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양유미·이창협 ㅡ 이쁜꽃
유미와 창협은 첫눈에 반했다. 사려 깊은 술 한잔을 나누면서 가까워진 둘은 ‘사랑과 용기’라는 슬로건의 양조 브랜드 ‘이쁜꽃’을 열고 쌀알을 어루만지며 곡주를 만든다. 그들의 술이 특별한 이유는 한 병에 담긴 사랑이 두 사람 자리에서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정성을 담은 술을 나눠 마시는 이름 모를 누군가, 사랑과 용기를 품은 일상 속 영웅들 그리고 두 사람의 마음에 태양을 띄운 두 살 리사에게까지, 사랑은 용기 넘치는 자태로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리사가 마중 나와 있네요. 리사야, 안녕? 만나서 반가워.
(리사는 부끄러운 듯 웃기만 한다.)
유미 곧 낮잠 시간이라 졸음이 쏟아질 때인데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창협 리사야, 인사해 봐. 리사는 몇 살이에요?
(손가락 두 개를 편다. 귀여운 모습에 일동 웃음을 터뜨린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리사의 낮잠 시간인 걸 보니 하루를 일찍 시작했겠어요.
유미 요새는 아침 6시에 일어날 때도 있는걸요. 지금 리사가 졸려서 이마가 따끈따끈한데,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고 엄마 아빠가 여기 있으니 잠들 거 같진 않네요. 아무래도 인터뷰할 때도 저희가 리사를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럼요. 편하게 해주세요. 먼저 가족 소개를 해볼까요?
창협 저는 직장인이자 양조사 양유미의 남편이고, 자유로운 음주 생활을 응원하는 ‘사케 요정’… 이창협입니다. 저를 부를 때 사케 요정이라는 닉네임을 쓰는데 직접 말하려니 영 부끄럽네요. 자의식 과잉 같기도 하고요.
유미 자기가 제일 많이 말하면서(웃음). 저는 가장 동시대적인 주류 회사 ‘이쁜꽃’을 이끄는 양유미입니다. 앞서 인사 나눈 리사는 저희 딸이고 두 살이에요. 처음엔 약간 부끄러워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말을 많이 할 거예요. 요즘은 고양이와 보들보들한 촉감을 가진 물건을 특히 좋아해요.
다시 한번 세 식구를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양조는 지금 잠시 멈춘 상태죠.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창협 평일에는 출근을 해야 하니 보통 6시쯤 일어나요. 7시 전에 나가는데, 제가 준비하는 소리에 리사가 깨지 않으면 유미 님이 좀더 잘 수 있죠.
유미 저는 리사와 함께 일어나서 남편이 출근하면 아이를 근처에 사시는 부모님 댁에 맡기고 운동도 하고 일도 해요. 말씀하신 대로 양조 파트를 정리 중이라 이전만큼 바쁘지는 않지만 회사 구조를 바꾸는 일에도 꽤 큰 에너지가 필요하더라고요. 생산보다 기획이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구조를 옮기고 있고, 양조는 제 체력을 회복한 뒤에 다시 하려고요.
건강이 많이 안 좋았나 봐요.
유미 연말연시에 심각하게 나빠졌어요. 지금까지 이룬 것들 다 끌어안고 갈 것도 아닌데, 죽으면 전부 무슨 소용인가 싶을 정도였죠. 느리게 가더라도 건강을 되찾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려고요.
유미 씨는 이전에 《AROUND》에서 양조 이야기를 나눠주신 적 있죠. 두 분의 인연이 어라운드로 시작되었다고 해서, 어떤 이야기인지 무척 궁금했어요.
유미 아마 2017년도쯤 제가 속해 있던 ‘곰세마리 양조장’을 소개하기 위해 인터뷰를 했어요. 무역 회사를 오랫동안 다니고 술을 좋아하는 이 과장, 그러니까 창협 님이 우연히 그 기사를 본 거죠. 한국의 양조장과 꿀술을 흥미롭게 생각해서 사 먹기 시작했대요.
