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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다정함
오세요. 제주도. 거대한 서점이 되어버린 섬으로.
처음 제주로 이사를 오자 친구들이 집에 자주 놀러 왔다. 다정한 그들은 올 때마다 “뭐 사다 줄 거 없어?”라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섬에도 웬만한 건 다 있다고 답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무언가 사 들고 왔다. 섬에도 다 있다. 섬에 없는 건 대부분 없어도 괜찮은 것들. 그러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또 묻길래, 불쑥 시집을 한 권 사 오라고 말했다. 그다음부터 한동안 친구들 질문에 늘 “시집”이라고 답하곤 했다.
어떤 이는 지나가는 말이라 여기고 흘려들었지만, 어떤 친구들은 시집을 골라 손에 들고 섬에 왔다. 시집은 작고 가벼운 데다가 가격도 적당해서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이 없다. 시에 관해선 나만의 취향이라고 할 것도 딱히 없어서, 어떤 시집을 받더라도 반갑고 좋았다. 그 친구들 중엔 난생처음 시집을 골라본 사람도 있었겠지. 꽤 어려운 숙제를 준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이제 와서 든다. 아무튼 사람이 한 명 올 때마다 우리 집 책장에 시집이 한 권씩 늘었다. 비록 한 권의 시집에서 읽은 건 기껏 시 한두 편 정도였지만, 실은 그것조차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사람이 올 때마다 시가 오는 게 좋았다.
이제 제주에 산 지 오래되었고, 집에 찾아오는 손님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때 친구들 중에 연락이 잘 안되는 이도 있다. 하지만 함께 온 시집은 여전히 책장에 꽂혀 있다. ‘시집’이라는 단어를 손끝으로 굴리다가 구체적인 의미가 궁금해졌다. 당연한 단어를 새삼스럽게 궁금해하는 건 내 오랜 버릇이다. ‘시가 사는 집’이라는 뜻일까? 사전을 연다. “시집詩集: 여러 편의 시를 모아서 엮은 책”이란다. ‘모을 집’을 쓰는구나. 아무래도 그렇겠네. 에이, 낭만 없다. 아무튼 제주 섬에 있는 우리 집엔 시가 산다. 이건 좀 낭만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제주에는 서점이 많지 않았다. 특히 시집을 살 수 있는 서점은 드물었고, 택배비에 도선료가 추가돼서 선뜻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는 것도 어려웠다. 아, 이렇게 자연과 가까워지는 대신 문화생활과는 멀어지게 되는 건가 싶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도 드물었으니까. 그때 사람들이 제주살이의 단점을 물으면 나는 “대형 서점과 극장 없음”이라고 답하곤 했다.
제주에 살기 전에는 서울 근교 경기도에 살았다. 혼자 광역 버스를 타고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극장에 가서 무슨 내용인지 도통 잘 모르겠는 영화를 보는 걸 좋아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자연스럽게 근처 대형 서점에 들러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슬렁슬렁 책을 구경하고, 그러다 마음에 드는 책을 우연히 만나고, 서점 구석 아무 데나 앉아서 좀 쉬다가 필기도구를 하나 사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나에겐 가장 큰 여가였고 작은 허영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주에 왔더니 그럴 수 있는 극장도 대형 서점도 없다.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는 날, 나는 어디로 가지? 바다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다와 서점은 줄 수 있는 게 확연히 다르다. 물론 그때도 작은 서점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거리가 멀어 한번 가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다. 큰 결심 없이 들를 수 있는 서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큰 서점으로. 지금 제주도엔 서점이 무척 많다. 정말 많다. 독립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도 하나 생겼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거의 상영하지 않지만,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제주를 한 바퀴 돌면 대체로 구할 수 있다. 작은 서점이 빼곡하게 모여, 제주도는 그 자체로 큰 서점이 되었다. 이제 제주에 대형 서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제주에 서점이 지금처럼 많아지기 전 일 년 남짓 서점에서 직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를 떠올리면 언제나 허리를 쭉 펴고 똑바로 고쳐 앉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책이 가득한 곳으로 출근하는 일은 정말이지 단 하루도 지겹지 않았다. 서점은 집에서 7-8분 정도 걸으면 닿는 곳에 있었고, 출근하는 발걸음이 매일 가벼웠다. 출근하면 우선 입구에 있는 매트를 팡팡 털고 빗자루로 바닥 청소를 한다. 해수욕장 근처 서점이라 사람들은 걸음마다 모래를 데려왔고, 그래서 자주 바닥을 쓸어야 했다. 밤사이 도착한 택배 박스를 뜯고 책을 서가에 꽂고 나면 손님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한다. 손님들이 서가를 둘러보는 동안 나는 카운터에 똑바로 앉아서 책을 읽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대던 여고 시절 이후 가장 다독한 시기다. 하루에 한두 권씩 완독했다. 내 인생의 작은 전성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처럼 끝도 없이 신간을 읽는 시절은 다시 없겠지.
