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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민 ㅡ TRVR
우리네 삶, 그리고 시간과 나란한 TRVR은 뭐든 될 수도, 할 수도 있다. 앞치마, 모자, 가방, 옷은 물론이고 여행까지도! TRVR의 디렉터이자 디자이너 정승민은 흘러가는 삶의 태도에 걸맞은 것들을 만들어 나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있을 무엇. 그것에 ‘클래식’이라 이름 붙인 그에게서 담백한 철학을 읽는다. 보통의 하루를 여행하듯 보내면 한층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모든 시간을 진심으로 유영하는 듯한 깊이가 있다. 나 자신의 시간뿐 아니라 가족의 시간까지 두루 살피며 한층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속될 정승민의 완고한 클래식 아닐까.
TRVR은 지나다니며 흘낏 살피기만 하다가 처음 들어와 봐요. 굽이굽이 올라오는 길이 꼭 탐험하는 것 같았어요.
오가기 좀 어려운 데 있죠? 날도 더운데 올라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이런 길 좋아해요. 오르막은 이 동네만의 매력이기도 하잖아요(웃음). 독자들에게 인사해 주실래요?
반갑습니다, 이것저것 여러 일을 하면서 지내는 디자이너 정승민이에요.
승민 씨에겐 여러 정체성이 있죠. 디렉터, 대표, 작가…. 그중 가장 힘이 센 자아는 역시 디자이너인가요?
그렇죠. 대표라는 건 직업보단 역할의 영역이지만 디자이너는 명확한 제 직업이에요. 역할은 주변에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만, 직업은 주변에 누가 있든 저를 나타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 주변이 어떻게 변해도 저를 표현할 수 있는 건 디자이너란 직업이 아닐까 싶어요.
대구에서 나고 자랐지만 디자이너를 꿈꾸면서 서울로 올라오셨다고요.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어요. 초등학생 때는 미술 학원 가는 게 제일 재미있었는데,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중학생 때 그만두게 됐죠. 어릴 때는 금세 다른 관심사가 생기기 마련인데 계속 미술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그런 제 마음을 알고 계신 부모님이 고등학교 진학 때 미술을 다시 해보라고 제안해 주셨어요. 그러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는 제가 특히 흥미를 느끼는 부분을 살펴봤는데요, 저는 그림으로 나를 표현하기보단 대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좀더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어요. 순수미술보단 디자인이 잘 맞겠다 생각해서 전공하게 됐죠.
전공해 보니 어땠어요?
저는 디자인이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해요. 여기 머그컵이 하나 있는데요. 누가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우리는 이 컵의 둥그런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감싸 쥐어서 마신다는 걸 알아요. 이런 소통을 디자인으로 풀어나가는 게 즐겁더라고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디자인이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디자인 이론 과목도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생활의 곳곳을 이루고 있는 디자인을 바라보고, 발견하고, 그걸 언어로 대하는 과정이 좋았어요.
디자인을 소통 방식으로 대한 거군요. 그런 의미에서 승민 씨의 소통 방식은 참 다채로워요. 디자인, 영상, 사진 등 경계를 넘나들면서 작업하고 있죠.
