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로 쓰는 우리의 기록

임유청·김재기 — 아침에사과

재기와 유청은 독특한 의식으로 하루를 연다. 한 사람이 사과를 깎으면 다른 이가 먹는 것. 특별한 건 없다고? 테이블에 놓인 접시를 보자. 얇게 썰린 과육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펼쳐지고, 레고 블록 같은 조각이 탑을 이룬다. 건축사 재기의 손에서 탄생한 사과 한 접시는 영화 전문 도서 편집자 유청의 사진첩에 담겼다. SNS에 3년간 쌓은 기록은 한 권의 책으로도 탄생했다지. 사과 다섯 알을 들고 이들을 찾았다. 향긋한 내음 폴폴 나고 아삭한 소리가 연신 들리는, 그런 대화였다.

이웃집 공사로 소음이 심할 수 있다고 연락하셨죠. 지금은 조용하네요? 

유청 아파트 로비에 공사 안내문이 붙었길래 인터뷰하기 괜찮을까 싶었어요(웃음). 오전에 잠깐 시끄럽다가 지금은 잠잠하네요. 

 

다행이에요. 들어오자마자 집 곳곳에 시선이 가요. 어떻게 여기서 지내게 됐어요? 

유청 출퇴근길에 늘 이곳 독립문 근처를 지나갔는데 매번 이상한 아파트가 눈에 띄는 거예요. 신기하게만 여기다가 집 구할 때 마침 매물이 나온 걸 알게 됐죠. 구경이나 가볼까 하고 왔다가 우리 집이 되었네요. 

재기 전망도 볕도 좋은 곳이에요. 지은 지는 50년이 넘었대요. 

 

와, 그렇게 오래되었나요? 

재기 네. 1970년대에 지어졌어요. 초기 아파트 특징인데, 거실 중앙에 기둥이 있어요. 저 위에 관도 보이세요? 라디에이터 관이에요. 윗집 분들은 아직도 라디에이터를 써요. 

유청 전 집주인은 여기서 40년을 살았대요. 처음 구경할 땐 너무 낡았나 싶었지만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서 내부를 다 고치고 입주했어요. 

 

여기는 두 분의 기록 프로젝트 ‘아침에사과’가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해요. 재기 씨가 재밌는 모양으로 사과를 깎으면, 유청 씨가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죠. 

재기 20대부터 어머니가 종종 사과를 상자로 보내주셔서 사과 먹는 습관이 생겼어요. 유청 씨를 만나고 나서는 같이 먹고 싶은 마음에 제가 깎아주기 시작했는데요. 혼자 먹을 때는 숭덩숭덩 자르던 걸 색다르게 깎아봤죠. 유청 씨 반응이 좋아서 지금까지 꾸준히 하게 됐고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그렇게 먹어요. 

유청 처음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신기하다.’ 했던 기억이 나요. 사과로 흔히 토끼 모양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재기 씨는 블록을 만들어서 조형을 하더라고요. 기록을 한눈에 모아 보고 싶어서 3년 전부터 사진을 올렸어요. 

 

유청 씨가 재기 씨를 ‘사과 장인’이라고 부르던데요. 모양은 어떻게 내는 건가요? 

재기 단계별로 자르는 법을 결정해요. 사과를 절반으로 나눈 다음 다시 4분의 1 크기로 자를지 말지, 씨 있는 부분을 파낼지 말지, 수평으로 자를지 아니면 특정한 각도대로 자를지 정하죠. 그렇게 나온 조각들을 조합하는 거예요. 

 

여러 번의 선택이 형태를 정하는군요. 

재기 초반에는 얼굴 모양으로도 만들어봤는데요.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지금처럼 여러 조각을 내서 조합하는 방식이 가장 편하고 예쁘다는 걸 알게 됐죠. 아침에 산책하거나 수영할 때 오늘은 어떻게 잘라볼까 떠올릴 때도 있어요. 막상 자를 땐 다르게 자르지만요(웃음)

 

그날 먹을 사과는 어떻게 고르세요?

재기 제철 사과를 선택해요. 아오리, 시나노골드, 부사, 홍로…. 계절마다 다양한 사과를 만날 수 있죠. 저는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까 맛있는 것보다 외양이 재밌는 종류가 점점 더 눈에 들어와요. 초록색인 아오리와 시나노골드가 제일 인상적이에요. 

