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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최상준 — 물터
공예가 예지와 상준은 어느 날 차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리를 잘 아는 상준이 고온에서 녹인 유리에 숨을 불어넣어 부풀리면, 금속을 공부한 예지는 그 안에 은빛 공을 가둔다. 옅은 옥색을 띠는 맑고 아름다운 도구들이 ‘물터’라는 이름으로 오른 찻자리. 안개를 닮은 잔에 두 사람이 차를 따르고 채우는 사이, 물터가 공예를 대하는 마음을 가만히 엿본다.
작업실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자기소개로 시작해 볼까요?
상준 안녕하세요. 브랜드 ‘물터’에서 블로잉 작업을 맡고 있는 최상준입니다.
예지 그 외의 것들을 모두 맡은 김예지입니다(웃음). 저는 블로잉 작업을 어시스턴트로 돕고, 블로잉 기법으로 제작한 유리 작품을 후가공해요. 디자인, 금속 작업, 기획, 촬영도 담당하고 있어요.
같은 대학에서 공예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세부 전공은 서로 다르다고 들었어요.
예지 저희가 다닌 대학은 금속, 유리, 도자 세 가지를 모두 배운 뒤 졸업 작품으로 선보일 전공을 선택해요. 저는 금속을, 상준이는 유리를 골랐어요. 금속을 선택하면 3D 프린팅, 옻칠 같은 다양한 기법을 작품에 접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거든요. 대학원 때도 3D 프린팅과 금속을 접합하는 작업을 했어요.
상준 저는 계속 블로잉 기법에 빠져 있었어요. 유리라는 재료가 너무 예뻤죠. 투명하게도, 불투명하게도 표현할 수 있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최근 서울에 작업실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예지 저희는 캠퍼스 커플로 만났는데요. 대학원 졸업 후에 저는 한 박물관 작업실에서 3년 동안 입주 작가로 생활했어요. 입주 기간이 끝날 시점이 가까워 왔고, 이참에 서울로 가면 좋겠다 싶어서 상준이랑 같이 오게 되었죠. 집은 서울 외곽에 두고, 서울과 청주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어요. 서울 작업실을 마련하고 새로운 기회와 만남이 많이 생겨서 재밌어요.
작업실을 서울에 두고 청주를 오가는 이유가 있나요?
예지 물터의 블로잉 작업은 청주에서, 후작업은 왕십리 작업실에서 진행하거든요. 블로잉은 유리를 녹이는 용해로가 필요한데,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되어야 해서 유지비가 많이 나와요. 그래서 청주에 있는 블로잉실을 대관해 쓰고 있어요. 2년 안에 물터 작업실에 블로잉실을 들이는 게 목표예요.
대학에서 만나 각자 작업을 이어오다, 어떻게 브랜드를 함께 시작했는지 들려주세요.
예지 저희 작업은 오브제성 아트라 갤러리를 통해 거래해야 하는 등 대중이 쉽게 접하고 구매하긴 어려웠어요. 수익을 낼 수 있는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개인 작업을 지속하는 체계를 만들고 싶었죠. 그렇게 유리가 주재료인 브랜드 물터를 구상했고, 유리 공예를 전공한 상준이랑 꼭 같이 하고 싶었어요.
상준 지금은 쉬고 있지만 물터를 시작하기 전에 유리 공예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유튜브도 해봤는데요. 혼자서 판매는 여러모로 어려웠고, 예지랑 같이 하는 브랜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어요. 예지의 제안에 물터를 같이 해보겠다고 했죠. 예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전시 기획이나 디자인을 잘해요. 저는 사람 만나길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웃음) 작업실에서 조용히 몰두하는 게 잘 맞고요. 완전히 다른 성향이 브랜드 운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어요.
본격적으로 브랜드를 함께 운영해 보니 어때요?
상준 예지와 대화할 거리가 많아졌어요. 일에 관한 이야기라도 둘 다 좋아하는 분야니까 재밌죠.
예지 오래된 연인은 대화 소재가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저희는 이야깃거리가 절대 안 떨어져요(웃음). “오늘 주문 들어왔어!”부터 “작품을 어떻게 바꾸면 좋겠다.”, “앞으로 이걸 해보자.”처럼 많은 이야기를 해요.
물터는 공예품과 차 도구를 만드는 브랜드죠. 소개를 해주세요.
예지 물터는 ‘사물과 찻물의 터’라는 뜻으로, 직접 제작한 테이블웨어와 차 도구를 선보이고 있어요. 두 가지 키워드인 ‘사물’과 ‘찻물’은, 각각 공예품 그리고 차와 함께 보내는 아름다운 시간을 뜻해요. 공예품은 공산품과 다른 매력이 있어요. 많은 분들이 물터를 통해 그 매력을 직접 손으로 느껴보셨으면 해요. 그리고 차를 우리고 음미하는 시간은 수고롭게 느껴지겠지만, 결국 나를 대접하는 일이잖아요. 물터를 만나는 분들이 그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길 바라요.
