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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궁금하다. 왜 어떤 사람들은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지. 다녀간 자리마다 문장과 부호 새기기를 왜 호흡처럼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럴 때 나는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을 말해야만 한다는 직감이 그가 글을 쓰게 만들었다고. 그는 자신이 대단한 작가가 아니라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진의 이해》
존 버거가 거침없이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 복제품을 칼로 잘라낸다. 그는 조각이 된 작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현대 사회의 복제가 어떻게 원본의 의미를 잃게 만드는지 설명한다. 예술을 보는 도발적인 시선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이 미술 비평 TV 프로그램의 제목은 ‘다른 방식으로 보기’. 동명의 에세이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고, 이 어구는 존 버거의 시선을 설명하는 한 문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여러 수식어를 지닌 사람이다. 미술비평가, 소설가, 부커상 수상자, 화가, 농부…. 여러 언어로 불리지만 그는 쓰고 그리는 일에 뿌리를 단단히 두었다. 존 버거가 현대 미술과 사회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다양한 형태로 남긴 기록을 읽다 보면, 마치 그가 독특한 시선을 선물하는 듯하다. 그의 렌즈로 예술을 보면 그저 심미적인 감상이 일어나기보다, 만든 이의 숨은 목적과 작품에 담긴 사회적 맥락을 의심하게 된다.
그가 사진에 관해 말했던 바를 기억한다. 존 버거에 따르면 혁명가 체 게바라의 시신을 찍은 장면은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닌, 반대 세력을 향한 제국주의의 경고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불러내는 순간. 존 버거는 관찰하기도 기록하기도 어려운 그 순간을 글로 옮겨, 세계의 빈틈에 슬며시 끼워둔다.
《A가 X에게》
미술 비평만 보면 존 버거는 예리하고 딱딱한 작가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노년까지 멈추지 않았던 일은 소설 쓰기로, 그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기록이다. 부커상을 받은 《G》, 《우리 시대의 화가》, 《코커의 자유》 등 그가 창작한 이야기도 여러 권. 노동, 여성, 사회 운동 등 그가 깊이 관심을 둔 존재들이 주로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주제 또한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소설, 《A가 X에게》의 일부를 옮겨둔다.
화자의 이름은 아이다. 그의 연인 사비에르는 반정부 테러 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혔다. 이중종신형이란 생이 끝날 때까지 징역을 살고, 죽음 이후에도 시체가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형벌이다.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결혼 관계가 아니기에 면회가 불가능하고, 오로지 편지로만 안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존 버거는 연인의 오래된 편지 뭉치를 감옥에서 발견했다는 말로 소설을 시작한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흐려지며 시작된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의 편지를 엮었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이들은 저항한다. 서로를 향한 사랑을 놓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는 문자만을 기록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 글만큼이나 그에게 익숙했던 도구는 바로 드로잉. 화가에서 비평가로 전향한 뒤에도 그림을 붙들었다. 가상의 화가 ‘벤투’가 되어 그린 작품들과 글을 함께 수록한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존 버거는 드로잉하는 목적을 이야기했다.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가만히 헤아려본다. 그가 무언가를 그린다면 대상의 크기나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이 품은 아름다움과 그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의미, 즉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동행하기 위함이다. 그 목적지는 감상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결합되어 마음에 떠오르는 심상처럼, 존 버거가 드로잉하는 동안에는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직접 그린 작품을 소설과 에세이에도 종종 수록했다
《A가 X에게》는 아이다가 그린 손이 나온다. 편지를 쓰는 손, 마주 잡은 손. 한때 사비에르를 만지던 그녀의 손이다. 연인에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한 여자가 그것을 그리는 마음은 어떠할까. 존 버거의 드로잉은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두 사람을 애틋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아직 언어로 설명되지 못한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존 버거가 남긴 이야기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한다. 내가 애써서 말하고 싶은 그것은 무엇인지. 식지 않는 동력으로 늘 책상으로 향했던 거장의 마음을 떠올리며 다시 그의 책을 들어본다.
글 차의진
자료 제공 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