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뿐하고 나다운 차 생활

김규림 — 브랜드 디렉터·작가

브랜드 디렉터이자 작가, 스스로를 ‘잡덕’이라 부르는 규림. 그가 이번에는 차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했다. “결국 풀을 우린 물일 뿐”이라며 차로 향하는 문턱을 낮추면서도, 우림 시간 1초의 미세한 차이에서도 기어이 감탄의 근거를 찾는 집요함을 잃지 않는다. 아파트 방 한 칸에 정성껏 지어 올린 차실에서, 그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행위를 넘어 나다움을 증명해 내는 치열하고도 경쾌한 훈련을 이어가는 중이다.

저 역시 차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철옹성 같은 장벽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니더라고요. 결국 풀을 우린 물이니까요.

섞일수록 선명해지는 것들

이곳이 새로 지은 차실이군요. 건네주신 차도 향이 좋아요.

최근 대만에서 사 온 이산 우롱차예요. 저는 보이차처럼 묵직하고 진한 건 잘 못 마시는 편이라, 꽃향기가 감도는 라이트한 차를 주로 찾아요. 평소에도 녹차나 백차를 즐기는데, 우롱차도 이렇게 연하게 우리면 입에 잘 맞더라고요.

대만엔 어떤 이유로 다녀오신 건가요?

제가 일하는 음료 브랜드 ‘뉴믹스커피’의 매장 손님 99퍼센트가 외국 분들인데, 요즘 대만 분들이 부쩍 늘었어요. 그분들의 문화를 조금 더 이해하고 싶어 떠난 길이었는데, 마침 대만이 차 문화가 아주 발달한 나라라 지금 제 관심사에도 딱 맞는 여행지였죠.

부지런히 살핀 대만의 풍경은 어땠나요?

대만 관광객분들이 저희 매장에서 ‘볶은쌀맛’ 믹스커피를 드시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거 있어!”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하시거든요. 그걸 상상만 하기는 쉽지 않아서 직접 가서 마셔보고 싶었어요. 버블티가 태어난 나라답게 관련 시장이 정말 정교하게 발달해 있더라고요. 전통적인 우롱차를 현대적인 브랜드로 풀어내는 감각을 보며, 다음엔 어떤 맛을 우리 식으로 섞어볼까 즐거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뉴믹스커피가 최근 밀크티 라인을 선보였잖아요. ‘커피’라는 익숙한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까지, 내부적으로도 고민의 시간이 있었을 것 같아요. 

거의 1년 동안 고민했어요. 믹스커피로 시작한 브랜드가 다른 카테고리를 만드는 게 맞을까 싶었죠. 하지만 저희는 ‘믹스’라는 문화를 조금 더 넓게 바라보기로 했어요. 라즈베리 말차처럼 더 과감하고 낯선 조합으로 섞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그런 시도를 이어가며, 이제는 사람들이 꼭 커피가 아니어도 ‘뉴믹스답다’고 인지해 주시는 것 같아 확신을 얻었어요.

생산자의 눈으로 요즘의 음료 트렌드를 바라보면 어떤 것들이 읽히나요?

우리나라는 정말 트렌드에 민감하고 호흡이 빨라요. 작년 말차 유행 땐 재료 수급이 안 돼서 사정하며 물량을 확보했을 정도니까요. 생산자가 되어보니 원료의 산지와 흐름의 변화를 더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돼요. 때로는 유행을 타기보다 “우리 쪼대로 한번 섞어볼까?” 하는 과감함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고요.

저희는 예전 《AROUND》에서 ‘문구인’과 ‘뉴믹스커피 브랜드 디렉터’로 이야기 나눈 적 있죠. 오늘 이 자리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어요?