창협 원래도 이것저것 술을 마셔보긴 했는데, 와인과 위스키를 지나서 한국 술에도 관심이 생길 때였어요. 곰세마리 양조장의 꿀술이 구하기 힘들었는데, 백화점에서 처음 보고 한 번에 열 병을 사버렸죠. 개인이 소비하기에는 꽤 많은 양이긴 해요. 근데 그중에서 여덟 병이 터져버린 거예요.
어머나!
창협 열처리를 하지 않은 술은 터지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술을 좀 아는 사람이니까 이게 제조가 아니라 유통상의 문제일 수도 있어서 구매처에 말했죠. 그랬더니 제조사인 양조장에서 직접 해결해 줄 거라며 유미 님을 연결해 준 거예요. 유통사 잘못을 왜 제조자에게 떠넘기는지 이해되지 않고, 그저 소상공인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유통사와 이야기하겠다며 버텼어요.
유미 그때는 약간…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왜냐면 우리는 작은 규모의 회사였기 때문에 대형 유통망을 타보는 것도 처음이고, 컴플레인 책임 소재를 넘기기엔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상해서 나를 골탕 먹이는 건가 싶었죠. 그렇게 전화 통화로 처음 인연이 닿았던 거예요.
어라운드를 보고 만난 로맨틱함을 상상했는데, 굉장히 강렬한 첫인상이네요….
유미 그래서 고객 중에서도 일명 ‘VIP’로 분류해 두었어요. 제가 모든 고객을 응대했기에 창협 님과도 자주 소통하게 됐죠.
창협 그러다가 다니던 회사에서 양조를 다루는 프로젝트 팀이 꾸려졌어요. 한국에서 재배된 쌀로 일본식 청주를 만들어보자는 내용이었죠. 재료와 제조 과정, 실행까지 잘 마쳤는데 투자와 사업화 방식에 대한 검토가 필요했고, 양조장을 운영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그때 바로 유미 님이 떠올라서 연락했는데 흔쾌히 수락해서 회사 사람들과의 미팅 자리가 만들어졌어요.
그럼 서로를 직접 본 건 그때가 처음이겠네요. VIP 고객을 만나보니 어떻던가요?
유미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만들던 술이 되게 비싼 편인데 항상 대량으로 구매했고, 주소가 을지로의 무역 회사다 보니까 중년 남성이나 나이가 지긋한 사장님을 떠올렸거든요. 그런데 작고 귀여운 사람이 나온 거죠. 저보다 동생인 줄 알았어요.
창협 놀란 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만나자마자 에어컨 고장 났는데 괜찮냐며, 슬리퍼에 편한 옷 입고 털레털레 걸어 나오더라고요. 저는 상사들과 격식 있는 미팅을 주로 하니까 그 모습이 조금 의아했어요. 알고 보니 양조는 몸 쓰는 일이 많아서 편한 옷을 입어야 한대요. 그날 조언도 얻고 친해졌죠.
창협 씨가 쓰신 책 《이 과장의 퇴근주》에 뒷이야기도 나와 있더라고요. 회사 프로젝트는 무산됐지만 유미 씨가 먼저 창협 씨한테 연락하셨다고요.
창협 어느 날, 퇴근 마치고 집에 왔는데 둘이서 술을 마시자고 연락이 온 거예요. 여럿이는 만났지만 둘이서는 처음이었죠. 저는 사실… 어라운드에 실린 사진을 보고 이미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상태였어요.
(일동 웃음을 터뜨린다.)
유미 저는 제가 먼저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때 왜 만나자고 했냐면 굉장히 괴로운 상황이었어요. 늘 그랬듯이 손님들과 브랜드에 대해 좋은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회사에서는 이미 제가 나가기로 결정되어 있었거든요. 마음이 문드러질 것 같은 와중에 창협 님은 이 술이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해서만 한참 말하고요. 얼른 만나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어요.
