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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에서 발견한 색
새로운 컬러의 시대
패션쇼에서 발견한 색
발렌티노의 레드, 캘빈클라인의 오렌지, 수많은 컬러를 뒤섞어 새로운 룩을 만들어낸 구찌. 언젠가 다시 진중한 컬러의 시대가 오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패션쇼 시즌이 되면 언론이나 패션 잡지는 패션쇼에 등장할 트렌디한 컬러를 예측하거나 분석하는 기사를 낸다. 해가 바뀔 때쯤에도 비슷한 뉴스를 볼 수 있다. 이런 기사는 관련 연구소의 연구 결과인 경우도 있고, 패션쇼에서 보이는 옷을 대상으로 분석한 경우도 있다. 특히 요즘은 캣워크뿐만 아니라 패션쇼가 열리는 곳의 스트리트 패션 등을 통해 무슨 컬러가 많이 보인다는 기사도 많다.
아무튼 올해 가을, 겨울 시즌에 유행할 거라고 기사에 실린 컬러를 찾아보면 오렌지, 라임 그린, 프로즌 옐로우, 호피 무늬, 모노톤, 네온, 밀레니얼 핑크, 파스텔 컬러와 페일 컬러 등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어떤 건 평범한 컬러의 이름이지만 수식어가 붙은 컬러도 있고, 색이 아니라 무늬도 있고, 비슷한 분위기를 뭉뚱그려 표현한 말도 있다.
이런 뉴스를 읽다 보면 과연 컬러 트렌드라는 게 의미가 있긴 한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차라리 올해 패션쇼에는 드문 색을 찾아내 그게 왜 없는지 이야기를 하는 게 좀더 유용하지 않을까.
물론 큰 흐름은 있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다음 시즌의 매출이 걸린 문제고 그러니까 별 생각 없이 아무거나 내놓기는 어렵다. 또한 너무 트렌드만 좇다가는 남들과 똑같은 걸 내놓을 뿐 차별화가 어려워진다는 딜레마도 있다.
사실 컬러는 특정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역사적으로는 계급, 계층, 직업과 관련이 크다.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라는 말은 여전히 관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보라색은 권력자의 색이었고, 올리브그린이나 카멜은 군대의 색이다. 황금색, 빨간색 등은 미신이나 국가적 선호와 얽혀 있기도 하다.
브랜드들에게도 상징적인 컬러 사용이 있다. 발렌티노 컬렉션의 마지막에 나오는 레드는 상징처럼 되어 아예 레드 발렌티노라는 서브 브랜드를 런칭하기도 했다. 디자이너 발렌시아가는 검은색, 회색 사이에서 선명한 핑크를 사용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이런 기존의 이미지는 여전히 유효하기도 하고 별 의미가 없기도 하다. 지금 발렌시아가의 쇼에서 투우와 플라멩코, 고야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컬러 이용 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 최근의 발렌시아가는 1950년대에 발렌시아가가 하던 것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컬렉션을 만들고 있다. 물론 이런 역사는 언젠가 써먹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예를 들어 군복에서 모티브를 얻은 옷이라면 올리브그린, 실버, 블랙 같은 색이 많기 마련이다. 옷의 모습과 컬러가 함께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렇지만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같은 옷에 버건디나 오렌지 컬러를 쓴다고 해도 나쁠 건 전혀 없다. 옷의 생긴 모습이 컬러와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흔하다.
하이패션은 미니멀리즘의 시대, 로고의 시대 등을 거치면서 우중충한 모습이 인기를 끌기도 하고 화려해지기도 하면서 변해왔다. 그 속에서 컬러도 함께 혹은 따로 변해간다. 보통 순환을 한다고 하는데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만약 빨간색이 상당히 유행이라 빨간 톤의 옷, 가방, 신발이 많이 나오면 빨간 제품과 거기에 어울리는 컬러를 많이 소비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슬슬 질리게 되고 그런 타이밍에 어떤 브랜드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컬러를 선보이면 새로움을 느끼기 쉽다. 익히 알던 색이지만 지금 보니까 신선하다는 느낌. 거기에 조합과 사용처에 조금씩 변화를 주기도 하고 네온 그린이나 밀레니얼 핑크 같은 단어처럼 전략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큰 흐름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순환을 하던 하이패션은 몇 년 전부터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스트리트 패션, 새로운 세대의 패션이 유입되면서 캣워크 위에 올라가는 제품군이 변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잘 쓰지 않던 소재와 컬러를 쓰게 되었다.
예를 들어 캘빈클라인의 쇼에는 도로 작업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멀리서도 눈에 띄도록 오렌지 컬러를 쓴 튼튼한 폴리에스테르 작업복 위에 빨간색과 은색으로 반사판을 붙여 놓은 옷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발렌시아가에는 햇빛을 잔뜩 쬐며 산과 들로 돌아다니다가 자외선에 옷의 염색이 바랜 듯한 컬러의 아우터웨어가 등장했다.
그동안 하이패션은 복잡다단한 세상사와는 상관없이 어딘가 떨어져 있는 거 같고 완성된 세계관 속에서 정밀한 장인의 기술로 구조되어 온 이미지가 있었지만, 어느덧 주변의 일상이 섞인 혼돈의 장이 되었다. 시크하고 엣지 있고, 열심히 가꾼 몸을 열심히 드러내는 이전의 멋진 옷에 새로운 세대는 예전만큼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노스페이스나 슈프림, 파타고니아나 나이키가 사용하는 생생하고 강렬한 컬러가 새로운 시대의 멋짐을 만들어낸다.
이런 흐름 속에서 컬러의 사용 측면으로 눈에 띄는 곳 중 하나는 구찌다. 노스페이스나 폴로에서 나온 알록달록한 스포츠웨어를 사랑하던 90년대 힙합 패션이나 반짝거리는 것들을 제멋대로 겹쳐 입는 어린아이들의 옷 입는 방식을 따라 하고 있는 듯한 구찌의 컬렉션을 보면 그야말로 컬러가 폭발하고 있다. 수많은 컬러가 뒤섞여 새로운 뷰를 만든다. 이렇게 과잉된 모습이 눈에 익고 나면 다른 옷이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듯 하이패션의 커다란 변화와 함께 사용되는 컬러도 크게 변하고 있다. 아마도 이 요란한 컬러의 시대는 언젠가 막을 내릴 테고 그러고 나면 또 진중한 컬러의 시대가 오게 되겠지만, 지금의 요란한 컬러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다가올 진중한 컬러의 시대는 이전과 또 다른 면모를 보일 게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패션이 담는 폭이 넓어진다.
사실 국내의 경우 거리를 돌아다녀 보면 금방 느끼겠지만 눈에 띄고 독특한 컬러의 사용을 망설이는 경향이 여전히 있다. 보통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런 문제는 경험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변화가 우리의 패션 생활에도 새로운 자극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패션에 있어서 다른 컬러는 있을지언정 틀린 컬러는 없다. 무슨 색을 칠하든, 무슨 색을 입든 자기 마음이고 그런 게 바로 최근의 하이패션이 주장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글 박세진(패션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