‘물터’라는 이름이 무척 아름다워요. 작품과도 잘 어울리고요.
예지 이름 후보를 메모장에 40-50개씩 적으며 고민했어요. 처음엔 ‘팅’처럼 귀여운 이름도 떠올렸는데요. 같은 이름의 브랜드가 이미 있어서, 기존 후보들을 모두 지우고 물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부터 다시 생각했어요. 그렇게 우리가 선보일 공예품을 ‘사물’이라는 단어로 정리하게 되었고, ‘사물과 찻물의 터’라는 지금의 슬로건이 나오게 됐죠.
브랜드의 중심에 차를 두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예지 저는 카페인에 약해서 카페에 가면 주로 차를 마시거나 연한 디카페인 커피를 주문하는 편이었어요. 그렇다고 차를 깊이 공부한 건 아니고, 그저 즐겨 마시는 정도였죠. 차를 브랜드 키워드로 삼게 된 계기는 대학원 시절 상준이와 떠난 파리 여행에서 ‘오가타’를 방문한 경험이었어요. 오가타는 이솝 도쿄 스토어를 설계한 디자이너 오가타 신이치로가 만든 라이프스타일 부티크예요. 한 건물 안에 지하는 티룸이자 시향 공간, 1층은 공예품을 전시한 갤러리, 2층은 다이닝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차가 궁금해 그곳을 찾았는데, 브랜딩이 무척 잘되어 있고 공간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저는 그동안 차를 다소 올드한 이미지로 생각해 왔는데, 오가타를 보고 차를 트렌디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한국의 오가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여행에서 돌아와 브랜드를 시작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지나왔어요?
예지 우선 차를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맥파이앤타이거’를 비롯한 여러 티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그 후로 티 소믈리에 자격증도 땄고요. 나중에 브랜드를 만들면 제가 일한 티룸과 협업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물터를 시작하고 맥파이앤타이거에서 기획하는 공예 전시 〈모난장〉에 매년 참가하게 되었죠. 개인 작업과 병행하다 보니 물터 시작까지 4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이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물터도 없었을 거예요.
차를 진심으로 대하려는 마음이 느껴져요. 그때 경험이 물터에 어떤 도움을 주나요?
예지 제품 디자인할 때 도움을 많이 받아요. 제가 근무했던 한 티룸은 입구가 좁고 몸통이 넓은 수구를 사용해서 얼음 넣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그때 ‘나는 나중에 입구가 넓은 수구를 만들어야지!’라고 다짐했죠(웃음). 찻물 절수, 출수에 좋은 디자인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요.
상준 씨는 이런 예지 씨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땠어요?
상준 예지와 이야기를 자주 나눴지만, 어떤 브랜드를 하려는지는 명확하게 모르고 있었고, 티룸 알바나 티 소믈리에 자격증도 차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물터에 대한 구상을 처음 듣고 나서 꽤 놀랐고, ‘예지가 이런 생각 때문에 그런 활동을 했구나.’ 싶었어요.
상준 씨가 차와 가까워진 과정도 들려주세요.
상준 사실 저는 차보다 커피를 좋아하던 사람인데요. 물터를 준비하면서 티룸을 정말 많이 다녔어요. 캐주얼한 분위기의 공간부터 다도 클래스까지 다양하게요. 지금은 집에서 찻자리도 하고요. 차가 주는 차분한 느낌이 좋아요.
물터의 작업물은 특이하게 금속과 유리가 결합되어 있어요. 대표적인 제품은 유리잔에 동그란 은이 박힌 ‘실버볼 시리즈’죠. 쉽지 않은 기법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완성했나요?
예지 유리, 금속 작가가 모였으니 두 재료를 단순 조합 하기보다, 완성도 높게 조화시키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선택한 재료 은은 색은 뽀얗고 예쁘지만 변색이 되는 아쉬움이 있었죠.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유리잔 홈에 은을 넣고 그 위에 유리와 가장 비슷한 재료로 한 번 더 코팅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변색도 줄이면서 접착성도 올라가고, 잔 씻을 때도 편하거든요. 이렇게 유리와 은을 결합하는 기법은 아마도 물터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평소 작업은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요.
예지 제가 먼저 제품을 디자인하면 상준이가 블로잉으로 샘플을 만들어요. 그다음 제가 후가공을 맡고요. 제가 “이 디자인대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상준이는 “안 된다.”고 하고, 저는 “된다.”고 하고요. 그러면 상준이는 또 안 된다고 하고…. 그런 대화가 자주 오가요(웃음).
끝내 구현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기도 하나요?
상준 결국 하다 보면 돼요(웃음). 예지가 원하는 디자인대로 거의 완성하고 있어요.
예지 상준이는 제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블로어예요. 정확하고, 빠르고, 진짜 잘해요.
최고의 칭찬이에요(웃음). 물터는 ‘차의 일상화’를 꿈꾼다고 들었어요. 차를 가까이 두는 일상을 어떻게 만들어 가려고 해요?
