기도 하다.’

– 김현진, <위태롭고 자유로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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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안가람 장소 제공 하트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