두 분이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어요?
리사 (방에서 고개를 내밀며) 이리로 와줘!
창협 그래, 아빠가 갈게.
리사 아냐, 아빠 말고! 아빠 말고!
유미 (웃음) 잠깐 다녀올게요.
창협 근처에 자주 가던 조그만 이자카야에서 만났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많이 힘들어 보여서 기운을 북돋아 줄 술 한잔을 사고 싶더라고요. 음식점 사장님이 한국 생활을 오래 한 일본인이셨는데, 가게 한편에 고구마소주 ‘마오魔王(마왕)’가 있었어요. 그걸 달라고 해서 유미 님과 나눠 마셨죠. 마침 집에 한 병 있을 텐데, 한 잔 따라 드릴게요. 향을 맡아 보세요.
굉장히 진하면서 달큰한 과일 향도 느껴지네요.
창협 그렇죠? 일본의 고구마소주 중에서도 3대 명주로 손꼽히는데 향이 프루티하면서도 우아해요. 목 넘김은 투명하고 상쾌하고요. 유미 님은 이 술을 마셔보곤 “아주 차가운 검은 돌멩이를 입에 머금은 것 같다.”고 표현했어요. 그것도 표면이 매끈하고 단단한 짱돌 같다는데, 참 남다르다고 생각했죠.
유미 그때까지만 해도 꿀술만 만들 줄 알았어요. 은은하면서도 사려 깊은 맛은 꿀술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한 잔을 마셔보고는 곡주로도 제가 지향하는 기품 있는 맛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다양한 영역에 상상 이상의 맛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던 그때가 막걸리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던 시기이기도 해요. 창협 님과도 자연스레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가까워졌고요.
《이 과장의 퇴근주》에서 유미 씨는 창협 씨를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요. 어떤 의미예요?
유미 창협 님은 언제나 좋아하는 게 있어요. 저는 좋음을 느끼는 역치가 높은 사람이라, 좋다고 말할 만한 게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무언가 좋아지면 그게 왜 좋은지 탐구하는 게 기본자세더라고요. 골똘히 고민한 걸 언어로 풀어내는 것도 좋아하고요. 저는 어떤 개념에 대해서 딱 맞는 표현이나 설명을 들었을 때 엄청난 쾌감을 느껴요. 속이 시원한 느낌 있잖아요. 제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개념도 잘 표현해 보고 싶어서 단어들을 이리저리 만져보는데, 창협 님은 그걸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인 거죠. 그래서 같이 대화하면 언제나 재밌고 짜릿했어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라는 뜻도 될까요?
유미 맞아요. 밖에서 다 들여다보이는 유리 집에 사는 사람 같아요. 다들 그러실진 모르겠지만, 관심 가는 사람이 생기면 SNS를 들여다보게 되잖아요. 저도 페이스북에서 창협 님을 열심히 검색해 봤는데, 아주 옛날부터 솔직하게 글을 써왔더라고요. 표현 하나도 뾰족하게 쓰려고 애쓰다 보니까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것 같아요. 속내가 다 보이는 대신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요.
창협 저를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무언가에 쉽게 몰두하는 모습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나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좋게 봐주는 사이네요.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해져요.
유미 음,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처음 봤을 때 향수도 안 뿌렸는데 좋은 냄새가 나더라고요. 저는 향을 믿거든요. 내가 의도할 수 없는 영역에서 향에 대한 호불호가 결정되는데, 그 냄새가 좋게 느껴진다면 유전자 단위에서 결혼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웃음). 둘째는, 항상 구두가 깨끗했다는 거예요. 8년이나 신은 오래된 신발을 새것처럼 관리하는 모습에서 확신했죠. 말하다 보니 한 가지가 더 떠오르는데 학생 때는 국밥도 잘 먹고, 고급 다이닝에서도 즐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기도 하고, 살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이 다양할 테니까요. 창협 님이 딱 맞는 사람이었죠.
