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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윤희
만화가 이윤희
불어오는 그림,
어디 멀리에선가
이윤희의 그림을 처음 받던 날을 기억한다. 그녀의 그림은 메일로 왔다. 다운로드를 받아 압축을 풀고 파일을 열어서 그림을 보았다. 다분히 디지털적인 과정이었지만 그녀의 그림은 아주 먼 곳에서, 액자 안에 정성스레 담아 우표를 붙여 보내온 듯했다. 불현듯 부는 바람처럼, 그녀의 그림은 나를 불렀다. 어디 멀리에선가.
INTERVIEW 만화가 이윤희
일상과 환상 사이
윤희 씨를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해야 할까요, 만화가라고 해야 할까요. 처음엔 일러스트레이터로 만났는데요, 그렇죠?
저는 애니메이션을 전공했어요. 주로 만화를 그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영상 쪽에 가까워요. 점토로 모형도 만들고, 영상을 만드는 툴도 다루고, 촬영도 하고요. 그런데 그림으로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최선이라고 생각해 청소년 단행본의 삽화를 그리면서 일을 시작하게 됐죠. 만화는 이제 시작이고요.
그래서 처음 《안경을 쓴 가을》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나요. 만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안경을 쓴 가을》은 2년 정도 작업한 책이에요. 원래 짧게 단편을 그리기는 했어요. 그러다 출판사 ‘쎄프로젝트’에서 제안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가을이’는 윤희 씨가 열여덟 살 때부터 함께 한 강아지라고 들었어요. 가을이를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린 이유가 있나요?
원래는 20페이지 분량의 단편이었는데, 그걸 발전시켜서 장편으로 만들었어요. 사실 4년 전부터 집을 나와 떨어져 살면서 가을이를 거의 보지 못했어요. 한창 만화를 작업 할 무렵에 가끔 집에 갈 때면 가을이는 늙었고 병들어 있었죠. 활기 넘치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다가도 현재의 가을이를 보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어요. 《안경을 쓴 가을》이 책으로 나오기 한 달 전 하늘나라로 갔어요. 작업을 핑계로 집에 가는 일이 더욱 드물었는데 고맙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제가 오기를 기다려줬어요. 책이 나오기까지는 기다려주지 못했지만요.
가을이가 안경을 쓰면 사람이 되는 설정도 귀엽지만 크루아상 굽는 강아지, 가을이의 정체를 밝히려는 고양이 등 재미있는 캐릭터가 많아요.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된 건가요?
가을이처럼 말을 할 수 있는 캐릭터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각각 다른 환경과 운명을 가진 동물들을 등장시키게 되었어요 연남동에 살면서 동네 산책을 자주 했는데 자연스럽게 길고양이에 관심이 생겨 캐릭터로 구상했고요. 신기하게도 만화작업을 하던 도중에 우연히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어요. 강아지는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비숑 프리제를 모델로 만들었어요. 그 외에도 길에서 고함치는 할아버지 캐릭터는 연남동에서 실제로 자주 마주치던 할아버지를 모델로 했죠.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되고 있는 <열세 살의 여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처음에 저에게 ‘어린이 연애권장 만화’를 제안해주셨어요(웃음). 드라마 같은 것도 거의 안 보고, 연애 이야기를 많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재미있게 작업하고 있어요. 제가 열세 살이었던 1998년 여름으로 배경을 구상하다 보니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친구들에게 그 시절의 경험을 물어보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90년대의 기억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제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와 기억에서 얻은 소재들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세계가 조금씩 만들어져 가는 게 재미있어요.
일러스트와 만화라는 다른 작업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을 것 같아요.
만화를 그리면서 일러스트에서 느꼈던 갈증이 많이 해소됐어요. 개인적으로는 ‘애니메이션을 할 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죠. 일러스트는 무작정 좋아서라기보다는 일로 시작해서 간혹 어려운 점이 있었거든요. 또 일러스트는 글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데, 제가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니 수월한 면도 있었고 진짜 내 작업이다,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작업하는 과정이 궁금해요.
스케치를 거의 완성본처럼 그려요. 무식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죠(웃음). 그런데 저는 콘티를 짤 때 완벽하게 완성해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거든요. 그 후에는 컴퓨터로 그림을 대고 손으로 따는 작업이에요. 그때는 머리를 비우고 단순 노동처럼 하죠.
일러스트를 맡기면 항상 글과 어우러지지 않아 힘든 부분이 많은데, 윤희 씨의 그림은 항상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만화를 그리며 글을 쓰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나요?