제가 하는 일을 칼로 두부 자르듯이 나누긴 어려워요. 디자인만 봐도 그래요. 그래픽 디자인, 공간 디자인 등으로 크게 영역을 나누기도 하지만, 섬세하게 파고들면 결국 모두 만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공간만 보더라도 공간 디자인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구석구석 살피면 그래픽적인 레이아웃을 만날 수 있어요. 포스터를 만든다고 해도 디자인에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포스터가 놓일 공간까지 생각해야 하고요. 결국 모든 게 경계 없이 만나게 되는 거죠. 한창 브랜딩 작업할 때 많이 느낀 부분이기도 한데요. 가령, 클라이언트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만들고 싶다는 의뢰를 해오면 우린 그 내용보다 훨씬 폭넓은 영역을 생각해야 해요. 클라이언트는 메뉴 위주로 생각하며 식당을 구상하지만 우리는 그 음식과 어울리는 공간과 세부 요소까지 고민해야 하니까요. 플레이팅, 테이블, 테이블과 어울리는 의자, 이 모든 게 어울리는 공간, 공간에서 흘러나올 음악과 향, 온도…. 가장 높은 완성도를 위해서는 오감이 균형을 이루어야 해요. 결국 어느 한 분야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그와 연결된 다른 걸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물론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경계 없는 작업을 해온 건 아니었어요. 초반엔 브랜드를 혼자 이끌어가야 하니까 여러 역할을 직접 해야만 했죠. 그러다 브랜딩을 하면서는 좀더 디테일하게 다양한 영역이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된 거고요. 여러 경험이 쌓이면서 저한테도 나름의 역량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승민 씨는 누군가 직업을 물어보면 우스갯소리로 ‘잡부’라 대답하신다고요(웃음). 망치, 드릴, 카메라…. 모든 게 작업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인상 깊어요.
작업 도구를 한정하거나 정해두지 않고 주변 상황에 맞춰서 이것저것 잘 이용하는 편이에요. 망치가 없는데 무언가를 두드려서 박아야 한다면 돌을 활용하는 식이죠. 주변엔 필요한 걸 대체할 무언가가 늘 있어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인데 저는 그걸 조금 더 빠르게 캐치하고 활용하는 사람 같아요. 제 배우자 윤주 씨는 그런 저를 보고 맥가이버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남들보다 임기응변이 뛰어난 편이긴 해요. 도구가 있다면 가리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예전엔 용접이나 미장도 직접 하곤 했죠.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아왔어요.
주변에 있는 걸 잘 활용하는 건 대단한 기술이지요. 타고난 감각이란 생각도 들고요. 경계를 두지 않는다는 건 경계에 갇히지 않는다는 의미 같기도 해요.
딸 리사가 태어난 다음엔 더 그렇게 됐어요. 제가 좁은 시각으로 아이를 대하면 모든 걸 제 주관으로 해석하고 이끄는 게 될 테니, 그러지 않기 위해 경계하게 된 거죠.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제 생각이 정답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떤 틀을 갖추지 않고 최대한 열어놓으려고 해요. 고정관념을 조심하면서요.
책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에 아름다움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쓰셨죠. 이십 대와 삼십 대 초반에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걸 보는 것이 삶의 큰 기쁨이었지만, 사십 대에 가까워지면서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감각이 좀더 확장되었다고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져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아름답다는 느낌이 점점 더 섬세해진다는 거예요. 오감 중 아름다움에 가장 빨리 반응하는 건 아마 시각일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시각적인 부분을 예민하게 다루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시각이라는 것도 주변 감각이 있어야만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는 딸과 단둘이 떠난 이탈리아 작은 바닷가 마을, 풀리아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인데요. 이 책에 있는 사진을 보면 순간의 찰나를 기록한 거지만 저한테는 떠오르는 감상이 굉장히 많아요. 그때 날씨, 그때 우리가 먹은 거, 그때 들은 바닷소리…. 예전에는 아름다움이 단순히 사진에 담긴 시각적인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 안에 취향과 경험이 담기는 것 같아요. 아름답다고 느끼는 시각 요소만큼 아름답다고 느끼는 소리, 맛, 향이 생겨나고 있는 거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변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경험이나 생각도 큰 역할을 할 것 같고요.
경험은 정말 중요해요. 사실 우리가 직접 보지 않은 걸 상상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어렵잖아요. 경험과 더불어 상황도 중요한 요소죠. 제가 경험을 이야기할 때 자주 하는 말인데, 시인과촌장의 ‘풍경’이란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게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모든 게 제자리에 있지 않은 걸 경험한 사람일 거예요. 그런 상황에 놓여봤으니 아름답다는 걸 아는 거죠.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건강이 가장 소중하고 감사한 거라고. 아파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감사하다는 감각은 그렇지 않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거니까요.
