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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NE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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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콜렉터 이야기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는 뉴욕에서 요리사로 살며, 벼룩시장과 앤티크 마켓에서 손때 묻은 빈티지 제품을 수집하여 태국으로 보내는 사람이다. 대단한 수집가이자 1900년대 초중반의 시대를 사랑하는 사람.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아나바다와 빈티지의 차이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대학교 게시판에 필리핀 어학연수 프로그램 광고지가 붙어있었다. 왕복 비행기 값만 내면 방학 동안 필리핀에 위치한 기숙 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필리핀 어학연수가 유행하기도 전이었고(필리핀이 영어권 국가인지도 몰랐다), 광고지는 너무 작아서 총 20명의 학생을 뽑는데 신청자는 고작 열여섯 명이었다. 영어 테스트로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나름 열심히 준비를 해갔는데, 신청자가 모집정원보다 적어서 테스트도 필요 없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필리핀 바기오 시Baguio City에 위치한 몬티셀로 대학교Monticello College에 도착했다. 어학연수가 시작된 첫째 주에는 다들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 나름 스파르타 프로그램이라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대일 튜터 수업, 그룹 수업, 토론 수업 등 하루 종일 영어수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7월의 필리핀은 우기인 데다가 고산지대에 위치한 바기오에는 태풍이 하도 자주 와서 틈만 나면 정전이 되었고, 산 중턱에 위치한 학교는 정전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수업이고 뭐고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동기들과 과자나 먹으며 수다 떨기에 바빴다. 첫째 주부터 이렇게 되어버리니 다들 마음이 해이해져 수업은 땡땡이치고 놀러 나가기에 바빴다.
시골동네인 바기오에서 우리가 갈만한 곳이라고는 패스트푸드점이 모여 있는 ‘SM 쇼핑몰’과 ‘블랙마켓Black Market’이라 불리던 재래시장이 전부였다. 재래시장에는 ‘우까이 우까이Ukay Ukay’라는 빈티지 의류를 아주 저렴하게 판매하는 가게들이 많았다. 사실 당시에는 빈티지라는 개념도 없었고, 나의 눈에는 그저 ‘아나바다 장터’에서나 볼 법한 중고의류에 불과했다. 가격이 오백 원에서 천 원 수준으로 매우 저렴한 데다가 유행하는 스타일과는 다르지만, 특이하고 예쁜 패턴의 옷이 많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시장에 달려가 옷을 골랐다. 덕분에 두 달여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할 때는 트렁크가 처음의 두 배가 되어 있었고, 그것이 나의 빈티지 수집의 시작이었다.
빈티지의 매력에 빠진 나는 여행을 가면 꼭 벼룩시장과 세컨 핸드Second Hand시장을 찾아다니며 오래된 코트의 금장 단추로 만든 귀걸이나 굽이 낮은 빈티지 신발, 손때 묻은 가죽가방, 꽃무늬 원피스, 독특한 선글라스와 안경 등 내가 직접 입고 사용하지 않아도 예뻐 보이는 제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것은 여행 가방이었다. 오래된 여행 가방은 가죽으로 만들어 무겁고 바퀴도 없어 실용성은 제로이지만, 가끔 가방에 이름과 집 주소가 적혀있기도 하고, 여기저기 붙어있는 공항 스티커들을 보며 누가 이런 가방을 사용했을까? 이 가방은 어떤 여행들을 하고 나에게 왔을까? 혼자 물어보곤 했다. 가방이 지니고 있는 시간과 이야기를 함께 공유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발견의 기쁨
방콕으로 이사한 나는 역시나 수집벽을 감출 새 없이 방콕의 빈티지 숍을 찾아다녔다. 내 예상보다 많은 빈티지 숍과 컬렉터를 만나게 되었고, 결국 태국의 빈티지에도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태국은 커다란 전쟁의 역사가 없고, 한국보다는 발전 속도가 더디다 보니 아직까지도 대대손손 물려 쓰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시골 마을에 방문했을 때 식당 아주머니가 밥을 퍼주던 법랑 그릇이나, 오묘한 패턴의 쟁반 빈티지한 글라스 등 몇십 년은 족히 되었을 물건들 하나하나가 모두 예뻐 보였다.
사실 빈티지 수집가들에게는 어떠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의 기쁨보다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더 크기 마련이다. 이것이 어떻게 내 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수집가의 무용담까지 더해지면 별것 아닌 유리컵 하나에도 딱 하나뿐인 특별한 물건이 된다. 수집의 역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집가들은 준전문가가 되어간다. 딱 하나뿐인 빈티지를 재빠르게 골라내 세밀한 눈길로 요리조리 돌려보며 구입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문가인 판매상 앞에서 얕잡아 보여서는 안 된다. 짐짓 아는 체를 해가며 없는 흠도 잡아내 노련하게 값을 흥정해내야 한다.
이렇게 나름 수집가다, 전문가다, 하며 잘난 척을 해보았지만 나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빈티지 컬렉터를 만나게 되었다. 주말에만 연다는 카페를 찾기 위해 기웃대다가 친구의 손에 이끌려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커다란 글씨로 ‘Machine Age Workshop’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기계(문명)의 시대 작업장? 무슨 뜻인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는 않았다. 핑크색의 활짝 열린 철문으로 의심 없이 발걸음을 내디뎠고 나는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복층으로 된 큰 창고 안에는 구역별로 빈티지 컬렉션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한눈에 보아도 단순히 오래된 물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100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철제 캐비닛과 나무 테이블, 그 위의 진열된 작은 클립과 유리병부터 시작해 조명, 벽 장식, 소파 등 창고 안에는 가늠할 수 없는 세월들이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게다가 눈으로 훑어보기조차 버거울 만큼 그 양도 어마어마했다. 과연 이 빈티지 제품들을 한곳으로 모아온 수집가는 누구일까.