아마 이번 호 출연자 중 제가 가장 가볍고 캐주얼하게 차를 즐기는 사람 아닐까 싶어요(웃음). 저는 저를 ‘안 심각하게 차 마시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싶어요. 원래 예쁜 공예품 탐색을 좋아하다 보니, 찻그릇 같은 ‘콩고물’에 먼저 눈을 떴고, 그 호기심이 차로 이어진 경우거든요. 저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잡덕’이에요. 이것저것 좋아하는 잡다한 관심사가 섞여서 결국 제 창작물로도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저에게 차는 정말 가볍게 접근하는 대상이에요. 제 본업이나 문구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죠. 인생에 하나 정도는 심각하지 않은 것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다른 인터뷰이분들에 비해 무게감이 덜하다는 게 제 차 생활의 특징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번 호를 기획하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이 ‘무게감’이었어요. 차를 깊이 아끼는 분들의 진지한 이야기도 소중하지만,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분들에게는 조금 더 가벼운 선택지도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규림 씨의 이야기가 그분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웃음). 저는 제가 만들고 소개하는 것들을 보며 사람들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을 때 기분 좋아요. 너무 도전적으로만 보이면 ‘저건 저 사람이라 가능한 일’이라며 벽을 느끼게 되니까요. 커피도 장인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편의점에서 편하게 즐기는 사람이 있듯 차도 마찬가지예요. 저 역시 차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철옹성 같은 장벽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니더라고요. 결국 풀을 우린 물이니까요(웃음). 그냥 마시면 되는 거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저한텐 참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차를 궁금해하는 분들에게도 늘 똑같이 이야기해요. 사실 별거 없다고, 그냥 마시면 된다고요.

차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싱가포르 생활이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당시 일 때문에 잠깐 싱가포르에 머물렀는데, 굉장히 잘못된 생각으로 싱가포르에서 차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웃음). 중화권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막연히 차 문화가 아주 발달했을 거라 오해한 거죠. 그런데 막상 가보니 싱가포르는 서울만큼이나 젊고 역동적인 국가라 차를 접할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어요. 이미 ‘싱가포르에서 차를 시작하면 너무 멋지겠다.’는 마음을 품고 갔는데 말이에요. 가르쳐주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녀도 마땅치 않아서, 결국 그곳에서 독학을 시작하게 된 케이스예요.

낯선 타국에서 혼자 차와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셨어요?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에 있는 몇 안 되는 찻집을 찾아갔어요. 그곳의 티 마스터에게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물었죠. 그분이 저를 보더니 기왕이면 좋은 걸로 시작하라며 아주 비싼 개완(뚜껑이 있는 찻잔)을 추천해 주셨어요. 초보인 저에게는 너무 과한 것 같아 정중히 거절했더니, 그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어차피 너는 여기까지 오게 되어 있다.”고요. 그날은 결국 가볍게 즐길 만한 찻잎과 2만 원짜리 저렴한 개완을 사서 돌아왔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 정말 그분 말이 맞더라고요. 손에 감기는 개완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점점 ‘다음 건 이걸 써볼까?’ 하고 하나씩 발전하게 된 거죠. 찻집에 놀러 갔다가 예쁜 게 있으면 따라 사보기도 하면서요. 그렇게 조금씩 저만의 차 생활이 두터워졌어요.

“어차피 너는 여기까지 오게 되어 있다.”는 호언장담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제 소비 인생이 늘 그런 과정의 반복이었거든요. 다만 저는 누군가 정해준 북극성을 바로 찍기보다, 저한테 맞는 장비를 하나씩 업그레이드하며 나만의 북극성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에요. 시행착오를 겪을 때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며 결국 나만의 지도를 그려 나가는 중인 것 같아요.

중화권의 차 문화 중에서도 특히 흥미를 끄는 지점이 있다면요?

일상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차 문화를 동경하는 편이에요. 베이징의 ‘장일원’ 같은 100년 넘은 자스민차 브랜드에 가면,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셔서 “100그램 주세요.” 하면 잎차를 그냥 푹 퍼서 포장해 주시거든요. 대단한 감각이나 격식 없이, 아주 평범하게 소비하는 풍경이 참 재밌더라고요.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타국의 일상에 깊이 박힌 문화를 마주할 때, 막연히 가지던 심리적 장벽이 무너지기도 하죠. 

