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내겠습니다!

베스트셀러에 혹해서 떠난 여행

사표 내겠습니다!

베스트셀러에 혹해서 떠난 여행

힘들다. 하루하루 되는 일은 없고 피로가 쌓인다. 마침 전갈자리 운세도 하향세다. 답답한 마음에 서점에 갔는데, 어쩜 제목들이 하나같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손이 가는 책을 하나로 모아 나란히 두었더니 이런 문장이 완성됐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서,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불행을 피하기 위한 기술, 퇴사하겠습니다!’ 그래, 나 사표 내고(뻥) 탈출한다!

캘리포니아
유학생처럼

예감이 좋았다. 친한 친구들과의 메신저 창을 훑어봤더니 온통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볼멘소리뿐이었다. 잘만 구슬리면 몇 명 정도는 꼬실 수 있겠다 싶어 단체 문자를 보냈다. “야, 인생 뭐 있냐. 떠나자, 싯팔!” 원래 욕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닌데, 비속어를 쓰면 좀 더 쿨해 보일 것 같았다. 친구 둘이 동조했다. 학창 시절 공부는 중간, 생긴 것도 중간, 어영부영 살다 보니 어느덧 나이도 삼십 대 중반에 걸쳐버린, 그야말로 심심한 인생을 사는 세 친구가 의기투합했다. 우리는 일단 만나서 술을 마셨다. 옛날이야기, 일과 돈, 지난 사랑 이야기, 그리고 침묵. 삶이 건조해 더는 신나게 떠들 소재가 없었다. 접시에 담긴 산낙지가 꼼지락거렸고, “하아”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일탈이 필요했다. “당장 어디든 가야겠어.” 소주잔을 비우며 내가 말했고, 친구들은 술기운이 잔뜩 달아오른 목소리로 콜을 외쳤다.

우리는 크게 부풀었다. 가방도 옷도 필요 없었다. “야, 지갑만 있으면 돼.” 무작정 떠나서 계획 없이 볕이나 좀 쬐다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졸고, 누군가 우리의 정체를 물으면 여유로운 말투로 “그냥 심심해서 내려왔어요.”, 자유로운 캘리포니아 유학생처럼 굴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약속의 날. 친구들이 사라졌다.

무인도를
찾아서

“미안하다. 술이 너무 안 깬다.”, “나 부모님 가게 알바가 펑크 내서 도와드려야 돼.” 약속이나 한 듯 두 친구는 나를 배신했다. 평소 같았으면 욕이 먼저 튀어나왔겠지만 이상하게도 화는 나지 않았다. 나는 자유로운 캘리포니아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공항으로 갔다. 목적지는 마라도,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으로 제주도를 통해서 들어갈 예정이었다. 짐이 없어서 수속도 단숨에 통과했다. 요즘 누가 제주도에 캐리어 끌고 다닌다고. 촌스럽게. 공항에서 시간을 때우며 혼자 놀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나는 당당하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콧구멍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 섬은 언제나 옳다. 공기가 그걸 말해줬다. 마라도로 가는 배는 제주 남쪽 모슬포 항에 있었다. 여객선은 하루 다섯 번 정도를 왕복 운행하는 모양이었다. 섬에서 나오는 배가 미리 정해져 있어서 실제로 마라도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30분 남짓이었다. 인구 천만의 메가시티 서울에서 500킬로미터 정도를 날아왔건만 일탈 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나오는 배를 타지 말고 섬에 고립돼버릴까 잠깐 생각했다가 지웠다. 나는 보기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에 탔다.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 내내 미뤄오던 섬. 무인도는 아니지만 바람이 많아 언제라도 나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섬. 나는 마라도에 왔다.

지구의 끝
짜장면 섬에서

배에서 내린 몇몇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었다. 달리던 누군가 “왜 뛰어?” 하고 물었고, 그녀의 친구는 “짜장면!” 하고 소리쳤다. 그래, 마라도는 짜장면의 섬이었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지도 위의 설명된 길 반대편으로 걸었다. 하늘에서 보면 이곳은 둥그런 테두리로만 이뤄진 섬이어서, 어디로 걷든 시작과 끝이 하나로 모였다. 산책의 마지막에 보게 될 벤치를 먼저 만나고, 삽살개와 등대, 먼 바위에 꼿꼿이 솟은 낚시꾼들, 연못과 억새, 이름 모를 식물들을 지나 대한민국 최남단 비석이 세워진 곳까지 단숨에 걸었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바다와 가까운 가장 끄트머리 바위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자신이 사는 곳과 가능한 한 멀어지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다. 유난히 많은 바람이 불었고, 나는 괜스레 헛헛한 마음이 들어 재빨리 자리를 떴다. 

대망의 짜장면을 시켰는데, 바다에서 갓 캐낸 듯한 톳 몇 조각이 토핑의 전부였다. 배가 고파서 3분 만에 해치우고는 우리 동네 중국집 연경을 떠올렸다. 산책을 마치고 가만히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바다를 봤다. 매일같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이 섬에 나는 살 수 있을까? 호기롭게 사표까지 생각하며 지구의 끝까지 왔건만,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 쓰게 웃었다. 내가 이곳에서 발견하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당신은
희망을 믿나요?

영화 <김씨 표류기>에는 자살에 실패한 한 남자가 나온다. 그는 밤섬에 갇혀 구조 요청을 보내지만 도시는 냉정하다. 하지만 해변에 써놓은 ‘HELP’를 ‘HELLO’로 수정하기까지 그에게 무엇이 변했는지 생각해보면 사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조금만 노력하면, 우연히 발견한 짜파게티를 끓여먹을 수 있다는 하나의 ‘희망’이 생겼을 뿐이다. 희망. 아주 작은 곤충, 아주 작은 떡잎, 아주 작은 연필과도 같은 이름. 희망이란 크기가 커질수록 허망에 가까워진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그래서 더 내밀하고 사적인, 사소하지만 하루하루를 살게 약속 같은 것만을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이런 걸 정신승리라고 하던데, 뭐 아무렴 어때.

여행의 끝자락에 나는 다시 친구들의 연락을 받았다. 제주로 내려온다는 거였다. 다만 비행기 티켓이 없어 배를 타고 온다는 친구들을 기다리며, 나는 하루 더 제주에 머물렀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다시 목포에서 제주까지, 처음 우리의 계획대로 옷도 짐도 없이 내려온 친구들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 멍청한 세 얼간이들, 사표 쓸 준비는 됐냐?” 내가 물었고, 친구는 머쓱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야,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쉽냐.”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포토그래퍼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