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해운대구 중동 1405-1

대림맨숀
바다를 곁 하고

주소를 따라 걸음을 재촉하면 낯선 곳에 뚝 떨어진 것 같은 황토색 맨션이 보인다. 변화의 상징들을 등에 두른 채로 48년의 시간을 버틴 대림맨숀. 낡은 계단을 따라 천천히 둘러본다.

뚜렷한 경계와 다정한 공존

파도가 몰고 오는 설렘을 찾아 당도하는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연일 사람들이 붐비고 모래사장을 따라 번쩍거리는 빌딩들이 줄 서 있다. 관광객을 맞이하는 호텔과 각종 명품 브랜드의 쇼룸도 즐비하다. 신도심을 채운 변화의 물살에도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공간이 있다면, 바로 대림맨숀이다. 콧대 높은 빌딩들이 한참을 내려다봐야 하는 대림맨숀은 1975년 준공된 복도형 아파트로 지상 5층짜리 건물이다. 황토색 외벽에는 ‘大林맨숀’이라 쓰인 대리석 문패가 달려 있고, 낮은 문턱을 넘자마자 격자무늬 타일 바닥과 오래된 계단이 보인다. 본래 맨션은 고급 주거 단지의 속칭으로 쓰이던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세월을 머금은 아파트의 이름으로 곧잘 보인다. 그래서일까, 대림맨숀을 걷는 행위는 마치 정지된 시간을 유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손이 닿아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계단 손잡이, 군데군데 움푹 패인 벽과 무심하게 칠해진 페인트, 좁은 문과 낡은 편지함. 하교 시간이 지난 후 학교에 들어선 듯한 고요함 속에서 나만의 속도대로 내딛을 수 있다.

대림맨숀의 겉을 보고 아는 것이 신과 구의 공존이라면, 속을 보고 아는 것은 주거와 상업의 공존이다. 현재 대림맨숀에는 다수의 입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외 공간은 브랜드 쇼룸이나 디저트 숍, 갤러리, 편집 숍 등의 상점이 채우고 있다. 상가와 주거 공간의 층을 분리하는 현대식 아파트와 달리, 주민들이 거주하는 공동주택에 상점들이 자유롭게 들어선 것은 이례적인 모습이다. 그 엉뚱한 그림이 간판도 표지판도 없는 대림맨숀으로 걸어 들어오게 만든다. 물론 함께 쓰는 공간이기 때문에 입주민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어딘가에서 당도한 사람들과 뿌리내려 살아온 주민들이 어우러지며 다정한 공존을 만든다.

Kew

우연히 발견하는 아름다움

잔잔한 걸음으로 일 층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끝에서 상점 하나를 만난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수집해 풀어둔 편집 숍 Kew. 107호의 단단한 문을 당겨 안을 살펴보면 왼쪽 편에 더 작은 입구가 보인다. 고개를 살짝 숙여 그곳으로 들어가니 짙은 녹색빛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이나,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것처럼 덩달아 마음도 들뜬다. 본래 편집 숍 Kew는 온라인 상점으로만 운영되다 올해 초 오프라인 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초록 풀에 대한 애정을 모아 상점을 꾸린 김경민 대표는 이름도 영국의 식물원인 ‘큐 가든Royal Botanic Gardens, Kew’에서 따왔다. 식물 관련 아트북과 해외 도서, 식물 드로잉 제품이 마련되어 있으며, 직접 국내외를 유영하며 모은 예술품과 식기들도 만나볼 수 있다. 공간의 빈틈을 채운 다양한 식물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도 특별한 재미다. 보물 상자를 숨겨두듯 아늑한 107호에서 누군가의 취향을 경험하자.

“대림맨숀은 바다 가까이 있지만 숲의 매력을 가진 곳이에요. 세월을 알 수 없는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맨션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며칠 전, 그 나무들의 꼭대기에서 새 둥지를 발견했어요. 놀러 오는 게 아닌 살아가는 새들의 소리를 듣고는 이 공간이 바쁜 도시의 숲이라는 걸 실감했어요. 그 안에서 편집 숍 Kew는 드러나기보다 발견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우연한 아름다움을 찾아보세요.”

논픽션

부산 기억에 스미는 향

107호에서 나온 후 복도 끝 계단을 따라 한 층 위로 올라가 본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207호의 틈새로 포근한 향이 퍼진다. 향을 매개로 내면의 힘을 표현하는 뷰티 브랜드 논픽션은 2020년 5월 대림맨숀에 부산 쇼룸을 열었다. 층을 넘나들며 두 개의 공간을 활용한다는 점이 특징인데, 먼저 207호에는 픽셔니스트가 상주하여 논픽션을 찾은 이들의 취향에 따라 최적의 제품을 안내한다. 시향과 구매, 포장까지 함께 하는 207호가 선택의 공간이라면 306호는 경험의 공간이다. 언택트룸이라는 이름 아래 무인으로 운영되는 306호는 마음 한편 꿈꾸던 거실을 옮겨둔 듯한 풍경이다. 식물로 채운 작은 발코니와 올리브그린색 카펫, 호두나무 프레임은 느긋한 휴식의 분위기를 만든다. 너른 창으로는 분주한 도심이 보이지만, 306호 안은 달콤한 향과 나긋한 음악 소리에 평온함만 흐른다. 갈색빛 테이블에서는 공간을 만끽하며 메시지 카드도 적어볼 수 있다. 논픽션은 잠시 멈춘 시간이 더 짙은 향기로 채워지길 바라며, 우리를 대림맨숀으로 초대한다.

“도회적인 무드로 변화해 온 해운대 일대 풍경 속, 대림맨숀이 지닌 고요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마주하길 바라는 논픽션과 한데 어우러지는 공간이죠. 논픽션 부산은 다양한 감각을 환기하고 부드러운 감정들을 일깨우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쇼룸에 머물면서 느낀 경험의 잔상이 부산에서의 추억과 함께 지속되는 걸 경험해보세요.”

갤러리ERD

산책하듯 만나는 예술

306호를 나온 발걸음은 바로 옆, 문이 열린 305호를 향한다. 작은 공간을 채운 그림들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갤러리ERD의 공간이다. 갤러리ERD는 2016년 서울 이태원에 개관하여 동시대 현대미술과 다양한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국내외 작가들의 개인전을 활발히 진행하고 아트 페어 등에 참여하여 대중과 가까운 예술을 만들기 위해 힘쓴다. 대림맨숀 305호에 문을 연 것은 2020년으로, 전시 플랫폼의 다변화를 꾀하기 위해 예술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부산에 상륙했다. 군더더기 없이 하얀 공간은 전시마다 표정을 달리하며 작품과 가장 어우러지는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잠시 산책하듯 들르기 좋은 규모의 갤러리이기 때문에, 대림맨숀의 계단과 복도를 오르내리던 이들은 우연히 만난 예술 세계의 문을 반갑게 열어본다. 맨숀의 한편, 푸른 나무들을 마주한 갤러리ERD에서 일상에 스며든 예술을 발견해 보자.

“갤러리ERD는 국내 젊은 작가들의 전시와 작품 세계에 초점을 맞춰 연 10회 이상 전시를 개최합니다. 앞으로도 부산의 예술 애호가 또는 이 도시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싶어요. 갤러리가 자리한 대림맨숀은 동서고금이 공존하는 듯한 매력적인 공간이에요. 맨션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과 함께 예술의 세계를 즐겨보세요.”

Ⓒ갤러리E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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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