좋은 경험만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 거예요. 부정적인 경험도 나를 변화시키는 요소 중 하나겠죠.
누구나 한 번쯤은 스스로 ‘나는 난사람인가?’ 하고 물을 때가 있을 것 같아요. 저도 한때는 제 분야에서 제가 난사람인지 자문하며 괴롭힐 때가 있었는데요. 그 당시 저는 이것저것 뭔가를 하고는 있긴 한데 하나를 딱 꼬집어서 잘한다고 말하긴 어렵다는 데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오히려 여러 가지를 해온 경험이 저한테 자산이 되어 있더라고요. 특히 브랜딩 작업을 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 가지 분야를 뾰족하게 잘하지 못했다고 해도 얇고 넓게 해나가면서 단단해졌다는 걸 알게 된 거죠. 한 분야에 엄청 깊진 않을지언정 다양하게 해오면서 다른 사람이 못 보는 넓은 시각을 가지게 됐어요.
승민 씨와 TRVR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브랜드를 소개할 때도 어떤 한 장르로 규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이야기하죠. “우리는 삶을 디자인하고자 한다. 어떤 장르 하나를 선택해서 브랜드로서 장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지만 사람이 장르로 맞춰지지는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세상은 계속 바뀌어요. 그 속도는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죠. ‘우리 브랜드는 이래야 해.’ 하고 규정짓는다한들, 그것이 미래에도 유효할까요? 저는 뭐든 확신하고 규정하는 걸 조심하려고 해요. 제가 TRVR로 하고 싶은 건 세상이 변하는 흐름에 따라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피고, 지금 우리 삶에 필요한 걸 제안하는 거예요. 과거엔 빗살무늬토기가 생활양식에 맞는 아름다운 물건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사용하지 않잖아요. 이처럼 세상이 바뀌면서 사라지는 물건, 직업이 굉장히 많아요. 그만큼 앞으로 생겨나는 것도 많아질 거고요. 브랜드는 결국 사람과 같이 가야 해요.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한다면 브랜드도 거기 맞춰서 변해야 하는 거죠.
과거와 현재의 라이프스타일은 분명히 달라졌어요. 그 안에서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은 또 모두 다르겠지요. 이 모두를 고려하긴 어려울 텐데, 그중에서도 승민 씨가 특히 집중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사람들은 흔히 ‘10년 뒤엔 뭐가 어떻게 바뀔까?’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요. 10년 뒤에 바뀌지 않는 게… 과연 있을까요? 웬만한 건 다 바뀌는 세상이기 때문에 TRVR이 흥미롭게 보는 건 오히려 ‘10년 뒤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에요. 저희는 그걸 클래식이라 이야기하죠.
TRVR의 클래식을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는 것”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오늘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돼요. 그러니까 지금 있는 것은 과거에도 있는 것이어야 할 거예요.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어야 유의미할 거고요. 그래서 과거부터 미래까지, 언제나 있는 것을 클래식이라 이야기하고 싶어요.
2034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이템으로 이야기하긴 정말 어려워요. 10년 뒤 스타일을 제가 예측할 순 없지만 본질에 관해서라면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TRVR은 유행에 따르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는 타임리스 디자인을 따르고 있어요. 본질에 충실한 디자인이죠. 가령, 가방의 본질은 ‘물건을 담는 것과 이동하는 것’이에요. 이 본질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텐데요. 10년 뒤에도 본질이 제 기능을 하도록 유지되려면 제대로 된 만듦새, 이른바 퀄리티에 신경 써야 할 거예요. 보태어 10년 뒤에도 유지될 수 있는 소재여야 10년 뒤에도 꾸준하게 TRVR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겠죠.
변하지 않는 요소에 어쩐지 보이지 않는 것들만 떠올랐는데 생각해 보면 소재도 중요한 요소겠네요.
