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안에서 일어나는 일

어떤 날 제주

어떤 날 제주

봄 안에서
일어나는 일

방학 동안 관광객과 동네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던 버스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늘었다. 차창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해 자리에 앉아 깜빡 조는 날도 많아졌다. 낮이면 거실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고양이 제제는 지저귀는 새 소리에 자주 잠에서 깨어 하루에도 여러 번 창문으로 달려간다. 바야흐로 봄이다.

제주에는 봄꽃이 피었느냐고

제주도에 살고 계시는 피아니스트 임인건 선생님께서 공연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봄을 쫓아서 전국을 여행해보고 싶다고. 제주에서 시작해 저기 북녘까지 꽃이 피는 길을 따라 달려가 보고 싶다고 하셨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꽃 소식을 물어왔다. 제주에는 봄꽃이 피었는지, 이곳 하늘은 흐린데 그곳의 하늘은 어떠하냐고 묻는다. 봄이 어디쯤 왔는지 보려고 남쪽을 향해 고개를 쑥 내밀어 보는 사람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었다. 서울 근처 어느 빌딩 속에 앉아서, 제주와 고창 그리고 지리산을 그리워했다. 저 아래는 봄이라던데 여기는 아직 봄이 아닌 것 같아서 초조하기도 하고 싱숭생숭하기도 하던 봄의 어느 시절. 

제주시에 지내고 있는 지금,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느낀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봄을 찾아 남쪽으로 달려 보기로 했다.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도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는 남조로를 타고 서귀포로 내려갔다가 5.16도로를 타고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한라산 동쪽을 지나는 도로인 남조로는 이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넓은 대륙을 달리는 양 도로는 쭉쭉 뻗었고 시야가 시원시원하다. 5.16도로는 성판악을 지나는 도로라 한라산 깊숙한 곳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길이 고불고불하고 험한 편이다. 안개라도 낀 날엔 운전대를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5.16도로의 백미인 숲터널을 지나는데 운전을 하고 있던 남편이 “벚나무네.”라고 중얼거린다. ‘아 벚나무….’ 꼭 ‘빨강머리 앤’이 된 마음으로 아직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꽃을 그려본다. 벚꽃 잎이 흩날리는 눈부신 한라산을 상상해 본다.

겨우 사십 분 남짓 차로 달렸을 뿐인데, 차창 밖 기온이 5도쯤 올라갔다. 걸치고 나온 겉옷을 벗어들었다. 봄이다.

동백 다음은 목련

남원 포구에서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올레길 5코스, 동백 군락지에 동백이 지고 있다고 했다. 제주는 바람이 많은 섬이라 떨어진 동백꽃이 언제 바람을 타고 바다로 날아가 버릴지 알 수 없다. 그러기 전에 우선 서둘러 동백을 잡으러 가기로 했다.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키가 큰 동백나무가 마을 골목길에 울창하게 서 있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얼굴로 동백꽃이 툭 떨어져 그대로 맞았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피어있는 동백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동백이 더 많다. 활짝 핀 그대로 지는 꽃, 동백. 촌스러워 더 탐스러운 빨간 동백을 보자 귀에 꽂아보고 싶어졌다. 꽃봉오리 하나 주워들어 살짝 꽂았다가 서둘러 내려놓는다. 

동백 군락지 앞에는 작고 단정한 카페가 하나 있다. ‘와랑와랑’이라는 이름, 밝은 얼굴의 인상 좋은 부부가 직접 원두를 볶고 손으로 내려주는 카페. 무엇보다 커피 맛이 아주 좋았고 콩가루를 곱게 뿌린 찰떡 구이도 고소했다. “동백이 거의 졌네요. 혹시 주변에 목련은 없나요? 하얀 꽃은 어디에 있을까요?” ‘와랑와랑’ 사장님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목련은 그냥 동네 곳곳에 있는데….”
언젠가 엄마, 이모와 함께 포르투갈 리스본을 여행했을 때,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숙소 주인장에게 물었다. “리스본은 빨래가 유명하다던데…. 빨래는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그때 그가 짓던 표정과 비슷했다. “빨래요? 이 동네에 그냥 집집마다 널려있는데….” 피식 웃음이 난다. 