맞아요. 제가 믹스커피 브랜드를 준비하며 느낀 건데, 우리나라의 어느 부동산이든, 공사 현장이든 숨 쉬듯 존재하는 게 믹스커피잖아요. 너무 당연해서 정작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요. 대만의 우롱차나 인도의 짜이Chai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나라에 오면 꼭 비싼 곳에서 격식 차려 마셔야 할 것 같지만, 현지에선 길거리에서 가볍게 사 마시는 음료거든요. 가보지 않았기에 높다고 생각하던 허들이 탁탁 깨지는 지점들, 그걸 경험하고 싶어 여행을 떠나기도 해요.

허들을 낮춰주는 친절한 브랜드나 도구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더 크겠어요. 

맞아요. 대만의 ‘울프티Wolf Tea’ 같은 브랜드가 좋은 예시예요. 이번에 사 온 개완에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늑대가 그려져 있는데, 이런 위트 있는 도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100년 넘은 헤리티지 브랜드는 이미 차를 잘 아는 손님이 주로 찾아오니 설명이 불친절할 때가 있거든요. 반면 울프티는 픽토그램이나 지도를 활용해 찻잎의 출처를 친절하게 알려줘요. 디자인도 감각적이라 입문자들이 이해하기 훨씬 쉽고요. 오래된 전통 위에 이런 위트 있는 브랜드들이 더해질 때 차의 장벽이 낮아진다고 느껴요. 입문자들이 “뭐야,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브랜드가 많아질수록 차 문화도 다채로워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발견들이 일상에는 어떤 식으로 섞여 드나요?

최근 베이징의 한 가게에서 ‘자스민차 커피’를 마신 적이 있어요. 커피와 차의 맛이 절반씩 섞인 묘한 음료였는데, 집에서도 그 맛을 구현해 보려고 계속 시도 중이에요. 자스민차로 드립을 해볼까 고민하며 여러 번 실패하고 있는데, 저는 이런 과정이 참 즐거워요. 전통의 방식도 좋지만,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귀여운 것과 진지한 것을 섞어보는 게 제 직업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시도들이 제 안의 관성을 깨주기도 하고요.

차를 우릴 때 백산수만 고집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직접 물맛을 비교해 보신 건가요?

차는 온도나 물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하잖아요. 궁금해서 수돗물과 여러 브랜드의 생수를 늘어놓고 비교하며 마셔봤는데,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제 미각이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매일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어제와 오늘이 미세하게 다르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게 돼요. 한 달 동안 똑같은 차만 마셔보기도 했는데, 물의 미네랄 함유량에 따라 차이가 분명히 있고, 우리는 시간 1-2초 차이로 쓴맛이 확 올라오기도 했어요. 그 변화를 찾아가는 재미가 크더라고요. 마침 그때 듣던 차 수업에서도 디테일한 차이를 배운 덕에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었고요.

차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께서 “맛이 어떻게 좋은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하셨다는 일화를 블로그에서 읽었어요. 사실 맛을 언어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정말 부족함을 많이 느껴요. 저도 와인이나 커피를 마실 때 누군가 “체리 향이 난다.”고 하면 “대체 어디서 체리 맛이 나지?” 하고 되묻던 평범한 일반인이거든요. 당시 수업을 하면서 제가 했던 감상은 “맛있어요.”, “좋은데요.”뿐이었어요. 이외에 어떤 표현을 할 수 있을지 계속 훈련을 받은 거죠.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단순히 미각뿐만 아니라 피어오르는 난향, 몸이 훈훈해지는 느낌, 심지어 다기를 만지는 촉감까지 아울러서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거창한 수식어가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기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충분하죠.

