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생긴 저녁

저녁 여섯 시 이후의 제주도에 관하여

저녁 여섯 시 이후의
제주도에 관하여

느긋한 여행자가 되고 싶어 휴무일과 영업시간을 알아보지 않고 다니다가 몇 번씩 허탕을 쳤다. 섬에서는 애써 찾아간 상점이 문을 닫거나, 여섯 시 혹은 일곱 시까지만 영업하는 곳을 종종 만나게 된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도 이곳에서 각자의 저녁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닫힌 상점의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물었다. 저녁이 시작된 후,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INTERVIEW 전효진·김종식

중학교 운동장을
걸어요

“요즘은 우리 부부 둘 다 살이 좀 찐 것 같아서 동네 중학교 운동장에 밤 운동을 나가요. 컬투쇼를 들으면서 킥킥대거나 우리 앞의 날을 얘기하며 운동장을 열심히 걷습니다. 달도 보고 가끔은 별똥별도 보면서요.”

겐자부로
A. 제주시 조천읍 함덕남14길 6
H. kenzaburo.modoo.at
T. 010 9818 1838
O. 11:00~해질 때까지, 일요일·비 오는 날 휴무

겐자부로는 함덕 바닷가 뒷마을에 있다. 부부는 2011년 가을부터 2016년 봄까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다 ‘작은 가게를 갖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담아 겐자부로를 열었다. 침대 옆에 놓을 수 있는 원목 협탁을 주문받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물건을 가지고 플리마켓에 나가기도 한다. 손때 묻은 물건과 손으로 만든 물건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지만 아직은 작업실 겸 아지트 같은 느낌으로 사용하고 있다.

INTERVIEW 정석보

내일의
저녁이 있으니까

“보통 5시에 식당을 마감해요. 여름엔 해가 높게 떠 있는 시간이라 문을 닫는 게 신나면서도 민망하기도 하죠. 도시에서도 산책을 좋아했는데, 이곳의 밤 산책은 도시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도시에서는 많은 사람을 스치며 걸어도 어쩐지 고립된 느낌을 받곤 했죠. 제주에서 산책할 땐 우선 제 발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주변의 소리에 집중하게 됩니다. 꽤 긴 시간을 산책해도 지나는 사람 하나 없지만 무언가 따뜻함을 느낍니다. 도시에서는 짧은 저녁에 친구를 만나고, 사람 많은 곳을 헤치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바쁘게 보내고도 지나간 시간을 너무나 아까워했죠. 하지만 이곳에서는 산책하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밀린 게임의 엔딩을 보는 시시콜콜한 것들을 하며 시간을 허비해도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일의 저녁이 있으니까요.”

주르레식당
A. 제주시 축산마을북길 55
H. facebook.com/jourrerestaurant
T. 010 2411 2906
O. 11:00~17:00, 목요일 휴무

주르레식당은 마을에 흐르고 있는 개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느리게 흐르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는 정석보 셰프는 깊은 맛을 내도록 오븐을 사용하거나 약한 불에서 오래 조리해 음식을 만든다. 그가 직접 꾸민 작은 식당에 앉아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가만히 주방에서 나는 소리와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한 시간에 두 팀 이상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전화로 예약하는 것이 좋다.

INTERVIEW 이선민

새벽의 오름 

“늦은 새벽, 친구들과 용눈이 오름에 올라간 적이 있어요. 언젠가 사진 찍는 지인이 새벽녘에 오름을 자주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불빛이 없는 곳에서 별이 많은 하늘을 보고 싶었는데, 워낙 겁이 많아서 깜깜한 가로등도 없는 오름을 오르는 일은 마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어요. 그러다 며칠 전 친구의 충동적인 제안에 올라갔죠. 언덕배기 오름이다 보니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가지고 갔던 과자는 다 날아가고, 목소리도 잘 안 들려서 소리를 지르며 대화했지만 오랜만에 깔깔대고 놀았어요.”

바다보석
A. 서귀포시 남원읍 태신해안로 115
H. sallysea.com
T. 070 8877 8611
O. 09:00~18:00, 토·일요일 휴무

여행 간 친구가 해변에서 주운 조개와 마모된 돌을 한 움큼 가져다준 적이 있다. 안 쓰는 접시에 잘 늘어놓았는데 이게 무슨 소용일까 싶다가도, 만지작거리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바다보석은 제주 바다로부터 나온 조개껍데기를 매만져 손거울, 귀걸이, 목걸이로 만든다. 조금씩 흠이 난 부분은 갈아내기도 하고, 짝을 맞추기도 하며 작업한다. 바다보석의 제품은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구매할 수 있다.