예지 보통 ‘차’ 하면 예절, 규범 같은 단어를 먼저 떠올리시는 것 같아요. 마실 때의 수고스러움도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차는 일상과 무척 친숙해요. 어릴 때 집에서 먹던 보리차도 차의 한 종류잖아요. 사람들이 차를 어렵게만 느끼는 게 아쉬웠고, 저희는 차를 일상에서 쉽게 마시도록 돕는 공예품을 만들고 있어요.
편안한 차 생활을 돕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요?
예지 도구 하나도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게 만들어요. 예를 들어 차를 우리고 내리려면 주전자, 개완 같은 여러 도구를 사용하고 또 조심히 옮겨야 하는데요. 물터의 대표적인 작업물인 ‘소프트 숙우(끓인 물을 알맞은 온도로 식히거나, 우려낸 차를 균일하게 섞기 위해 옮겨 담는 그릇)’는 티백을 넣어서 간편하게 우리고 따를 수 있어요. 찻잔도 술잔으로 쓸 수 있고요. 틀에 얽매이지 않아서 좋죠. 색도 튀지 않아 다른 도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요.
말씀하신 대로 물터는 옅은 옥색을 띠는 유리를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았어요.
예지 맞아요. 제가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지만, 다른 색 유리와 접합했을 때도 예쁘거든요.
상준 이 색을 기본으로 여러 색 유리를 녹이고 합치면서 초록빛, 푸른빛을 가미하기도 해요. 그렇게 만든 도구는 바닥 평을 맞춰 테이블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고요.
마시는 이를 생각해 차 도구에 불어넣는 디테일도 있나요?
상준 제가 느끼기엔 잔과 입술이 닿는 부분의 두께가 너무 얇으면 차를 마시는 데 방해가 돼요. 그래서 찻잔을 2-3밀리미터 정도로 두께감 있게 만들어 차가 조금 더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했어요. 출수 각도와 절수의 편리함과 더불어 그립감도 중요하게 생각해요. 여기 소프트 숙우는 가운데가 들어가 있죠? 최대한 손맛을 신경 써서 제작했어요.
예지 옆에 있는 잔처럼 불투명한 유리는 먼저 모래를 분사하는 ‘샌딩’ 작업을 거치는데요. 이 작업까지만 하면 잔에 지문이 잘 남고 촉감도 그리 좋지 않아요. 저희는 이걸 한 번 더 가공해서 지문이 잘 남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마무리해요.
이렇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차 도구가 찻자리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세요?
상준 시작부터 끝까지 한층 더 기분 좋은 찻자리를 즐길 수 있어요. 저희는 다른 작가님들의 공예품을 수집하기도 하지만, 주로 물터의 도구로 찻자리를 하는데요. 어떤 부분은 좋고, 어떤 점은 개선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니까 찻자리가 일의 연장선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럼에도 확실히 도구를 통해 좋은 기분을 얻어요.
물터는 단독 전시를 두 차례나 열었죠. 예지 씨가 직접 차회도 진행했다고요.
예지 전시 관람객들이 물터의 도구로 직접 차를 마셔볼 수 있도록 했어요. 공예품은 직접 써봐야 미감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많은 분들이 현장에서 구매를 결정하고, 차회에 온 분들이 물터에서 만나고 싶은 새로운 제품을 말씀해 주시기도 해요. 그때 나눈 이야기가 작업에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 제가 티 소믈리에 자격증도 있고 티룸에서 오래 일했다 보니까 차회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개인 작업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어 볼게요. 상준 씨의 ‘비어드맨’은 어떤 작품인가요?
상준 자화상 캐릭터 시리즈예요. 수염에 숨은 듯한 사람으로 숨기고 싶은 제 모습을 표현했어요. 블로잉으로 가공한 유리를 깎아서 패턴이나 표정을 만들죠. 물터 작업과는 정반대 느낌의 튀는 색을 사용하고 있어요. 물터가 일이라면 비어드맨은 취향 같은 느낌으로, 제가 실험하고 싶은 것들을 만들어 가고 있어요.
‘매지몽’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는 예지 씨 작업물도 소개해 볼까요?
예지 매지몽은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트 퍼니처로 만드는 작업이에요. 거울, 조명처럼 부피가 큰 작업물을 주로 만들죠. ‘상상’을 키워드로 ‘만약 ~라면’이라는 전제를 설정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스토리를 조형화한 작업이에요. 예를 들어 ‘만약 나만의 세상이 있다면 어떤 친구들이 살까?’를 주제로 캐릭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지금 앉아 있는 의자 밑에 곰팡이가 사는 지하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요.
개인 작업과 병행하면서 앞으로 물터를 어떻게 꾸려가고 싶나요?
예지 예전엔 티룸을 꾸려볼까도 생각했는데, 공예를 다루는 브랜드 정체성이 모호해질 것 같아요. 작업실을 키우고 물터가 제작하고 큐레이션한 물건으로 가득한 스테이를 열고 싶어요. 물터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요.
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박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