창협 우리가 결혼을 하게 만든 공통의 사건도 있었어요. 한번은 오키나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슈리 성에 놀러 간 적 있는데, 앞에 세라교복을 입은 긴 머리 학생이 서 있더라고요. 그 근처를 지나가니까 학생이 뒤를 돌아보는데 수염이 난 중년 아저씨였죠. 순간… 저와 유미 님이 눈으로 대화를 나눴어요.
유미 ‘이 사람을 불쾌하게 하지 말자.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이런 대화를 한 거죠. 우리 둘은 마음속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긴급한 상황에서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저희는 우스갯소리로 그분을 결혼의 요정이라고 불러요.
오늘 대화에 다양한 요정이 등장하네요. 서로 꼭 마음에 들어서 결혼했는데, 같이 살아보니 어떤가요?
창협 자주 만나니까 이럴 바에는 같이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살면 서로 집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 같아요(웃음). 유미 님은 결혼 초반에 자꾸 자기가 집에 가야 될 것 같다고 하는 거예요.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불편하다고 거실에 나가서 자고, 급기야 나중에는 본집에서 자고 와도 되겠냐고 물어보고요.
유미 내 것이었던 걸 자꾸 나누는 게 영 익숙해지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 다양한 걸 좋아하고 좋아하는 걸 오래 고민하는 사람이라 끌렸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뾰족한 사람이라는 뜻도 되더라고요. 저는 무던한 편이라 창협 님이 예민함을 드러낼 때마다 꾹 참았어요.
창협 연애 때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살면서 맞춰야 할 부분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고요. 예를 들면 같이 술을 마시고 잠들기 전에 저는 꼭 설거지를 마치고 싶거든요. 근데 유미 님은 하지 말고 같이 쉬자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술 마실 때도 꼭 따라줘야 해요.
유미 씨에게 이유를 한번 물어볼까요?
유미 남이 따라줘야 맛있는 게 있잖아요(웃음).
창협 그래 놓고 나는 꼭 안 따라줘.
유미 결혼에 대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래된 에세이에서 읽은 말을 꺼내두고 싶네요. “좋을 땐 아주 좋고, 나쁠 땐 아주 나쁘다.”
(웃음) 이쁜꽃이 시작된 것도 결혼 즈음이잖아요.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게 있었던 걸까요?
유미 음주 생활만큼은 사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문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주류 시장이 소주와 맥주로만 양분되어 있었고, 회식 문화 때문에 원치 않아도 집단 음주를 해야 했잖아요. 술만큼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나답게 마실 수 있길 바랐던 거죠. 물론 팬데믹으로 인해 제가 기대한 문화가 생각보다 빠르게 도래한 것 같아요. 오히려 이제는 사람들이 다양성을 따분해하는 단계까지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새롭게 고민해 보고 있어요.
서 있는 곳은 달라도 언제나 양조를 가까이에 두는 걸 보니, 유미 씨가 술뿐만 아니라 양조를 참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미 양조를 하다 보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이 떠올라요. 만다라는 모래로 그림을 그리고 완성하면 날려버리잖아요. 곡주는 쌀알을 잘 보살펴야 하는데, 만약 과정에서 누락된 쌀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 때문에 전체의 맛이 바뀌어버려요. 온 마음을 모아 쌀알을 다스린 후에 완성된 술 한 병은 마시는 것과 동시에 사라져버리죠. 곡주는 다른 술보다 만드는 과정이 백배는 더 힘들지만 이런 과정에서 보람을 느껴요.
이쁜꽃의 술은 ‘됫병’이라고 부를 정도로 용량이 많은 편이죠.