유청 사과마다 맛이 달라요. 시나노골드는 샴페인처럼 부드러운 느낌이라면, 감홍은 과육이 단단하고 단맛과 신맛 모두 강해요. 종류마다 다른 특징을 살피는 일이 재미있어요. 

 

견과류나 다른 과일이 접시에 오르기도 하던데요.

재기 다른 재료를 사용할 때 읽히는 효과가 좋았어요. ‘요즘은 땅콩을 먹으니 조금 올려볼까?’ 하면서 시도해 보는 거예요. 영양제를 곁들인 적도 있어요(웃음). 멜론이나 수박, 감 같은 제철 과일도 종종 먹고요.

한 접시가 완성되는 동안 유청 씨는 무얼 하며 아침을 보내세요? 

유청 요즘은 일어나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요. 둘 다 집에서 일하거든요. 앉아 있으면 재기 씨가 아침 먹자고 사과를 가져와요. 그럼 테이블 위에서 사진을 찍고 먹죠. 전에 회사를 다닐 때는 출근 버스에서 포스팅을 했는데 이제는 잠시 쉴 때 올리고 있어요. 

 

게시물과 함께 글도 올리죠? 

유청 네. 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나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걸 써요. 재기 씨는 매사에 단순하게 접근하는 사람이라 사과를 깎아서 저한테 주는 것 말고는 별다른 목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침에사과 계정을 만든다고 했을 때도 갸우뚱하더라고요. 내가 보려고 만드는 거라고는 했지만 처음엔 뭘 써야 할지 몰랐어요. 그러다 곧 내 일상을 자연스럽게 적게 되었고요. 

 

요즘은 수영이나 영화 이야기가 많아요.

유청 맞아요. 작년부터 아침 수영을 하고 있는데 정말 재밌어요. 수영장 가기는 너무 힘들지만요. ‘오늘은 진짜 관둬야지.’ 하면서 집을 나서면 ‘역시 수영이 최고다!’ 하면서 돌아오게 돼요(웃음). 영화 이야기도 종종 쓰는 건 몰랐네요. 그 계정에도 영화 보는 생활이 녹아드나 봐요. 

 

그러게요. 유청 씨는 영화 전문 도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죠?

유청 네. 블루레이 전문 제작사 ‘플레인아카이브’에서 오랫동안 각본집을 기획했고, 퇴사 후에도 함께 일하고 있어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 공식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 《소울메이트 메이킹 다이어리》 같은 책을 만들었네요. 지금은 ‘협업과 목련’이라는 텍스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요. 

 

재기 씨가 하는 일도 소개해 주세요. 

재기 ‘모요건축사사무소’를 시작했어요. 이전 회사를 다닐 때 참여한 작업 중 하나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에요. 건축적인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 가보셔도 좋아요. 또 하나는 설계를 맡았던 강화바람언덕 협동조합주택인데요. 대안학교 학부모를 중심으로 열두 가구가 사는 마을이에요. 여러 사람의 필요를 충족하는 공간을 설계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2023년 한국건축문화대상도 받고 좋은 결과가 있었죠. 

 

사과의 정교한 배열에서 건축가의 감각이 느껴져요. 

재기 건축과 학생일 때부터 건물 모형을 많이 만들어본 덕인 것 같아요. 재료를 세밀하게 자르고 붙이면서 남들보다 손 기술이 좀더 정교해진 게 아닐까요? 사과 조각을 공간처럼 생각할 때도 있어요. 방문 위치나 각도를 고려하는 것처럼 사과 두 덩어리를 비스듬히 조합할지, 나란히 놓을지 고민하죠. 사과의 배열을 보면서 설계 중인 공간을 어떻게 발전하면 좋을지 떠올리기도 해요. 

 

뇌를 말랑하게 하는 아침을 보내고 있군요. 

재기 맞아요. 머리를 마사지하는 것처럼 차분해지는 효과도 있어요. 어쨌든 칼을 쥐고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자르는 일에만 집중할 때가 대부분이지만요.

사진집이라는 형태로 펴낸 이유가 있었나요?

유청 평소 알고 지내던 정재은 감독님이 조언을 주셨어요. 제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각본집 편집을 담당하면서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이 프로젝트를 보고 정말 좋아하시면서 “이건 책이네! 제목은 ‘사과의 건축’으로 지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마음에 남아서 책으로 펴내게 됐어요. 우리한테 가장 귀한 것은 오랫동안 쌓은 기록 자체니까, 사진과 함께 올리던 글은 덜어내고 핵심만 남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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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