맞아요. 저희가 차를 소믈리에처럼 평가하려고 마시는 건 아니니까요. 그날의 일기를 쓰듯 차 마실 때 감정을 이야기해도 되고요. 저도 친구들에게 차를 내어줄 때 구체적인 맛 묘사보다는 곁들이는 다식이나 도구 이야기, 차를 둘러싼 주변부의 즐거움을 더 많이 나누게 되더라고요.

좋아하는 걸 혼자 간직하기만 하면 금방 식거나 포기하기 쉽지만, 밖으로 꺼내는 순간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는 환경이 저절로 구축되기도 해요.

좋아하기 위해, 더 좋아하기

이 공간을 마련하게 된 배경에 대해 “작년 한 해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부족했다.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는 말씀을 하셨죠. 작년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정말 전쟁 같았어요. 본업에서 새로운 필드에 들어오다 보니, 낯선 역할과 환경에 적응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거든요. 체력보다도 심리적인 소모가 큰 한 해였어요. 주말이면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에서도 일 생각이 끊이지 않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일상의 소란을 잠시 끊어내고 다시 나로 돌아올 공간의 분리가 절실해졌어요. 그런 마음으로 이 차실을 꾸리게 됐죠.

말씀처럼 워낙 관심 분야가 넓은 ‘잡덕’이시잖아요. 수많은 선택지 중 왜 하필 차를 위한 방이었을까요?

저도 고민이 많았어요. 저희 집엔 그 시기의 화두에 따라 ‘노와이파이 존’이 있기도 했고, ‘생각의 방’이라 이름 붙인 공간도 있었거든요. 이번에 다시 방을 꾸미기로 했을 때, 지금 저한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고민해 보니 자연스럽게 ‘차’가 떠올랐어요. 보통은 차를 깊이 사랑하는 분들이 차실을 만든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반대예요. 공간이라는 환경을 먼저 세팅해야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라, 차실을 가짐으로써 차를 조금 더 진지하게 대하고 즐겨보고 싶었어요. 차가 너무 좋아서 차실을 만들었다기보다, 더 깊이 차를 좋아해 보고 싶어서 공간을 먼저 만든 것에 가까워요.

실제로 공간을 분리해 보니 어떤 변화가 생기던가요?

제 행동이 자연스럽게 디자인됐어요. 일과 일상이 뒤섞인 책상 앞에서 차를 마실 때와는 마음가짐의 무게가 다르거든요. 외부에서 잡념을 잔뜩 붙이고 집에 돌아와도, 어두운 이 차실에 앉아 차가 우려지는 모습에 집중하거나 다기(차를 끓여 마시는 데 쓰는 도구)를 차분히 만지다 보면 그 소란들이 자연스럽게 소멸돼요. 바빠서 발도 못 붙이는 날도 있지만, 이 공간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자기 전에 한 잔 마실까?’ 하고 마음먹게 되죠. 저한테 차는 외부 세계로부터 저를 차단하고 보호하는 소중한 수단이 됐어요.

이 차실을 구성할 때 가장 중점을 둔 요소는 무엇이었어요?

저는 일단 외부와의 ‘차단’ 혹은 ‘전환’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어요. 바깥세상에서 받는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은 오롯이 내면으로 접속하는 기분이길 바랐거든요. 그래서 사면을 나무로 감싸 아파트라는 구조적 한계를 지우고, 마치 다른 공간에 온 듯한 느낌을 줬어요. 또 하나는 물건을 밖으로 꺼내어 눈에 보이게 했어요. 도구를 수납함에 넣으면 깔끔하겠지만, 저는 매일 도구를 고르는 재미를 느끼고 싶었어요. 그날 기분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는데, “왜 오늘은 이 다기에 마음이 갈까?”라고 고민해 보면 또 그것만의 이유가 있더라고요. 내면을 살피기 위해 외부를 차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고요 안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는 것 또한 나를 알아가는 좋은 방법이라 믿어요. 스스로 다양한 선택지를 부여하고 그걸 매일 선택하게 하는 훈련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 공간을 마련하게 된 배경에 대해 “작년 한 해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부족했다.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는 말씀을 하셨죠. 작년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정말 전쟁 같았어요. 본업에서 새로운 필드에 들어오다 보니, 낯선 역할과 환경에 적응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거든요. 체력보다도 심리적인 소모가 큰 한 해였어요. 주말이면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에서도 일 생각이 끊이지 않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일상의 소란을 잠시 끊어내고 다시 나로 돌아올 공간의 분리가 절실해졌어요. 그런 마음으로 이 차실을 꾸리게 됐죠.

