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붙여

사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붙여

거의 한 세기 전에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특히 글을 쓰려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 정도의 돈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이 두 가지 현실적인 조건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녀가 말했던 자유로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사물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 상태는 무엇보다도 자기 앞의 리얼리티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용기와 결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겠다는 욕망이 양날의 칼이 되어 나의 내면을 조각낼 때, 무엇보다도 내 앞의 현실을 정직하게 목도하고 그것에 관해 묻고 답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녀로부터 매번 다시 배운다.

소설
《자기만의 방》

거의 한 세기 전에 영국에서 쓰인 에세이를 읽는데 놀랍게도 마치 지난달에 한국의 한 인터넷 뉴스에 실린 사설을 읽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가 1928년 10월, 케임브리지 대학교 내의 여성 대학인 뉴넘 대학의 예술협회와 거턴 대학의 오타에서 발표한 두 강연문에 기초하는 에세이다. 하지만 이 글을 단순히 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어진 주제에 대해 쓰기 위해서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만들어낸다. 글의 서두에 등장하는 옥스브리지 대학이나 펀엄 같은 공간은 가상의 대학이며, 작가 스스로 말하듯 “여기서 ‘나’는 실재하는 존재라기보다는 누군가를 뜻하는 편리한 가칭일 뿐”이다. 때문에 이 글은 버지니아 울프라는 한 여성 작가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쓴 에세이인 동시에, 또 한 편의 여성(과, 에 의한, 에 대한 등등 이 괄호 속에 어떤 말을 넣어도 완벽하게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을 테지만) 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작가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어진’ 강연 주제에 맞서서 여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그 관심을 픽션으로만 상대하려는 수상한 세상의 논리에 대항하는 일까지도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글을 통해 작가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일 년에 500파운드라는 고정 수입과 자물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은 일견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요구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 같은 예술 작업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작가의 천재성을 통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며, 온갖 것들의 방해로부터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몇백 년이라는 역사 가운데 거론될 만한 거대한 사건과 인물을 다루는 동시에 그 인물의 남다른 내면과 일상을 영위하는 성격을 그려내야 하는 창조적인 작업이야말로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타오를 수 있는 마음” 상태를 필요로 한다. 자기만의 방과 돈을 저 마음 상태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현실적인 조건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통찰을 신뢰하게 된다.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타오를 수 있는 마음 상태(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마음 상태로 예시된다)에 관한 통찰은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에 근거한다. 연간 500파운드라는 숙모님의 유산을 물려받기 전에 그의 생활은 자잘한 일들을 하며 생계를 이어오는 데 급급했다. 그 일은 그에게 물리적인 피로감보다 더한 고통을 주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일을 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으로 아부해야 한다는 사실 등 온갖 이해관계에 얽힌 사실들로 이뤄진 세계 속에서 그는 자기에게 고유한 어떤 재능이 점차 소멸하고 그에 따라 자기 영혼까지도 사라지는 듯한 위기감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돈이 생기자 차차 그 마음속의 고통이 사라지고 “가장 커다란 해방, 즉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된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그런 마음 상태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한다. 이 마음 상태는 결국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이루는 두 낱말의 경계를 흐려놓는 듯하다. 물론 작가는 1장부터 5장에 이르기까지 긴 지면을 역사적·문학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아온 여성이라는 삶의 조건을 서술하는 데 할애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하지만’ 같은 접속사를 크고 진하게 적으며 ‘자기만의 방’에 대한 그 고유의 당부를 덧붙인다. 하지만 여성이 기어코 살아남아서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 바깥의 다른 성性에 대한 적대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동시에 자기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화해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이게 왜 다된 밥에 코 빠뜨리는 소리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끝까지 여성과 픽션을 겹쳐두고 생각했다. 여성을 말하기 위해서 소설을, 소설을 말하기 위해서 여성을 끌어오는 게 아니라 그의 글에서는 그중 하나에 관해 말할 때조차 그 둘이 함께 호명되고 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인된 기록들에서 오래도록 여성의 구체적인 삶, 한 여인의 일생을 찾아볼 수는 없었고 그녀의 아버지나 남편에 관한 기록에서 유추해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버지니아 울프에게 소설은 공인된 기록 이면에 있는, 기록되지 않았고 기록될 수 없었던 존재들에 대한 기억과 다르지 않다. 그 기억은 곧 역사 속 여성의 삶에 관한 것이다.