어쨌든 TRVR이 만드는 건 제품이니까요. 요즘은 소재를 선택할 때 지속 가능성에 관해 많이 생각해요. 환경 이슈는 지금 우리 시대의 커다란 문제니까요. 계속 살아남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면서 비즈니스를 이어가야 해요. 사회가 존재해야 브랜드도 존재할 수 있으니까, 사회와 환경을 생각하는 건 브랜드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인 거죠. 그런 시각에서 TRVR은 3-4년 전부터 소재에 특히 집중하고 있어요. 우리한테 필요한 소재를 직접 개발해 보기로 했죠. 우리만의 소재로,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보내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많은 게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대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어떤 소재인지 소개해 주실래요?
마침 소재를 테마로 적어 둔 글이 있는데, 아직 좀 거칠지만 있는 그대로 읽어 볼게요. “가방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먼저 소재를 선택했다. 단순히 소재를 선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소재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소재를 개발한다는 건 우리가 제품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이고, 다른 제품과 차별점을 가지는 일이다. 또한,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계속 전할 수 있는지, 그 지속성 여부가 결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걸쳐 개발한 소재에 관해 깊이 연구하며 테스트한다. 가방은 단일 소재로만 만들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함께 사용하는 다른 소재의 물성을 파악하여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해야 한다. 소재의 기능적인 부분뿐 아니라 미적인 면까지 함께 고려하고 있다. 시각적으로 매력적인지, 빛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원단의 구김과 꺾임은 어떻게 표현되는지….” 여기 놓여 있는 가방만 봐도 한 가지 소재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아요. 면, 가죽, 금속… 다양한 재료가 균형을 이루는 게 중요해요. 한 번 하고 말 게 아니니까 무책임하게 대하면 안 되는 거죠. 계속해서 조화를 이루는 물성을 찾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어요.
TRVR은 결국 사람들의 변하는 라이프스타일에 초점을 맞추게 될 텐데요. 승민 씨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때요?
라이프스타일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텐데, 제 핵심은 ‘시간’이에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시간 관리’. 저는 살면서 ‘이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라는 생각을 제일 많이 해요. 우리는 매일 거울을 보며 살지만 나이 들었다는 걸 매번 체감하진 않거든요. 그런데 제 아이의 성장은 참 드라마틱하더라고요. 저는 제 시간이 흐른다는 걸, 제가 나이 먹는다는 걸 리사가 자라는 걸 보면서 실감해요. 제가 누워 있어도, 열심히 일을 해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선명하게 느끼게 됐죠. 그러면서 시간을 잘 쓰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 제 라이프스타일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삶에 집중해 있어요. 자연스럽게 게으른 순간을 경계하게 됐고, 분초 단위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루를 타이트하게 계획해서 사용하려고 노력하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선 ‘어떻게’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지금은 그 시간의 대부분을 도전하는 데 쓰고 있어요. 영어 공부, 운동 같은 간단한 것이라도 늘 새로운 걸 접하려고 하면서요.
이번 호에서는 비주얼에 관해 이야기해요. 나를 꾸미는 도구로서의 패션이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가 드러나는 외형의 모습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하죠. 이를테면 편한 걸 추구하는 사람은 활동하기 편한 옷을 고를 테고, 안구 건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외출할 때 꼭 선글라스를 쓸텐데, 그런 의미에서 승민 씨의 비주얼은 어떤가요?
기본적으로 편한 옷을 선호하고, 예전부터 입던 걸 꾸준하게 입는 편이에요. 아, 옷을 사거나 고를 때 원칙으로 삼는 게 하나 있는데, 로고가 보이지 않는 걸 택해요. 물론 TRVR은 브랜드니까 로고가 드러나는 디자인을 하고 있지만(웃음), 제가 입는 옷엔 로고가 두드러지지 않아요.
이유가 있어요?