커피를 마시고 나와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햇살이 좋고 바람이 따뜻하다. 동네를 걷는 동안 목련 나무는 찾지 못했지만 이름 모를 들꽃과 하귤나무 아래에서 귤을 파먹는 새를 만났다. 서귀포의 새는 동백꽃 사이를 날며 귤을 먹고 사는구나. 이즈음 서귀포는 노지 귤과 레드향 철이 지나고 천혜향과 한라봉이 한창이다. 추운 겨울날 이불 속에서 까먹는 귤도 일품이지만, 따뜻한 봄날 꽃향기를 맡으며 까먹는 귤도 맛이 좋다. 코끝에선 소박한 동백꽃 냄새가 나고 손끝에선 달콤한 귤 냄새가 났다.

빨강 머리 앤의 친구 다이애나

이중섭 거리에 목련이 한창이라는 정보를 듣고 서귀포시로 향하던 길이었다. 도로 오른편에 작은 초등학교는 여고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가 선생님으로 있는 학교다. ‘하례 초등학교.’ 불쑥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토요일이라 텅 비어있는 운동장. “나 하례 초등학교 운동장이야!” “앗 나 학교, 학교! 잠시만.” 휴대폰을 내려놓고 학교 건물을 향해 뛰었다. 친구가 뛰어 나왔다. 우리는 여고 때처럼 두 손을 맞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있는 나는 ‘빨강 머리 앤’으로, 얼굴이 하얗고 머리카락이 까만 이 친구는 ‘다이애나’로 불렸었다. 여고 시절, 오락가락하는 마음의 진동을 결결이 함께 나누었던 친구. 마음 씀이 다이애나처럼 고운 친구였다. “목련 찾으러 가던 길에 네가 다니는 학교가 보여서 불쑥 들어왔어.” “우리 학교 교화가 백목련인데!” 여전히 얼굴이 뽀얀 그녀가 웃으며 학교 뒤뜰로 안내했다. 하얀 목련이 탐스럽게 활짝 피어있다.

하례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반이 하나밖에 없고, 반마다 학생 수가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한층 짜리 작은 학교다. 나지막한 학교 앞으로는 바다가, 뒤로는 아직 채 눈이 녹지 않은 한라산이 넓게 펼쳐져 있다. 남편이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목련 나무가 보이는 학교 벽에 기대서 그녀와 짧은 수다를 떨었다.

여고 3년 내내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낸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랜 시간 서울과 부산에서 떨어져 살았다. 그러는 동안 일이 년에 한번 겨우 만나 하룻밤을 다 털어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나머지 시간에는 서로 잘 지내겠거니, 짐작하고 말았다. 그런 우리가 지나다가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게, 그럴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봄의 제주에서.

꽃들의 릴레이

동백과 목련, 그리고 나의 다이애나를 만나고 다시 제주시로 돌아오는 길. 휴애리에 들러 어느새 거의 져버린 매화 사이를 걸었다. 향이 은은했다. 야생 수선화가 피면서 시작되는 제주의 봄. 동백이 지고 나면 목련이 핀다. 그사이 매화가 지고, 그러는 동안 유채는 한창이다. 그리고 곧이어 벚꽃이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 봄 안에서 이어지는 꽃들의 릴레이. 서울에 살 때는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짧은 출퇴근 길 고작해야 개나리 몇 가지와 벚나무 몇 그루에 핀 노랗고하얀 꽃을 보며 봄이 왔구나, 알아차릴 뿐이었다. 개나리가 먼저인지 벚꽃이 먼저인지 아니면 목련이 먼저인지, 그것까지 헤아리기에 봄은 짧았고, 마음은 바빴다. 어쩐지 올봄이 생애 처음 만난 봄 같다. 

제주 하늘은 맑고, 바람은 따뜻하다고, 봄꽃이 한창이라고, 서울의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곧 봄이 갈 거라고. 이 바람과 꽃을 가지고 그리로 갈 거라고. 

찾아가는 길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동백나무 군락지는 남원에서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올레 5코스 중간에 있다.
카페 ‘와랑와랑’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동백나무가 보이고, 올레길 표시 리본도 보인다.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730번 버스를 타거나 서귀포 시내에서 100번 버스를 타면 대중교통으로도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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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