나는
카페 생활자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자신을(글 속의 ‘나’를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고 전제하긴 했지만) 내세워 강둑에 앉아 사색에 잠기고, 길을 걸으며 오래된 건물을 감상하고, 점심과 저녁식사 모임에 참석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는 일처럼 사소한 일상의 장면들을 기록하는 일로 시작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한 여성의 별다를 것 없는 하루 일과에 관한 친밀한 기록인 동시에 여성의 눈에 비친 세계의 내력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이었다. 고풍스러운 교회와 대학 도서관의 건물을 감상하는 눈 이면에 그 건물 아래 묻혔을 노동자의 땀과 자본가의 돈을 보는 눈,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차려진 테이블 위의 요리를 맛보는 혀 이면에 남성과 여성이 먹고 마시는 음식의 종류가 다름을 말하는 혀. 이것이 그가 그토록 강조한 리얼리티에 맞서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유를 획득한 마음 상태를 대신하는 눈과 혀가 아닐까.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또 다른 ‘나’의 경우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글을 쓰기에 꽤 괜찮아 보이는 방이 있다. 2미터 길이의 커다란 책상이 한가운데에 놓여있고 삼면은 책장으로, 나머지 한 면은 통창으로 둘러싸인 아늑하고 밝은 방. 하지만 글을 쓰는 나는 자주 이 방을 탈출하는 데 골몰한다. 무엇보다도 방은 내게 일터보다는 쉼터의 느낌을 강하게 주어서 이곳에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긴장과 집중은 갖기 어렵다. 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가두는 일에 나는 익숙하지 못하다. 방 안에 있어도 신경은 온통 방 밖의 일에 쏠린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연다. 세탁기와 청소기를 돌리고 일이 없을 때는 미뤄두기만 하던 설거지를 한다. 그러고 나면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각종 세금 고지서와 카드 명세서가 눈에 거슬린다. 이번 달 수입과 지출을 어림짐작해본다. 한참을 그렇게 보낸 후에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고 눈앞의 원고를 들여다보지만 진척은 없고, 다시 방문을 연다…

이 지루한 반복이 역설적인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연히 가방을 챙겨 카페로 간다. 카페를 전전한다. 어느 카페는 배경음악이 산만하고, 다른 카페는 테이블 간의 간격이 좁아서 옆자리의 수다가 일에 집중하는 걸 방해한다. 또 어느 카페는 화장실을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또 다른 카페는…. 그렇게 카페는 또 다른 방이 되고, 방이 된 카페는 더 이상 카페가 아니게 되는 동안 나의 정체성은 글을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카페생활자가 되었다. 원고료로 받은 돈 중에 적지 않은 부분을 커피값으로 지불하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글을 쓰고 여타의 창조적인 작업을 할 때 필요한 자유로움은 아마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 의미 있게 와 닿는 이유는 그가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를 중요하게 말하면서, 또 한 사람의 마음이 두 개의 성을 함께 갖게 되는 상태를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변하고 흘러가는 것에 주목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것은 모든 고정된 것을 의심하고 움직이는 것을 믿으려는 태도로 읽혔다. 그가 끝내 자기 연설의 마지막을 자기에게 돌리는 부정적 질문으로, 자기반성으로 맺은 이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 덕택에 내 방은 그저 물리적으로 외부와 분리된 개인의 공간에서 창작하는 마음 상태에 적합한, 나 자신의 자유로운 정신 상태에만 몰두할 수 있는 조건을 갖는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저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고유한 장소가 있을 것이다. 커피콩을 채취하는 데 빈민국 아동의 무수한 노동이 착취되고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나는 조용한 카페 한구석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다.

그녀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그러니 이제 여전히 픽션으로만 존재하는 여성들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멈추자. 16세기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익명으로만 존재하던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상상을 이어나가는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래야만 한다. 여전히 이 세계에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투하는 여성들(버지니아 울프가 백 년 뒤에는 여성이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고 믿었던 그 모든 직업을 가진)이 있고, 이제 그들의 말은 원한다면 어디든 기록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그들이 이름을 갖고 그 이름으로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된 사실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맞서야 한다. 그 사실이 갖는 익명성, 크고 굵게 적힌 ‘여성’이라는 대명사 아래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나’들이 갈 곳을 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시대의 허구를 다시 한 번 걷어내 보자는 말이다.

엊그제 새로 산 옷을 입고 출근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고 한 시름 돌린, 왠지 빵이 먹고 싶어 점심시간의 많은 부분을 멀리 있는 맛있는 빵집에 오가는 일로 소비한, 퇴근 후에 친구들을 만나 유명한 식당에 가서 음식 사진을 공들여 찍은, 하루 사이에 마구 어질러진 집 안 풍경을 뒤로하고 새로 산 꽃을 멋진 꽃병에 꽂은, 인스타그램 속 무수한 여성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생각은 월급과 지출과 적금을 걱정하고 그 걱정을 쪼갠 대가로 새 셔츠를 한 장 구입하고, 저녁거리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꽃을 몇 송이 사고, 빵과 함께 먹을 커피를 한 잔 주문하는 여성의 주저하는 눈빛과 만족하듯 올라간 입꼬리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한 세기 전의 영국에서도, 지금의 한국에서도 그녀는 인쇄된 사진과 글자로는 말하지 못한다. 이 명백한 사실에 맞서서 나는 다음의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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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나영

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