로고로 내 스타일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저는 ‘나’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의류를 대한다면 저를 나타낼 요소가 로고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창 대학에서 강의할 때 브랜딩의 우선순위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이런 결론이 나왔죠. “사회에서 무언가를 디자인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나 자신의 브랜딩이다.” 즉,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거예요. 어떤 언어, 어떤 말투, 어떤 제스처를 쓰느냐에 따라 나는 다르게 보일 거예요. 패션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즐기는 거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봤을 땐 외형을 통해 한 사람을 보여주는 일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패션이나 로고가 저를 대변하기보단 저라는 사람의 전체적인 조화가 드러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요. 어울리는 옷을 찾는 건 그다음의 일이겠죠. 나한테 잘 어울리는 옷이면 좋을 테고, 신체적 단점을 가려주는 옷이라면 더 좋겠죠. 드러내고 싶은 신체적 장점이 있다면 돋보이게 해주는 패션도 좋고요.
나한테 잘 어울리는 패션을 찾는 건 참 힘들어요. 여러 스타일을 도전해 보지 않으면 정확히 알 수 없는 일 같기도 하고요.
저한테도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저를 포함하여 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질문하고 조언을 들어보면서 스타일을 찾아나가는 편인데요, 특히 배우자에게서 많은 조언을 듣고 있죠. 그러고 나니 확실히 제 스타일이 명확해졌어요. 저는 제 모습을 제대로 보는 데 한계가 있지만 저를 잘 아는 사람이 보는 저는 조금 더 깊이가 있거든요. 저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는 게 전부지만 윤주 씨가 보는 저는 실체, 성향, 성격이 담긴 총체적인 저일 테니까요.
TRVR은 트래블러Traveller에서 온 이름으로 알고 있어요. 공간의 여행이 아닌 시간 여행에 초점을 맞춘 네이밍이라고 들었는데,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실래요?
TRVR을 시작한 게 2010년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저한테는 시간이 중요한 요소였어요. 시간의 여행, 그 흐름에 함께하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담은 거죠. ‘시간 여행’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걸 상상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말하는 시간 여행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뜻해요. 영화 〈백투더퓨처〉(1985)는 30년 후의 미래를 보고 오는 이야기잖아요, 그 미래가 2015년이었던 거 아세요? 벌써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죠. 우리는 계속 이렇게 시간 여행을 하고 있어요. 저는 그 안에서 꾸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은 거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어쩌면 그 여행이란 건 일 여행일 수도 있겠어요. 최근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늘 비슷하게 흘러가는 하루지만 밀도 있는 일상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에디터님 지난주 목요일에 점심 뭐 드셨어요?
네? 음….
한 번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없을 거예요. 저도 그래요. 근데 누군가 저한테 “신혼여행 첫날 점심 뭐 먹었어요?” 하면 딱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우리 뇌는 매일 반복되는 일은 최대한 지워서 공간을 만들려고 하고, 여행처럼 특별한 일은 최대한 기억하려고 한대요. 그렇다면 일상을 여행처럼 채우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그럼 매일이 머릿속에 촘촘하게 남아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하루를 여행처럼, 밀도 있게 채워 나가려고 해요. 요즘은 집에서 사이클 운동을 하면서 여행하듯 하루 밀도를 높이고 있어요. 프랑스에 ‘투르 드 프랑스Le Tour de France’라는 자전거 대회가 있는데요. 로드 사이클 3대 그랜드 투어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대회인데, 매년 프랑스와 그 주변국을 무대로 약 3,500km의 거리를 3주 동안 매일 달리는 레이스예요. 지금이 한창 그 시즌이어서 요즘은 대회 영상을 보면서 매일 아침 그리고 밤늦게 함께 사이클을 타요. 총 21개 스테이지로 구성되는데 어제는 열 번째 스테이지를 함께 탔어요(웃음). 골방에서 사이클 기구로 운동하고 있을 뿐이지만 제 나름의 여행이라 생각하며 지내는 거죠.
