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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달아나며 늘 함께
읽을 수 없는 시집과 들을 수 없는 레코드
사라지는 물건이 따로 있는 것처럼 제목을 적었지만, 사실은 몇 가지 물건만 예외일 뿐 나의 물건 대부분은 사라져 버린다. 내가 가진 물건이 열 개라고 치면 그중에 한두 개만 계속해서 사용하고 두세 개는 이따금 찾는 것 그리고 나머지 다섯 개는 ‘어라 여기 있었네.’ 혹은 ‘도대체 어디 갔지?’ 부분에 속한다. 그나마 기억해 내면 다행이고 어떤 물건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이 영영 사라져 버리곤 한다. 언젠가 친구가 선물해 준 LP와 책 한 권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늘 우연히 꺼내 들게 되었다. ‘영영’ 부분에서 ‘어라 여기 있었네.’ 부분으로···.
4년 전 봄에 결혼을 한 친구는 그 무렵 내게 축사를 부탁했고, 그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이 선물들을 신혼여행에서 사다 준 것이다. 내가 턴테이블이 없고 또 포르투갈어에도 전혀 이해가 없다는 걸 친구는 알았을 텐데 건네주는 얼굴이 해맑았다. “고마워요, 형.” 선물을 받으며 내가 말하자 친구는 대답했다. “언젠가 듣고 싶어질지 모르잖아.” 내 미래의 어떤 모습을 자신은 알 것 같다는 말투로.
그렇게 선물을 받은 지 4년이 지나서야 나는 선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손에서 손으로 선물을 건네는 건 금방이고 눈에 보이는데, 오늘처럼 그 선물이 정말로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예측이 되질 않는다. 그 시간을 불쑥 확인해볼 수도 없고 말이다. 책장에서 책과 레코드를 꺼내 들어 먼지를 털어내고 이리저리 바라본다. 형은 왜 이걸 골랐을까.
포르투 지역 마켓을 어슬렁거리는 한국인 부부 한 쌍이 떠오른다. 낯설기도 하고 오래전부터 영혼이 찾고 있었던 것 같은 물건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곤 했겠지. 선물 받은 나만 포르투갈의 언어와 문화를 모르는 게 아니고 친구 부부도 역시 몰랐을 것이다. 비닐도 뜯기지 않은 레코드를 보면 물건을 판매했던 상인도 아마 그 음악을 못 들어봤을 확률이 꽤 높을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주고받는다. 이제는 그런 것들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표지를 충분히 구경한 후에 나는 AI의 도움을 받아 예술가 관련 정보라든지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 따위를 찾아보았다. 책 내지를 촬영해 번역해 보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 LP의 음원도 찾아 크게 틀어 놓았다. 1988년의 레코딩, 악기 배치가 ‘공간적으로’ 독특하니 신경 써가며 들어보라는 가이드. 빨간 커버를 가진 산문 시집의 독특한 부제(독수리냐 태양이냐!) 등등의 정보를 알아가는 동안에는 잠시 나 자신을 까맣게 잊는 기쁨도 느꼈다. 1번 트랙부터 통째로 재생시켜 놓은 40분짜리 앨범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른 채로 나는 한동안 번역된 책을 읽고 있었다.
“언젠가 듣고 싶어질지 모르잖아.” 형은 이런 여행에 관해 알았을까. 아니, 당연히 몰랐겠지. 그저 선물을 고르며 나를 잠시 떠올렸을 것이다. 그만의 방식으로 그만의 나에 관해. 만약 흰 종이 위에 우리 두 사람 마음의 동선이 그려져 있다면, 가끔 겹치는 부분에 예전에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몇 월 며칠 무엇무엇을 기억하며.’ 물론 그런 방식도 충분히 좋지만, 이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일방적인 것, 오해, 잊혔던 순간들, 혼자만의 생각들, 수많은 이해받을 수 없는 것들. 겹치지 않는 선들을 그런 이름으로 불러야 하겠지. 형에 관해서라면 나는 그런 것들도 좋아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 선이 겹치거나 안 겹치거나 하더라도 괜찮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선이 그어질 수 있게 종이가 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뭐든지 그려질 수 있는 종이. 세상에는 그런 게 있었다. 나는 선에 관해서만 신경 썼었는데 말이다. 빈 종이를 떠올리고서부터 거의 모든 것들은 보다 편안해졌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