사실 어라운드에서 했던 일은 잘 맞았고 저를 믿어주셔서 수월하게 그렸던 편이에요. 다른 일들은 저도 힘들게 하는 것들이 많거든요. 일러스트는 글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작업하려고 해요. 제 스타일이 있지만 글이랑 어우러지게끔 구상하면서 내용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선, 색, 대상 등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아요. 윤희 씨는 어떤가요?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겨요. 자료가 있으면 꼼꼼하게 그릴 수 있으니 많이 찾아봐요. 자료에서 현실적인 부분을 구체화하고 그 속에서 어떤 부분을 변형해 일상에서 벗어난 요소를 만드는 걸 좋아해요. 저는 특히 이미지에 집착하는 편인 듯해요. 이 장면에서는 꼭 이런 집이어야 하고 꼭 이런 카펫, 전화기, 바닥재를 써야 한다는 등 하나하나 신경 쓰는 편이죠. <열세 살의 여름>도 제가 1998년이라는 특정한 시기를 정하고 그리는 거라 고증을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윤희 씨의 만화를 보다 보면 향수가 느껴져요. 말씀하셨듯 배경은 사실적이고 일상적이지만, 캐릭터들은 어딘가 일상에서 한 발 비켜 난 느낌을 주거든요. 《안경을 쓴 가을》의 형이나, <열세 살의 여름>의 산호, 단편만화 <온실>의 여자와 파인애플 남자처럼요. 이런 인물을 그리는, 혹은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그린 캐릭터들이 괴짜일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네요(웃음). 제가 일상을 소재로 한 환상 장르를 좋아하다 보니 독특한 캐릭터를 평범한 배경에 던져 넣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구상하는 거죠. 실제 삶에서도 독특한 사람을 만나면 관심이 많이 생겨요.
만화 속에 오래된 연립주택이 많이 나오던데 어릴 때 살던 곳이 궁금해요.
어릴 때 시간을 보낸 곳은 둔촌동이었어요. 서울의 끝인데 꼭 시골 같기도 한 곳이죠. 아파트도 많았지만 그만큼 주택도 많았고요. 독립하고 연남동에서 지내다가 지금은 친구랑 인천에서 살아요. 집을 구하러 인천을 돌아다니는데 꼭 90년대로 돌아간 줄 알았어요. 그런 풍경이 작업에 도움이 많이 되기도 해요. 사실 진짜 옛날 집으로 구해볼까 생각도 했었어요(웃음).
다른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영감을 받는 편인가요?
예전에는 영화나 음악, 문학을 접하면서 영향을 받는 게 컸는데, 어느 순간부터 흡수가 잘 안 되더라고요. 흡수하는 시기가 있다고 해야 하나. 옛날에는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았다면 요즘은 제가 사는 삶에서 많이 얻으려고 해요. 제가 경험한 것이나 생활 속에 있는 것들이요.
사는 대로 쓰지 못하고, 그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리감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들려요.
비슷한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작업하지 않을 때는 그림을 많이 그리는 편이 아니에요. 정말 안 그리거든요, 반성할 정도로. 개인적으로 자신의 작업이 삶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노석미 작가님 같은 분들을 좋아하고 부러워해요. 예전에는 작업이 1순위였는데, 요즘은 작업 외의 삶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삶의 질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웃음).
그럼 작업하지 않을 때 좋아하는 일은요?
요즘은 어디 가야지, 하고 기대하며 계획을 세우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지방으로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여행 가요. 혼자 가서 아는 사람 만나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남해, 통영, 진주에 다녀왔어요.
만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아직 구체적인 이미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허지영 작가와 함께 《더스트 클럽Dust club》이라는 가벼운 책 한 권을 기획하고 있어요. 지금은 제가 아예 모르는 인천이란 곳에서 친구와 살고 있는데, 친구와 낯선 동네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이윤희가 그린 만화
열세 살의 여름
이윤희 지음 | 고래가 그랬어
1998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해원은 아빠가 일하는 곳으로 가족들과 휴가를 간다. 그곳의 바다에서 우연히 같은 반 친구 산호를 만난다. 방학이 끝난 후 해원은 아는 게 없었던, 그리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산호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매달 연재 중이다.
안경을 쓴 가을
이윤희 지음 | 쎄프로젝트
사람들이 집을 나가고 혼자 있는 반려동물들은 무얼 할까. 사실 ‘가을이’는 두 발로 걸을 줄도 알고 말도 할 줄 아는 강아지다. 그리고 가족 중 유일하게 ‘형’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형은 가을이에게 안경을 주고 자신의 역할을 해달라며 집을 떠난다. 어설프게 사람 행세를 하며 한 계절을 보내는 동안 동네 고양이는 가을이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이윤희가 추천하는 소설
마르코발도 혹은 도시의 사계절
이탈로 칼비노 지음 | 민음사
도시의 어딘가에서 정말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을 판타지적으로 엮은 책이다. 예를 들어 공장 폐수나 세제 남용으로 인한 강물오염, 도시 속에서 터전을 잃어가는 작은 동물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함박눈 등 흔한 일상을 소재로 한 상상력이 작업할 때 즐거운 환기가 되어준다.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 민음사
겨울의 이미지를 좋아해서 가끔 꺼내어 읽는 책이다. 글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아름다운 묘사들을 읽으면서 이미지를 상상하고 싶을 때 꺼내보게 된다.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에디터·포토그래퍼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