마음먹기에 따라 일상의 밀도가 달라지는 거군요. 앞서 경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경험은 작업하는 데도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듯해요. TRVR로 처음 만든 제품이 ‘사이클캡’이라고 했는데, 그 당시 자전거 안장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으셨다고요.
저는 경험하지 못한 건 디자인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할 수야 있겠죠. 그런데 ‘진정성을 담을 수 있느냐.’라고 하면 의문이 생겨요. 상상으로 디자인하는 것과 경험으로 하는 건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에디터님은 칠레 음식에 관해 아시나요?
어… 전혀 모르겠어요.
(웃음) 저도 몰라요. 누군가 칠레 음식을 만들어달라고 하면 이것저것 검색해서 만드는 흉내는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없는 일이라고 봐요. 하지만 디자이너는 목적지가 있어야 하거든요. 기계보다 사람이 한 디자인이 아직까지 더 매력적인 이유는 디자이너의 인사이트를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인사이트가 담겨야 더 매력 있는 디자인이 탄생할 테니까요. 제가 지금 여기 있는 분들에게 강아지를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모두 다른 강아지를 떠올릴 거예요. 그 강아지는 저마다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는, 본 적 있는 강아지겠죠. 경험해 보지 못한 강아지는 떠올릴 수 없을 테니까요. 이처럼, 같은 걸 디자인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풀어내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다를 거예요. 저는 저만의 통찰력이 담긴 디자인을 할 텐데 그것은 오롯이 제가 경험한 것에서 나오겠죠. 진정성 있게, 다양하게 경험한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재료를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디자이너라면 더 많은 색상의 연필을 가지고 디자인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지금껏 다양한 경험을 해왔다고 생각하세요?
경험의 양을 따지기보다는 계속 나다운 경험은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살면서 할 수 있는 경험을 최선을 다해서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서요.
‘나답다’는 게 뭘까요?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제가 하는 모든 것이요.
우문현답이네요(웃음). 카페 TRVR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볼게요. 카페는 일차적으로 ‘마신다’는 목적이 있는 공간이에요. 디자인할 때는 제품군이라는 경계에 갇히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공간은 카페라는 목적성을 두었죠. 왜 카페를 선택하게 됐어요?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라 하면 늘 이상적으로 생각해 온 모습이 있었어요. 아주 옛날부터 갖고 있던 그림인데, 딱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 등장하는 카페 모습이죠. 주인공들이 편하게 모여서 쓸데없는 이야기나 고민을 나누는 공간인데요. 저는 그런 장소가 우리 삶에 필요한 공간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브랜딩 작업으로 커피 브랜드와 협업할 일이 많아지면서 커피의 매력을 알게 된 것도 한몫했고요. 저는 사람들이 궁금해요. 그런데 브랜드로서는 사람과 대면할 기회가 적거든요. 공간을 열면 사람을 만나는 허들이 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카페를 만들게 됐죠. 저는 여기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차림으로, 누구와 와서, 어떤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는지 직접 느끼고 싶었어요. 여전히 궁금한 일이기도 하고요.
어디에 만드느냐도 고민이었을 것 같아요. 카페 TRVR은 이태원동에 있죠.
이 동네도 저한텐 매력적이었어요. 어느 날, 카페에 오신 손님이 저한테 왜 여기에 카페를 냈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여긴 카페가 많은 곳도 아니고, 상권이 형성된 곳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래서 좋았어요. 여기도 카페, 저기도 카페, 맞은편도 카페인 거리보다는 주거지 사이에 있는 편이 일상 속 사랑방이 되기에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자주 나와 계세요?
1층이 카페, 2층이 쇼룸, 3층이 사무실이라 매일 나와요. 오가면서 음료도 마시고, 1층에서 일할 때도 있고요.
손님을 통해 트렌드를 눈여겨보기도 하나요?