유미 여럿이서 함께 마실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길 바랐어요. 제가 혼자 술 마시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요. 크기가 큰 것 외에도, 너무 압도적인 캐릭터를 내세우거나 만든 사람이 얼마나 고생해서 만들었는지를 강조하고 싶진 않았어요. 술 자체를 매력적으로 보여준다면 자연히 사람들이 연결될 테고, 술 문화에서 배제되던 이들도 모일 수 있겠죠. 예를 들어, 엄마라는 존재처럼요. 술 문화의 중심에 한 가지 성별만 보이는 모습도 깨고 싶었어요.
‘사랑과 용기’라는 이쁜꽃의 슬로건이 떠오르네요. 보통은 중요하게 지키고 싶은 의미를 슬로건에 담는데, 이쁜꽃도 그런가요?
유미 ‘사랑과 용기’ 이전에는 ‘Love, Faith, Fantasy’라는 말을 썼어요. 무엇이든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서 사람들이 섬처럼 변해가잖아요. 흩어진 존재들을 연결하기 위해선 상투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필요했죠. 그래서 사랑과 믿음, 환상이 술에 담겨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술은 사랑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고, 술을 마시며 하는 건배는 과거에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는 용도로 쓰였대요. 세게 부딪치면서 술이 섞이니까 잔에 독을 타지 못하거든요. 그리고 술은 어느 정도의 동경과 환상을 끌어올리고요.
창협 ‘사랑과 용기’라는 말은 이후에 좀더 즉흥적으로 나왔어요. 한때 일본 동요 대회에서 2등인 ‘노노카짱’이 인터넷에서 유명했어요. 그래서 1등은 누굴까 찾아보니 ‘사랑과 동료’라는 노래를 불렀더라고요. 근데 제가 어이없게 ‘사랑과 용기’로 들은 거예요. 두 단어가 톱니바퀴 맞물리듯 굴러가는 느낌이라 새로운 술의 이름으로 붙이고 슬로건처럼 자주 말하게 됐죠.
동명의 막걸리는 ‘신신예식장’을 운영하시던 故 백낙삼 대표님과 최필순 여사님께서 홍보에 함께해 주셨죠. (신신예식장은 생계가 어려운 부부들을 위해 1만 6천 쌍 이상의 결혼식을 무료로 진행했다. 현재는 아드님이 이어받아 운영 중이다.) 술을 한 잔씩 나눠 드시는 두 분이 애틋해 보였어요.
창협 선생님과 여사님은 사랑하는 이들이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일을 하셨잖아요. 두 분의 철학과 일생이 이쁜꽃이 만들어갈 이야기에도 깃들길 바라면서, 찾아뵙고 영상으로 남겨두었죠. 선생님이 아내분을 엄청 사랑하셨던 게 떠올라요. 아이를 바라보듯 시선이 따라가며 아내를 먼저 챙기셨죠.
유미 찾아뵐 때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갑자기 별세 소식을 들어서 너무 슬펐어요. 시간이 지난 후에 여사님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도, 선생님이 자기를 얼마나 예뻐해 줬는지 한참을 얘기하시더라고요. 대표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신신예식장을 돕고 싶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면서 다시 북적이는 곳이 되었죠.
사람 사이를 잇는 사랑과 용기를 또 한 번 느꼈겠어요. 어느 대화에서 유미 씨가 “술을 만드는 건 사람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던 게 떠올라요.
유미 생존에 필요한 것을 제외한 영역은 언어로 귀결된다고 느껴요. 술도 그렇지 않을까요? 술에 대한 심상을 표현하고자 할 때 각자의 언어 세계에서 완성되겠죠. 만드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의 언어가 있고,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마다 구축한 세계가 전부 다를 테고요. 그 언어에서 비롯된 다양한 관점을 통해 나의 경험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잉여 문화의 역할이라고도 생각하고요.
창협 혼자 마실 때도 마찬가지예요. 혼자 먹는 사람들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이야기를 만드는 매개가 바로 술인가 봐요.