손님의 절반 이상은 여행객이었고 대부분 여행 중 가볍게 읽기 좋은 얇은 에세이나 소설을 구매했다. 종종 나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최근에 어떤 책 재미있게 읽으셨어요?”라고 우선 손님의 취향을 묻고, 최선을 다해 책을 골라 건넸다. 손님이 내가 추천한 책을 사 들고 다시 나머지 여행을 하기 위해 떠날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일 년이 있었다. 계속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생 최저 시급을 받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 년이 최선이다. 언젠가 서점을 직접 운영해 보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내가 서점 직원이던 시절보다 수입이 적은 서점 주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만 숙연해지곤 한다.
그래서, 지금 제주에 서점은 몇 개일까? 작년 하반기 기준으로 제주에는 서점이 무려 107곳이 있다. 올해 새롭게 오픈 소식이 들린 서점이 몇 군데 더 있으니까 지금은 아마 더 늘어났을 거다. 서점 숫자를 구체적으로 헤아리게 된 건 작년에 나온 내 책 덕분이다. 작년 여름이 끝날 무렵 제주 마을에 대한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리고 출판사에서는 제주에 있는 서점에서 그 책을 구매할 경우, 제주 책방 지도가 그려진 손수건을 선물로 증정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출간과 관련된 유일한 마케팅이었다. 굿즈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손수건이라면 언제나 오케이다. 더군다나 마을 이야기를 하는 책과 무척 잘 어울리는 마케팅이라 마음에 쏙 들었다. 에필로그에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마을을 걷다 책방을 만나면, 꼭 들어간다. 그러면 책방의 서가엔 높은 확률로 제주와 관련된 책이 있다. 종종 그렇게 만난 책의 손을 잡고 마을을 걸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마을 책방이 꼭 마을의 삼춘 같다.” 책방 72곳이 담긴 제주 지도 손수건을 제작해 배포하자, 여기저기서 “우리 서점 빠졌다.”, “내가 좋아하는 책방이 없다.”는 제보가 쏟아졌다. 출판사에서는 곧바로 두 번째 버전 손수건을 제작하기로 했고, 공식적으로 제보를 받았다. 제보를 모두 취합했더니 글쎄 107곳이나 되는 거다. 107곳의 책방이 표시된 제주 지도를 보고 있자니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는 것 같다. 제주 중산간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자신의 자리에서 빛나는 책방과 책방 사이를 선으로 이으면 제주 섬 모양의 별자리가 된다. 제주도에 이렇게 서점이 많은 줄 나도 미처 몰랐다. 그동안 책방 편식을 해왔구나. 그때부터 제주의 서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원하는 경우 어디든 달려가 한 권이라도 사인을 해드리겠다고 했더니 몇몇 서점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낯을 가리는 편이라 언제나 서점 입구에서 쭈뼛쭈뼛 “저 정다운….” 하며 인사를 해야 했지만, 주인들은 늘 환대해 주었다. 작은 환대에 마음이 확 열려버렸고 그때마다 서점과 새롭게 사랑에 빠졌다. 107곳을 전부 가보진 못했지만, 수십 개의 서점을 방문하며 알게 된 것은 서점마다 하나하나 색깔이 다르다는 점이다. 서점은 결국 시중에 있는 책을 파는 곳이니까 다 비슷비슷할 거라는 나의 편견이 깨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우리 사람들처럼 서점도 그랬다. 그래서 그때부터 서점에 가는 일은 나에게 작은 여행이 되었다. 광역 버스를 타고 대형 서점으로 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책을 고르는 일도 좋았지만, 작은 마을 안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서점을 찾아가 주인과 인사를 하고 그가 골라둔 책 중 하나를 사서 나오는 일도 좋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책방과 서점이란 단어를 섞어 사용했다. 실은 그런 줄도 몰랐다가 다시 읽으며 발견했다. 아무래도 통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문장을 거슬러 올라가며 책방을 모두 서점으로 고쳤다. 하지만 몇 군데는 그냥 두기로 한다. 사전에서 책방과 서점을 찾아보니 한자만 다르고 의미는 똑같다. 책방은 책 책冊, 방 방房 자를 쓴다. 서점은 글 서書에 가게 점店 자를 쓴다. 책이 있는 방. 글이 있는 가게. 시가 사는 집. 큰 서점이 된 섬. 오세요 제주. 100개가 넘는 서점이 별처럼 흩어져 있는 책의 섬으로.
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