INTERVIEW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뻠pump’ 씨를 통해 ‘Machine Age Workshop’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냥꾼과 이야기꾼
이 공간을 만든 수집가는 누구인가요?
이곳을 만든 사람은 ‘데이비드David’ 씨입니다. 그는 태국사람이지만 뉴욕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현재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일하고 있지요. 우리는 그를 ‘C.I.H-Chief Industrial Hunter’라고 부릅니다. 그는 7년 전부터 인더스트리얼 가구와 오래된 제품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주말마다 오래된 빈티지 제품들을 수집하러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또 한 사람 데이빗의 파트너 ‘빅터Victor’를 소개합니다. 그는 공동설립자로 ‘C.I.S-Chief Industrial Storyteller’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회사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지만 역시 데이비드와 마찬가지로 함께 미국의 산업 빈티지를 찾아다니며 수집하고 있지요. 빅터는 특히 제품의 쓰임새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늘 뒷이야기를 수집해요.
그렇다면 이 제품들은 모두 미국에서 보내온 제품들이군요?
네, 맞아요. 데이비드는 고향인 뉴욕에서 시작해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매사추세츠, 버몬트 등 미국의 모든 벼룩시장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수집 여행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모은 제품들은 일정 기간이 되면 태국으로 보내주고, 저희가 이곳에서 관리하지요. 제품을 판매하기도 하고 렌탈 하기도 합니다
The Machine Age는 어떤 시대를 말하는 건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대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880년부터 1945년 사이에 제 1차, 2차 세계대전이 열렸던 시기죠. 이 시대에는 원자폭탄, 최초의 컴퓨터와 트랜지스터의 발명,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며 첨단 기술과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건축과 문화, 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로 그 시대의 제품들이 많겠군요.
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의 제품들이 많아요. 우리는 특별히 철제 테이블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라디오, 가죽 가방 등 남성적인 디자인의 제품이나 산업 빈티지를 선호합니다. 1900년대 초중반은 미국 산업화가 꽃을 피우던, 이른바 골든 에이지라 불리던 시대여서 아름답고 독특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많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제품은 ‘톨레도 스툴Toledo Stool’입니다. 철제 프레임과 나무로 이루어진 톨레도 스툴은 요즘 유행하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가장 원형 같은 느낌입니다. 또 1900년대 초반에 생산된 ‘파머시 램프Pharmacy Lamp’도 매우 아름다워요. 관절을 이용해 조명의 위치를 조정하거나 확장할 수 있도록 정밀하게 설계된 스탠드이지요.
아무래도 해외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은 덩치가 큰 가구보다는 작은 소품 같은 것에 더 관심이 많을 것 같아요. 저는 특히 ‘메이슨 자Mason jar’에 담긴 이 캔들에 욕심이 나는데요.
메이슨 자는 1920년대에 만들어진 제품이에요. 요즘 다시 유행하며 생산하고 있는 메이슨 자와 뚜껑모양이 약간 다르죠. 캔들은 저희가 직접 제작하고 있는 제품이에요. 소이 왁스로 만들었어요. 캔들을 다 태우고 난 이후에도 소장가치가 있죠.
들어올 때 보니 나무와 도구들이 한쪽에 쌓여있던데, 제작도 가능한가요?
기존 제품들을 참고하여 직접 제작도 합니다. 저희의 정체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주 안에서 빈티지에서 얻은 재료를 이용해 새로운 용도의 가구를 만들어 냅니다. 가령 상태가 안 좋은 나무 테이블은 상판만 따로 떼어내서 수선과 가공을 하고, 재봉틀에서 떼어낸 철제 다리를 붙여 새로운 테이블로 만들어냅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주로 인테리어 작업을 앞둔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 빈티지 콜렉터들과 산업용 가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나 현지인들도 많이 찾고 있어요. 방콕의 유명한 카페나 숍에서도 저희 가구를 많이 사용해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어 있는 환경이다 보니 오래된 빈티지를 찾는 사람보다는 주로 재가공한 가구를 구입하죠.
한국 사람들도 이곳을 많이 찾나요?
한국의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이 있어요. ‘양태오’라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직접 우리 창고를 방문해 촬영했는데 그 뒤로 한국 사람들이 이따금씩 방문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해요.
우리는 그 시대의 스타일, 정신, 그리고 남성다움을 사랑합니다. 요즘 만들어진 제품들보다 훨씬 정교하고 정밀하게 좋은 소재로 만들어졌고,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사용을 해도 무리가 없어요. 요즘 그렇게 긴 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품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그 시대의 열정을 우리의 수집품들을 통해 각자의 삶에 가져가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사명이자 원동력은 이 유산과 신뢰성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수집한다는 것은 그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두는 것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의 직함을 사장이나 최고 경영자가 아닌 최고의 ‘사냥꾼Hunter’이라고 칭하는 데이비드와 ‘이야기꾼Storyteller’ 빅터, 두 사람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들은 보물을 찾아다니고 이야기를 모은다. 수집은 잊힌 시간을 붙잡아두는 행위다. 우리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수집가들을 통해 그 시대를 기억한다. 그들 주변에서 앞으로 쌓일 또 다른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