브랜드를 차근차근 꾸려가던 시기에 육아도 시작됐죠? 출산 전후로도 바쁘게 일했다고 알고 있어요.
유미 정말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출산 전날까지 일하고 제왕 절개 마취에서 깨자마자 업무 전화를 받기도 했어요. 아기를 낳고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나중에는 그 모습을 대단하게 바라보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무척 후회하고 있고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충분한 회복이 필요한 시기니까요. 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어요? 둘 사이에 제3의 존재가 등장한 거잖아요.
유미 힘들고 바쁜데도 아이를 보면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마음에 태양이 항상 떠 있는 것 같았어요. 아이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이 이해가 되기도 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어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죠(웃음).
유미 씨는 “리사가 건강한 음주 문화가 정착한 세상에서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브랜드를 꾸리고, 창협 씨는 “리사가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쓰지 않겠다.”라고 책에 기록해 두었어요. 부부의 현재에서 리사의 미래를 배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졌어요.
창협 리사가 이런 집에 태어나버렸잖아요. 엄마는 술을 빚는 사람이고, 아빠는 술 이야기를 쓰고 말하는 사람이니까요. 아마 리사가 크는 과정에서 이른 시점에 자연스럽게 술이라는 액체를 접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저희는 술을 좋아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면서 과용의 부정적인 점도 많은 액체예요. 리사가 자신도 술을 좋아할지, 말지를 결정할 땐 스스로 기준을 갖추길 바라면서 모든 행동에 리사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희는 리사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되어도 괜찮아요.
혼자일 때와 비교하면 세 식구가 되면서 달라진 점이 있어요?
유미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죠(웃음).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감각이나 의미를 날카롭게 벼르는 걸 반복해 왔는데, 요즘에는 조금 무뎌졌어요. 내가 추구하고 싶은 지점이 어딘지는 알아도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변수가 늘어났거든요. 혼자였다면 금방 끝낼 일들인데도요. 어떤 때는 이런 부분이 아쉽기도 한데, 지금 나의 상황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와는 조금 다른 역할이 주어진 거라고 받아들이려고요.
다양한 역할을 함께 해내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듣고 싶어요.
창협 저희 사이에 가림막을 세워 두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요(웃음). 음, 저는 제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 같아요.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기보다 내 마음에 집중하기도 하고요. 어릴 때 일본에서 살다 온 것 때문에, 뉘앙스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가 없도록 말이나 글을 분명히 전하고 싶어서 지나치게 날카로워질 때가 있어요. 유미 님은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뾰족함을 둥글게 다듬어주는 사람이에요. 시야를 넓혀줘서 도움도 되고 고맙고, 또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유미 저에게 창협 님은 본인의 이름 같아요. ‘창협’이라는 말에 파열음이 많잖아요. 이 사람을 생각하면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쾌快’라는 글자가 떠올라요. 저에게 상쾌한 바람을 불어주는 사람인가 봐요.
뭉근한 사랑이 느껴지는데요. 부부의 쉬는 시간이 생길 땐 무얼 하세요?
유미 리사가 잠들면 창협 님이랑 수다를 엄청 떨어요. 별거 없이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 하나만 틀어놔도 할 이야기가 많거든요.
창협 요즘에는 날이 더워지니까 저렴한 화이트 와인을 얼음 잔에 콸콸 부어서 마시기도 해요. 이국적인 느낌도 나고, 음료수처럼 편하게 마시기 좋아요.
리사가 커서 두 분과 술 한잔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어떤 기분일까요?
창협 저는 너무 좋을 것 같은데요? 오랫동안 간직한 꿈이 있거든요. 리사가 밖에서 친구들이랑 술 먹고 집에 와서, 저한테 칵테일을 한 잔 말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척척 만들어주면 한 입 먹고는 “역시 아빠가 만든 게 최고야!”라고 하는 거죠.
유미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요.
창협 그래도 언제나 그날을 꿈꿉니다!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