TRVR로 의류도 디자인하고 있지만 패션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사람들이 뭘 하는지를 궁금해해요. 누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는 기억에 없어도 누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누가 어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려지거든요. 저는 커피 한잔 마시면서 책 읽고, 컴퓨터 하고, 쉬는 분들을 보면서 안정감을 얻어요. 저한테 손님 구경은 ‘이 사람들한테 뭔가를 얻어내야겠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흘러가는 그대로 두는 풍경 같은 거죠.
TRVR은 다양한 행보를 걸어왔지만 대표적인 제품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젠틀맨스 에이프런Gentleman’s Apron’을 떠올릴 거예요. 승민 씨가 필요해서 만든 제품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미국의 웹사이트 ‘기즈모도Gizmodo’에서 소개하면서 국내외에서 주문이 쏟아진 제품이죠.
한창 자전거 탈 땐 정비도 직접 하곤 했는데 여러 도구를 사용하다 보니 실용성 있는 앞치마가 필요했어요. 기성품은 부엌에서 쓰는 용도가 대부분이라 저만을 위한 앞치마를 직접 만들었죠. 근데 아는 디자이너분이 제가 입은 앞치마를 보곤 만들어서 팔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요. 팔릴까 싶은 마음에 일단은 제가 입던 걸 촬영해서 제품으로 등록해 봤는데 하나둘 주문이 들어왔어요. 초기엔 주문량이 많지 않아서 주문서가 들어오면 하나씩 직접 만들어서 판매했는데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국내외에서 메일 수백 통이 와 있는 거예요. 하룻밤 새 일어난 일이었죠. 기즈모도 소개로 ‘제품을 사고 싶다.’, ‘우리 숍에서 판매하고 싶다.’는 연락들이었어요. 당시엔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죠. 저한테는 판매할 제품 수량이 없었고, 외국으로 판매할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친구한테 전화했죠. “나 해외 쇼핑몰 만들어야 해, 도와줘!” 그렇게 3일 만에 사이트를 만들고, 대량생산을 위해 공장 세팅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공장이 하루아침에 준비되진 않거든요. 혼자서는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양이 100개가 채 되지 않는데 주문은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라 공장이 준비될 때까지 쉴 틈 없이 만들어야 했죠. 젠틀맨스 에이프런이 워낙 잘되니까 앞치마 전문 브랜드를 해보라는 권유도 있었는데요. 그렇게 했다면 지금보다 더 잘됐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사람은 앞치마만으론 살 수 없잖아요. 저는 삶과 함께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TRVR이 앞치마를 만들지언정 앞치마 브랜드가 되는 건 원치 않았어요.
홈페이지에서 읽은 젠틀맨스 에이프런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일은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 마련이다.”라는 문장을 쓰셨죠. 젠틀맨스 에이프런은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하다 보면 상업성과 멀어질 우려도 있을 것 같아요.
디자이너를 포함해서 예술과 창작 영역에 있는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일 텐데요. ‘팔릴 만한 걸 만들어야 하는지,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어야 하는지.’ 물론 내가 하고 싶은 걸 만들어서 잘 팔리면 좋겠지만 늘 그럴 순 없으니까요. 저 역시 제품 기획 단계에서 항상 그 딜레마에 빠져요. 요즘 뭐가 유행하는지 찾아보고, 사람들 관심사를 탐색하기도 하죠. 참고하며 기획하고 있지만 저는 팔릴 만한 물건보단 제가 좋아하는 거, 잘할 수 있는 걸 만드는 쪽에 가까워요. 앞서 얘기했듯, 같은 상황이더라도 개인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디자이너, 혹은 브랜드의 통찰력을 제품에 녹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유행보단 저를 중심에 두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해서요. 물론 TRVR도 팔릴 만한 걸 만들어본 적이 있어요. 근데, 안 팔리더라고요(웃음). TRVR은 하나의 인격체라고 생각해요. 결국 TRVR이 가진 통찰력으로 제품을 만들어내는 게 10년 후에도, 그 다음에도 지속 가능한 방향이겠죠.