말씀처럼 워낙 관심 분야가 넓은 ‘잡덕’이시잖아요. 수많은 선택지 중 왜 하필 차를 위한 방이었을까요?

저도 고민이 많았어요. 저희 집엔 그 시기의 화두에 따라 ‘노와이파이 존’이 있기도 했고, ‘생각의 방’이라 이름 붙인 공간도 있었거든요. 이번에 다시 방을 꾸미기로 했을 때, 지금 저한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고민해 보니 자연스럽게 ‘차’가 떠올랐어요. 보통은 차를 깊이 사랑하는 분들이 차실을 만든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반대예요. 공간이라는 환경을 먼저 세팅해야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라, 차실을 가짐으로써 차를 조금 더 진지하게 대하고 즐겨보고 싶었어요. 차가 너무 좋아서 차실을 만들었다기보다, 더 깊이 차를 좋아해 보고 싶어서 공간을 먼저 만든 것에 가까워요.

실제로 공간을 분리해 보니 어떤 변화가 생기던가요?

제 행동이 자연스럽게 디자인됐어요. 일과 일상이 뒤섞인 책상 앞에서 차를 마실 때와는 마음가짐의 무게가 다르거든요. 외부에서 잡념을 잔뜩 붙이고 집에 돌아와도, 어두운 이 차실에 앉아 차가 우려지는 모습에 집중하거나 다기(차를 끓여 마시는 데 쓰는 도구)를 차분히 만지다 보면 그 소란들이 자연스럽게 소멸돼요. 바빠서 발도 못 붙이는 날도 있지만, 이 공간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자기 전에 한 잔 마실까?’ 하고 마음먹게 되죠. 저한테 차는 외부 세계로부터 저를 차단하고 보호하는 소중한 수단이 됐어요.

이 차실을 구성할 때 가장 중점을 둔 요소는 무엇이었어요?

저는 일단 외부와의 ‘차단’ 혹은 ‘전환’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어요. 바깥세상에서 받는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은 오롯이 내면으로 접속하는 기분이길 바랐거든요. 그래서 사면을 나무로 감싸 아파트라는 구조적 한계를 지우고, 마치 다른 공간에 온 듯한 느낌을 줬어요. 또 하나는 물건을 밖으로 꺼내어 눈에 보이게 했어요. 도구를 수납함에 넣으면 깔끔하겠지만, 저는 매일 도구를 고르는 재미를 느끼고 싶었어요. 그날 기분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는데, “왜 오늘은 이 다기에 마음이 갈까?”라고 고민해 보면 또 그것만의 이유가 있더라고요. 내면을 살피기 위해 외부를 차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고요 안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는 것 또한 나를 알아가는 좋은 방법이라 믿어요. 스스로 다양한 선택지를 부여하고 그걸 매일 선택하게 하는 훈련을 해보고 싶었어요.

사소한 선택 하나에도 이유를 찾아내고 있네요. 그 과정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정직한 길이라는 생각에 깊이 공감해요.

그렇게 하려고 항상 노력 중이에요. 요즘은 내 의견이나 감정이 진짜 내 것인지 착각하기 너무 쉬운 세상이잖아요. 예전에 ‘좋아하는 이유’를 기록하는 노트가 있었는데, 막상 적으려니 할 말이 없더라고요. “누가 올린 걸 따라 샀더니 좋더라.”, “모양이 타원형이라 예쁘다.” 정도에서 끝나는 감상을 과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물어봤을 때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저는 급속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해요.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정말 무섭거든요.

