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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그곳에 같이 가자. 그 약속을 몇 년간 했던 것 같다. 무더위로 늘어지던 여름에도,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걷던 가을에도, 눈보라 치는 창밖을 바라보던 겨울에도 같은 약속을 입에 올렸지만 정작 봄이 오면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 봄에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리란 걸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다 져버린 어느 날이었다. 이번 봄도 그렇게 가고 말았다는 걸 깨달으며 우리는, 남쪽으로 가는 표를 끊었다. 그런데 그게 왜 꼭 봄이어야 했을까? 묻고 나니 막상 이유가 없어 허무히 글·사진 김신지 에디터 김건태 웃게 되는 질문. 친구와 처음으로 함께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기억 속 풍경에
닿기 위한 여행
그러고 보니 어쩌다 이번 여행이 처음이 되었을까? 같이 보낸 시간이나, 그동안 나눈 마음의 밀도로 보면 우리는 몇 번이고 함께 여행을 했을 만한 사이였다. 그런데도―그런 것과 무관하게―여태껏 하루 이틀 가까운 곳으로도 같이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번 여행에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거나, 사소한 일로 행여 사이가 틀어지지나 않을까 새삼스레 신경이 쓰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처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그렇게 되는 데에 실은 별다른 이유도 없다는 것이.
친구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섬진강 인근의 작은 마을이었다. 몇 년 전엔가 그곳에 갔을 때, 취해 잠든 사람들 틈에서 눈이 일찍 떠진 탓에 아침 산책을 한 적 있었다. 그리고 흐드러진 벚꽃 나무 아래 강을 향해 놓인 평상 하나를 발견했다. 벚나무는 부풀어 오른 꽃잎이 무겁기라도 한 듯 강을 향해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아침 햇살에 비친 강은 수없이 많은 물비늘을 반짝이고 있었다. 눈을 떼지 못한 채로 평상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해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이었는데도 그새 볕이 데워놓은 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이런 풍경 앞에 앉아서 (아침이거나 말거나) 맥주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풍류라는 말을 만들어낸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잠깐 걷다 돌아올 생각으로 나온 길이었기 때문에 주머니 속엔 동전 한 푼 없었다. 있다 해도 주변에 문을 연 구멍가게 하나 있을 법하지 않은 게 또 문제였지만. 결국은 한참 앉아 있다 돌아가는 것으로 그 아침의 산책을 마쳐야 했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기에 그 풍경은 기억 속에서 점점 더 아름다워졌다. 친구에게 그 평상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나는 거기 가서 반드시 모닝 맥주를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물었다. “그래서 네 평상은 어디 있는 거야?”
어느새 ‘내 평상’이 되어버린 그 풍경을 찾으려니 기억이 아스라했다. 친구가(어쩌면 내가) 실망할까 싶어 빤히 기억나더라도 조금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일단은 숙소부터 가자고 하며 걸음을 옮겼다.
오래 앉았다
가고 싶어지는 풍경
기억을 더듬어 예약해둔 숙소는 작은 마을 안쪽에 있었다. 그 마을의 가장 꼭대기 집이라고 해도 좋을 언덕 위였다. 2층 방에 들어서 창을 보자마자 친구는 감탄했다. 창 너머가 온통 차 밭이었다. 비탈에 계단처럼 칸칸이 늘어선 차나무는, 마치 누가 창 너머에 그려놓은 잘 정돈된 세계 같기도 했다.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제법 먼 길을 걸어왔으므로, 우리는 좀 지쳐 있었다. 봄이 가고 있는 시골의 대기는 들판에서, 물가에서, 저 멀리 산속에서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식물의 호흡으로 어딘가 훅훅한 기운마저 주었다. 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을 만나면 멈춰서 사진을 찍고, 앉았다 가라고 누군가 내어둔 의자를 만나면 또 앉아 쉬어가느라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오는 길에 본 붉은색 소파에는 오래토록 앉아 있었다. 굽이쳐 흐르는 강 옆으로, 그 풍경에 어울릴 법한 나무 벤치도, 앉을 만한 모양새의 판판한 돌도 아닌 뜬금없는 일인용 소파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낡은 소파를 감싼 꽃무늬 천은 읍내의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에나 있을 법했다. 그런데도 그것이 묘하게 풍경과 어우러졌다. 어디에서 온 의자일까, 누가 내놓은 의자일까, 궁금해하며 주위를 살피다가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찻길 건너편에 붉은색 꽃무늬 천을 쏙 닮은 모텔 한 채가 서 있었다.