최근 들어서 ‘직업인으로서 나의 일을 지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하신다고요. 질문은 질문을 낳는 법인데, 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나요?
역시 시간 매니지먼트죠.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을까?’ 지금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고 있느냐 묻는다면 제 대답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예요. 무작정 하루에 영어 단어 두 개씩 외우라고 하면 귀찮기도 하고, 자주 잊게 될 거예요. 그렇지만 1년이 지나면 700개가 쌓인다는 걸 염두에 두면 영어 단어 두 개 외우는 게 굉장한 일처럼 느껴지겠죠. 결국 어떤 일이든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고 잘 쓰기 위해 노력해야만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 매 순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며 지내려고 해요.
시간은 승민 씨한테 정말 중요한 요소군요.
인생의 시기마다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저는 때를 놓치지 않고, 때에 맞는 도전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싶어요.
그 ‘때’라는 건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 같아요. 결혼과 출산, 육아와 같은 삶의 변화가 시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죠.
맞아요. 이전엔 퇴근하고 나면 온전한 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가족의 시간을 헤아리면서 관리해 나가고 있어요. 삶을 같이 할 사람들이 생겼는데 혼자 살 듯 지내면 문제가 생기겠죠. 특히 가족 공동의 시간을 고민해요. 우리 가족이 지금 함께 보내는 시간 안에서 함께, 또 따로 해야 하는 일들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지내요. 식사만 하더라도 혼자라면 대충 때우겠지만 함께 먹는다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니까요. 함께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제 에너지를 저뿐만 아니라 다른 곳으로도 분배하는 일이에요.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에도 썼지만, 예전에는 여행을 떠나면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제가 하고 싶은 걸 했어요. 하지만 딸과 함께하는 여행은 관점이 달라야겠죠.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생각하면서 교집합을 찾아 나가야 하니까요. 리사와 이탈리아까지 가서 리사가 못 먹는 매운 불닭볶음면을 먹을 순 없잖아요(웃음). 가족이 생긴 이후론 나와 더불어 가족을 생각하고, 그 시간을 나누는 데 집중하면서 시간 매니지먼트를 해나가고 있어요.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에 “아빠로서 딸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주면 좋을지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쓰셨는데, 반대로 리사가 아빠에게 보여준 세상도 있었을 것 같아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어린 시절 모습은 오히려 부모가 더 많이 기억하고 있죠. 그렇다는 건 리사의 지금 모습을 가장 많이 기억하게 되는 사람이 저와 윤주 씨라는 얘기겠죠. 지금 저는 리사의 모습을 최대한 온전히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이전의 저에겐 없던, 새로 생긴 역할이죠. 겪어보니 나는 모르는 내 모습을 누군가 기억해 준다는 데서 오는 힘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최선을 다해 리사의 세상을 함께하려고 하는데요, 리사는 저한테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은 세상을 보여줘요. 저 혼자 이탈리아에 갔다면 워터파크에 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리사 덕분에 워터파크에서 수영도 해봤거든요. 어떤 옷이 어울릴지 고민하고 있으면 리사가 옆에서 이렇게 얘기해 주기도 했어요. “아빠, 아까 입은 게 더 예뻐.” 단순히 옷이 잘 어울린다는 걸 넘어 저를 응원해 주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리사가 초대하는 세상이 남들 눈엔 사소한 것일지라도 저한테는 더없이 소중해요.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죠.
‘리사는 현명한 삶의 메이트가 될 것 같아.’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끝으로, 승민 씨가 그리고 있는 미래에 관해 들어볼까요?
특별히 계획하고 있는 건 없지만 뭐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해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이것저것 도전해 보려고 하죠. 이전에는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게 특별한 일이고, 도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영어 공부도 하나의 도전이라 여기면서 꾸준히 무언가를 해나가는 힘을 기르고 있어요. 계속해서 일상을 여행하며, 하루를 밀도 있게 채워 나가려고요.
에디터 이주연(산책방)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