그 두려움의 실체는 뭐예요?

영화 〈매트릭스〉처럼 가상현실 속에서 타인의 것들을 다 흡수해 놓고, 그것을 오롯이 내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에요. 그래서 늘 스스로에게 되물어요. “이거 진짜 내 건가? 진짜 내 생각인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그 생각이 시작된 처음의 순간을 파고들어요. 아주 어린 시절 기억일 수도 있고, 어떤 물건과 처음 만난 찰나의 순간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뿌리를 찾아 파악해야만 비로소 안심이 돼요.

때로는 그 시작이 타인으로부터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며 나만의 의미가 덧입혀져 내 것이 되기도 하잖아요. ‘진짜 내 것’이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시작은 누군가의 추천일 수 있죠. 하지만 근원지를 아는 게 저한테는 무척 중요해요. 그래야 그 지점부터 제 이야기를 쌓아 나갈 수 있으니까요. 저는 어떤 소유든 반드시 내 생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철학이 있어요. 5만 원만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는 똑같은 물건을 단순히 가지고만 있는 건 진정한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일기도 마찬가지예요. 사건은 누구나 겪지만, 그게 나한테 어떤 의미였는지 해석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죠. 저는 제가 가진 물건들이 제 일상에 스며들었을 때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끊임없이 체크해요. 어쩌면 너무 복잡하게 의미 부여하는 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 인생의 포커스는 ‘나답게 사는 것’, 즉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 데 맞춰져 있거든요. 그래서 계속 되묻게 돼요. “이게 남들과는 뭐가 다른가?”, “이게 정말 나다운가?” 하고요.

나다운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에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겉으로 드러나는 스타일보다 ‘나만 할 수 있는 고유한 이야기인가?’를 더 중요하게 봐요.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하더라도 내가 두 발로 걸어가서 직접 겪은 일인가를 따져보는 식이죠. 제 차 생활에서 나다움을 찾자면 아까 말씀드린 ‘가벼움’과 ‘믹스’예요. 아주 진지한 전통 다구 옆에 눈, 코, 입이 달린 장난기 가득한 찻잔이 툭 놓여 있을 때, ‘그래, 이건 나밖에 못 하지. 나만 좋아할 수 있는 조합이야.’라고 생각해요.

규림 씨 책 《매일의 감탄력》이 떠오르네요. 사소한 것에도 감탄과 과장을 잘해서 동료들에게 ‘김과장’이라 불린 적도 있다고요(웃음).

(웃음) 제가 기본적으로 깜짝깜짝 잘 놀라긴 해요. 워낙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눈에 꽉 차는 예쁜 기물만 곁에 두거든요. 내 물건인데도 볼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어떻게 이런 형태를 만들었을까?” 하고 감탄해요. 예를 들어 6개월을 기다려 받은 다관이 하나 있는데, 열망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볼 때마다 놀라워요. 이 시그니처 형태를 만들기 위해 작가님이 얼마나 많은 흙을 부수고 다시 빚었을까 상상하게 되거든요. 자스민차를 마시면서도 “인간은 어떻게 자스민을 차로 마실 생각을 했을까?” 같은 생각도 하고요.

작은 것에 감탄하는 능력은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죠. 하지만 매번 같은 대상에 감동하기는 어렵지 않나요?

저도 늘 같은 대상에 같은 감동을 받을 수는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항상 새롭게 놀라며 살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만든 익숙한 환경 안에서 감탄을 찾되, 나머지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저를 던지며 균형을 잡으려 해요. 제 기준은 늘 ‘7대3’이에요. 70퍼센트는 익숙한 것들 안에서 깊이를 발견하고, 나머지 30퍼센트는 새로운 자극에서 기쁨을 찾는 거죠. 만약 새로운 것의 비중이 너무 커지면, 오히려 ‘나다움’이 희미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반대로 하던 것만 계속하면 새로움이 고갈되고요. 그래서 올해 목표도 이 7대3의 비율을 잘 유지하는 거예요. 늘 마시던 차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도 마셔보고, 늘 가던 가게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도시나 공간을 경험하며 새로움을 조금씩 주입하려고요.