INTERVIEW 임용희

오광이와 바닷가

“일과를 마치면 반려견 오광이가 좋아하는 함덕해수욕장에 자주 가요. 해수욕장까지 차로 5분 거리인데 가는 길을 보면 소리 지르고 빨리 내리자고 발로 저를 긁어요. 올해 7살이 되었지만 조용하고 겁이 많아 장난감을 줘도 보기만 하고 잠만 자는 녀석이죠. 그런 녀석이 바닷가만 가면 흥분하고 신나서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좋아요. 퇴근 후 바다 위로 지는 해를 보면 하루의 피로가 날아가요. 회사에 다닐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일상이죠.”

귤꽃
A. 제주시 조천읍 함덕2길 90
H. instagram.com/gyulkkot
T. 064 784 2012
O. 11:00~19:00, 수요일 휴무

함덕의 도로를 달리다 사잇길로 들어가면 넓은 귤밭을 품은 작은 집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귤 창고를 개조한 카페 귤꽃에서는 직접 수확한 귤과 귤을 이용한 음료를 판매한다. 감귤 모히토, 귤 잼과 곁들이는 찹쌀쑥이와플은 언제 가도 즐길 수 있으며 계절에 맞게 하귤, 청귤을 이용한 음료를 내기도 한다. 카페 안쪽에서 오광이도 나름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올 수 있지만 대·소변은 바깥에서 봐야 한다.

INTERVIEW 이지언

별일 없이 산다 

“가끔 걸어가는 퇴근길에, 학원 끝나고 나오는 동네 단골 꼬마손님들을 만나요. 멀리서부터 ‘어, 여름문구사 이모다!’ 하며 반갑게 알은척하고 공손하게 인사해주죠. 그 친구들을 만나면 집에 오는 길에 뭔가 마음이 찌르르해져요. 집에 오면 마당을 뛰어다니는 강아지들과 텃밭에 물 뿌리며 빨리 밥 먹자고 징징거리는 남편이 있죠. 오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고, 반찬과 맥주를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열심히 벌어왔고, 가슴이 떨리는 재미난 하루는 아니었지만 가슴이 떨릴 만한 화난 일이나 슬픈 일도 없었다는 것에 잠깐 감사하단 마음을 갖고 복닥복닥 저녁 시간을 보냅니다.”

여름문구사
A. 제주시 구좌읍 구좌로 77
H. instagram.com/summer_mungusa
O. 10:30~19:00

어릴 때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 대답에 문구사 주인이라고 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여름문구사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파는, 어른의 문구사다. 하지만 단골이 될지 몰랐던 동네 초등학교 손님들의 의견을 받아 그녀의 취향이 아닌 ‘공룡 알 키우기’, ‘젤리 괴물’ 같은 것도 판매하고 있다. 사실 그들이 문구사 매출의 일등 공신이다. ‘일부러 찾아오기엔 그냥 문구사’라고 말하는 그녀는 오랜 시간 학교 앞을 지켜온 문구사가 왜 그렇게 복잡했는지 알아가는 중이다.

우리에게는 저녁이 필요하고
저물녘의 섬은 느리게 흐른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고 살던 때가 있었다. 컴컴한 새벽에 나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밤이 깊어야 다시 건물 바깥으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분명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그 시간은 흐릿한 그림처럼 남아있다. 제주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해가 저물면 각자의 저녁이 시작된다. 각기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섬에 정착한 이들의 공통점을 하나 들자면, 이제는 그들이 저녁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맡는 공기의 냄새는 달큼하다. 해가 저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흩어지는 일상을 소중히 여기려는 의식 같아서 요즘은 사소한 저녁의 풍경을 담아두려고 한다. 분주한 엘리베이터,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 9월의 나뭇잎, 집 가는 길의 아이스크림, 마트의 저녁 세일 목록 같은 것들. 몇 달 후, 혹은 몇 년 후의 나는 이 저녁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매일매일은 이렇게 다르다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을까. 자신의 저녁을 이야기해준 사람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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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