소파는 저 건물의 어느 방에선가 (쓸모를 다해) 내놓아졌을 것이다. 소파로서야 나쁘지 않은 외출이다. 모르긴 몰라도 바닥에 떨어진 무수한 꽃잎들이 날리는 동안, 이곳에서 ‘쉬어 가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을 것이다. 이제는 봄이 지나간 자리에서 사람들이 아닌 소파가 거기 앉아 풍경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몇 남지 않은 꽃잎이 바람에 날렸다. 시간이 더디 흐르는 오후였다.
밤에는 숙소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여름이 오기 전까지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를 적었다. 보름 뒤면 새로 이직하는 회사로 출근하게 되는 친구는 이제 막 일과 일 사이, 꿈같은 휴가를 시작한 참이었다. 쉬는 동안 할 일을 가득 적어왔다며 친구는 쪽지를 꺼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적으며 깔깔대는 것은 스물 몇 살 난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일 중의 하나였다. 오래된 것, 그럼에도 여전한 것들… 그런 것들만이 쉬이 변하는 세상에서 안도감을 주었다. 친구에게 말은 못했지만, 낮 동안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실은 너무 많이 변해버린 풍경들을 본 참이었다. 없던 것들이 들어서 강가의 풍경을 해치고 있기도 했고, 기억하던 것들이 너무 말끔한 새 단장을 해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평상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이유가
생길 때까지
이튿날 아침,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 우리는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산책길에 나섰다. 외투 주머니 속에 어제 사 온 맥주를 한 캔씩 넣고서.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양쪽으로 늘어선 집이나 나무의 풍경을 기억하며 걸었더니 오래 걸리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내내 말해왔던 그 평상을.
봄이 가버린 뒤였기 때문에, 기억에서와는 달리 꽃잎은 모두 지고 없었다. 꽃이 지면 나무가 연둣빛으로 보일 줄 알았는데, 가지 끝에 붉은 꽃받침이 남아 있는 나무는 멀리서 보면 불그스름했다. 나무 평상이 아니라 철제 평상이었고 가문 탓인지 강물은 많이 줄어 있었다. 기억과 다르다는 실망은 들어올 틈도 없었다. 반갑고 다행스러웠기 때문이다. 평상이 그대로 있다는 것에 안도해, 다리를 건너자마자 “저기야!”하고 반가이 소리까지 쳤을 정도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 맥주 한 캔씩을 마시고 세상 제일 할 일 없는 한량들처럼 볕을 쬐며 누워 있었다. 배가 고파 이제 그만 돌아갈까, 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숙소에서 짐을 챙겨 나왔을 땐 오후였다. 서울행 버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시골 마을 작은 정류장에선 한참을 기다려도 읍내 가는 버스가 오지 않았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우리가 어수룩해 보였는지, 차 한 대가 서더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읍내 터미널이요.”, “타세요!” 인심을 쓴 동네 아저씨는 손님을 태워놓고 별말이 없었다. 친구로 보이는 보조석에 앉은 이와 오후엔 두릅이나 따러 갈까, 하며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별다른 궁금증도 없이 여행객을 선선히 태우고, 오후엔 두릅이나 따러 갈까 고민하는 삶을 잠시 상상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누군가의 삶을 짐작하려는 일이 늘 그렇듯이. 강을 따라 달리던 차가 꽃이 다 져버린 벚꽃 길에 들어서자 친구가 휴대폰을 꺼내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꽃 보러 왔어요? 왜 이런 시기에 왔대요. 벚꽃은 지금 서울이 더 이쁠텐디.” 꽃을 보러 온 길도 아닌데,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자 허탕만 치는 술래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실은 그 보잘것없는 평상을 보러 왔다 말한다면 우린 또 얼마나 실없는 여행객이 될까. 친구와 나는 뒷자리에 앉아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 많은 것이 바뀌고 새로 생겨났지만, 그리웠던 것은 다행히 제자리에 있었고, 호들갑 없이 다시 만나 그때 못다 한 일을 해내었던. 이젠 무슨 이유를 만들까. 무슨 이유를 만들어, 또다시 언제 지켜질지 모를 약속을 매년 반복할까. 그 생각으로도 돌아가는 길이 짧을 것이었다.
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김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