한 인터뷰에서 즐기는 일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신다고 말씀하셨어요. 왜 마음이 가는 대상에 이토록 깊이 몰입하려 노력하시나요?

갈수록 무언가를 향한 뜨거운 에너지를 유지하는 게 참 어려워지잖아요. 제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예요. 돌아보면 제가 새로운 삶의 스테이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늘 내가 무엇에 마음을 쏟고 있는지 세상을 향해 크게 외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거든요. 문구도 그랬고, 차도 마찬가지예요. 이 업계에 수십 년 계신 분들이 있는데 ‘감히 내가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까?’ 하는 작은 망설임이 늘 있지만, 무언가를 아끼는 마음은 누구와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 취향을 밖으로 선언하면 친구들이 제 선물로 차를 사다 주는 작은 이득도 있고요(웃음). 넓게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생겨요. 뱉어놓은 말이 있으니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더 공부하고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거든요. 좋아하는 걸 혼자 간직하기만 하면 금방 식거나 포기하기 쉽지만, 밖으로 꺼내는 순간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는 환경이 저절로 구축되기도 해요. 이번 인터뷰도 ‘내가 이 주제를 다뤄도 될까?’ 고민했지만, 내 안의 진심을 솔직하게 꺼내는 건 늘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는 걸 믿기에 기꺼이 참여했어요.

사물을 탐구하고 감정을 정밀하게 살피는 과정이, 때로는 순수한 즐거움을 방해한 적은 없는지 궁금해요.

저는 알아가는 과정에서 지식이 쌓일 때 큰 쾌감을 느껴요. 오히려 차를 좋아하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레이어가 하나 더 생겨서 정말 좋아요. 세상을 걸러내는 그물망이 더 촘촘해지는 기분이랄까요? 예를 들어, 한 건축물을 볼 때 디자인적으로 예쁘다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역사를 알게 되면 깊이감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요. 예전의 저라면 가지 않았을 차 박물관을 찾아가는 것도 인생을 다채로운 면모로 바라보게 된 재미 중 하나고요. 이번 대만 여행을 준비할 때도 챗GPT에 “차와 문구로만 3박 4일 일정을 짜줘.”라고 주문했어요(웃음). 이전에는 주 관심사인 문구 위주로만 여행을 다녔겠지만, 이제는 문구와 차가 교차하는 일정이 짜이죠. 저는 무언가에 푹 빠진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부러워요. 새로운 필터로 세상을 보는 즐거움을 알기에, 계속해서 새로운 관심사를 탐색하며 제 일상을 풍성하게 채워가고 싶어요.

규림의 찻자리를 완성하는 곁들임

1. 명상용 기계, 붓다 머신

작고 투박한 기계는 단조로운 루프 음을 흘려보내며 차실의 공기를 순식간에 명상의 온도로 바꾼다. 복잡한 잡념을 지우고 싶을 때, 규림은 이 기계의 스위치를 켜고 고요를 즐긴다.

2. 책 《다도와 일본의 美》

민예 운동의 선구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100년 전에 쓴 책이지만, 규림은 이 안에서 지금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다. 유명 브랜드나 비싼 가격에 현혹되지 않고, 도구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을 길러주는 지침서.

3. 차 친구, 게와 코끼리 오브제

주로 혼자 차를 마시는 규림의 찻자리에는 귀여운 동료들이 함께한다. 진지한 다구들 사이에서 슬쩍 장난기를 보태는 게 모양의 오브제와 이국적인 색감의 코끼리 가네샤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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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황진아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