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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때 곁을 내어주고 대가 없는 도움을 나누며, 같은 꿈을 꾸는 사이. 가족이나 친구라고 이름 붙이긴 아쉬워 입술이 달싹인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그냥 사랑이라 불러보기로 한다.
인생을 헤매고 있을 때 곁에 서 있어 줄 이가 있다면 누구든 쉽게 스러지지 않을 테다. 중섭에게 상은 그런 존재였다. 작품 ‘황소’를 대표작으로 둔 근대 화가 이중섭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일본 유학 중 아내 마사코를 만나 사랑스러운 아들 태성과 태현을 낳았지만, 전쟁은 가족을 가난으로 몰아넣었다. 생계가 몹시 어려워지자, 중섭은 아내와 아들 둘을 잠시 일본으로 보내야만 했다. 홀로 한국에서 씩씩하게 살아보려 했으나 풍파는 가장을 삼키고 삼켰다. 그림을 사 간 사람에게 값을 받지 못하거나, 작품을 빼돌림 당하는 일이 수차례였다.
무너지는 삶을 붙잡고 그가 향한 곳은 시인 구상의 집. 상은 ‘초토의 시’로 알려진 중섭의 절친한 벗이다. 본래 가난과 외로움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했던가. 그럼에도 중섭이 상의 집 문을 두드릴 수 있었던 건 그가 곁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였기 때문이었을 테다. 중섭은 한 해 반 동안 상의 아내, 그의 두 아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살았다. 벗의 아이를 바라볼 때 중섭의 눈에는 태성과 태현이 비쳤을지 모른다. 그 눈빛에 어린 마음을 상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중섭이 그들과 함께한 세월은 그림 ‘시인 구상의 가족’에 담겼다. 상이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던 날을 그린 작품이다. 일본으로 부친 편지엔 누차 자전거를 사주겠노라 적어놓았건만, 도통 가까워지지 않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중섭은 아릿한 미소를 삼켰을 것이다. 상 또한 그가 가장 힘들 때 친구를 찾았다. 폐결핵으로 폐를 잘라낸 시인은 병상에서 중섭이 올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중섭이 도통 병문안을 오지 않자 사랑하는 만큼 야속함도 커졌다.
끝내 얼굴을 비친 벗에 화와 서운함이 뒤섞인 감정을 내비치자, 중섭은 그림 한 장을 내밀었다. 먹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천도복숭아 그림이었다. 병문안으로 과일이라도 사 오려 했으나 그럴 형편이 못 되어 선물을 대신 그려 오느라 늦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상이 죽는 날까지 작품은 액자에 담겨 서재 벽에 걸렸다.
미술계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반려견이 주는 무한한 환영과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안다. 갈색 소시지를 닮은, 천방지축 닥스훈트 두 마리가 그 기쁨을 알려준 작은 천사들이다. 호크니의 50번째 생일부로 그의 집에 들어선 스탠리Stanley와 부지Boodge는 늘 거장의 곁에 있었다. 두 마리 개는 언제나 주인과 함께 밖을 나섰고, 함께 잠들었다. 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선 감출 수 없는 호크니의 애정이 엿보인다. 등을 따뜻하게 쓰다듬는 손, 눈높이를 맞추려고 굽힌 무릎에서는 틀림없이 사랑이 흐른다.
평소 호크니의 곁에는 영감을 교류하는 예술가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1990년대 에이즈로 친구 넷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큰 상실감에 빠졌다. 결정적으로 절친한 친구인 큐레이터 헨리 겔트잘러까지 그의 곁을 떠나니, 호크니는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그가 회복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사랑하는 존재를 그리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와 교감하는 스탠리와 부지가 작품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이전에도 두 친구를 종종 그려왔지만, 그들을 본격적으로 담게 된 것은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계기였다. 비록 벗들은 별이 됐지만, 가족 그 이상의 관계가 된 귀여운 말썽꾸러기들은 그림에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호크니는 애정 어린 시선이 담긴 작업물을 전시로 공개했고, 훗날 그림책 《Dog Days》를 출간하기에 이른다. 포근한 방석 위 잠을 자거나 그리는 이를 응시하는 닥스훈트의 모습이 책을 가득 채웠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호크니는 집 이곳저곳에 붓과 물감을 두고, 스탠리와 부지가 움직이지 않을 때 관찰해 빠르게 작업을 마쳐야 했다. 새근새근 잠든 스탠리의 호흡과 부지의 윤나는 검정 코를 살피며 호크니는 사랑을 읽었을 것만 같다. 그는 그림의 주제는 개가 아니라 작은 존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고 회고한다.
흐르는 선율에 뜨거운 애정과 존경을 담은 이들이 있다. 한국에서 첼로 신동으로 이름을 알리던 한나의 연주가 거장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에게 가닿은 건 한나가 겨우 아홉 살 무렵일 때. 작은 소녀가 표현하는 음악에 마이스키는 강하게 이끌렸고, 그를 자신의 마스터 클래스에 초대한다.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앞에 선 작은 아이에게 마이스키는 모든 걸 알려주고 싶었다. 야망이나 질투 섞인 마음으로는 불가능했을 일이며,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스승과 제자를 단단히 묶었다. 마이스키는 움튼 싹을 살피고 다루듯 어린 한나를 가르쳤다.
거장은 첼로 다루는 법을 넘어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알려줬다. 그는 음표 하나하나에 담긴 작곡가의 혼을 헤아리고 해석하는 마음으로 악보를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승을 닮아 고집스럽게 악보의 의도를 파고든 한나의 연주는 세계 곳곳에서 울렸다. 마이스키는 명망 높은 첼로 연주자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각자가 있는 곳에서 음악을 사랑했다.
20대가 된 한나는 연주자가 아닌,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실력이 출중한 첼리스트였기에 마이스키는 제자의 전향이 못내 아쉬웠지만, 늘 그래 왔듯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지휘를 시작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협연자로 무대에 올랐다. 과거 스승의 말에 귀 기울였을 한나는 연주자 마이스키가 흘려보내는 선율을 듣고 지휘했다. 어린 한나의 선율을 살폈을 스승은 젊은 지휘자의 손끝에 시선을 두며, 한나가 이끄는 흐름대로 무대를 가득 채웠다. 그들이 마주 보며 나눴을 교감, 연주가 끝나고 마주 잡은 손과 같은 뜨거운 것들을 헤아려 본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를 언제나 지지해 주는 관계. 이 애틋한 인연은 가족이라는 말보다 좀더 특별하다. 나에게도 그와 같은 존재가 없나 샘이 날 때쯤 다양한 모양의 관계를 맺은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을 부를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역시나 사랑인 것 같다.
에디터 차의진
일러스트 세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