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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림·봉우리ㅡ백합도자기
커피를 내리는 남자와 흙을 어루만지는 여자는 인생의 반을 함께 보냈다. 고등학교 때 주고받았던 편지는 셀 수 없이 쌓였고 다정한 문장을 쓰고 읽던 날들은 오늘까지 선명히 남아 있다. 서로의 취향을 말하는 동안 느껴지는 자연스러움과 당연함. ‘우리’로 같이 보냈던 시간들이 모여 오늘 두 사람의 공간을 빼곡히 채워간다.
커피 향이 참 좋네요.
혜림: 원두가 잘 맞아 다행이네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커피부터 내리는 게 저희 습관이에요. 오시면 꼭 내어드리고 싶었어요.
감사해요. 최근에 우리 씨가 커피 내리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죠.
우리: 원래 커피를 좋아해서 매일 하는 일이라 특별하게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이런 습관이 ‘루틴’으로 불리더라고요. 그런데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아서 어떤 원두를 썼는지, 어떤 맛이 나는지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는 게 아쉬웠어요. 꾸준히 기록으로 남길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혜림이가 기획을 도와줬어요(웃음). 원래는 일지만 쓰다가 요즘에는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기 시작했어요.
두 분의 합이 잘 맞아 보여요. 백합도자기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역할은 어떻게 정하셨나요?
혜림: 사실 성향은 정반대예요. 그래서 더 잘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전공했고, 우리 씨는 이과에 있었거든요. 백합도자기를 운영할 때도 할 일이 확실히 나뉘어 있어요. 저는 도자기를 만들고 기획을 담당하고요. 제가 숫자에 약해서(웃음) 우리 씨가 경영과 행정 분야를 맡아주고 있죠. 홈페이지 관리부터 제품 사진 촬영까지 도와주고 있어요.
우리: 사실 저는 ‘투잡’으로 일하고 있어요. 작년 여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백합도자기 일을 하면서 오후에는 바텐더로 일하고 있거든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아직 배우는 단계예요.
혜림: 술을 잘 못하는데 바텐더 일을 하고 있네요(웃음). 요즘이 저희에게 격변의 시기라,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어요.
어떤 변화의 시기인가요?
혜림: 언젠가 둘이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어서 조금씩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고 있어요. 원래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커피에 관심을 뒀는데요. 최근에 주류 분야까지 시선을 넓혔어요.
우리: 커피랑 술은 닮은 점이 많더라고요. 테이스팅하는 방식도 비슷해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배우고 있어요.
혜림: 카페 공간을 운영하면서 한쪽엔 백합도자기 작업 공간도 두고 싶어서 잘 맞는 공간을 찾으려고 부동산을 열심히 돌아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이 집을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여기다!” 하는 곳이 없었어요. 정말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하면 생각도 확장되면서 착착 진행될 텐데 아직 운명 같은 공간을 못 찾은 것 같아요.
우리: 그래서 당장 하자는 마음은 접어두고 지금 준비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자고 생각을 다잡은 상태예요.
이 집이 두 분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들었어요. 서울에서 단독주택에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죠.
우리: 맞아요. 저희에겐 작업실이 없어서 집이라는 공간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이 집을 보자마자 계약해야겠다는 확신이 섰어요. 작지만 마당도 있고 창도 넓었고요. 혜림이가 식물을 좋아하니까 여기가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혜림: 전에는 주로 관리가 쉬운 건물에 살아서 집에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몰랐어요. 겨울이 되면 눈을 쓸어야 하고 수도가 막히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해요. 주택이라 수고로운 일이 많지만 계절을 체감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돌보며 살고 있어요.
그래도 한곳에 오래 살다 보면 공간에 권태를 느낄 때가 있지 않나요?
우리: 물론 그럴 때도 있죠(웃음). 마당이 더 넓었으면 좋겠다, 창이 더 넓으면 어떨까, 하는 사소한 바람들이요. 그래도 이 집과의 시간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걸 알아서 지금에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혜림: 전에 살았던 공간들을 돌아보며 지금 집의 소중함을 더 일깨우기도 하고요(웃음). 연애를 오래해서 예전에는 둘이 원룸에 살던 시기도 있었거든요.
연애 기간이 길었군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궁금해요.
혜림: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났어요. 편지를 주고받다가(웃음).
우리: 혜림이 친구랑 제 친구랑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어쩌다 우리도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정작 그 친구들은 서로 연락이 끊겼는데 얼굴도 모르고 편지만 주고받았죠. 공부도 안 하고(웃음).
혜림: 그리고 서로 얼굴 보고 실망했었지…(웃음)
기억나는 편지 내용이 있나요?
우리: 기억에 나는 건 별로 없어요(웃음).
혜림: 정말 사소한 말들을 주고받았거든요. 오늘 점심에 급식 뭐 나왔다, 수업 시간에 졸려서 지루하다 그런 얘기?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귀여운 대화들이었네요(웃음).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한 사람이 이 집을 채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혜림: 각자의 취향이 섞이면서 중화되기도 했어요. 저는 원래 무늬가 화려한 물건들을 좋아했는데 이 사람이 워낙 무던한 취향이다 보니 서로 보완되면서 자연스럽게 맞춰진 것 같아요.
서로의 취향을 설명해 볼까요?
우리: 혜림이의 취향은 과하지 않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어요. 유행을 좇지 않고 자기 색을 낸다는 점도 특징이고요. 혜림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래요. 백합도자기를 운영하는 방식도 남들이 쉽게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을 지양하고 본인이 만들고 싶은, 공유하고 싶은 물건을 만들어요. 그 물건에 용도를 정하지 않는 것도 혜림이답고요. 집도 사실 혜림이의 취향이 많이 반영됐어요. 식물을 가꾸는 일에 능숙한 것처럼 저보다 집을 꾸미고 채우는데 저보다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서 믿고 맡기는 편이에요.
혜림: 좀 감동인데요(웃음). 우리 씨는 깔끔하고 모던한 이미지를 좋아해요. 화려한 것보다는 한국의 단정함이랄까요. 뭐든 미니멀한 느낌을 좋아해요. 제가 흙을 좋아해서 그런지 흙색처럼 따뜻한 색감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저희 둘의 취향에 교집합이 있다면 채우지 않고 비운다는 거예요. 최소한의 것으로 단정히 정돈된 걸 좋아하는 점도 닮았고요.
서로의 취향이 집 안 곳곳에 잘 묻어나요. 혜림 씨는 집에서 도자 작업을 하고 있잖아요. 집에서 일하려면 스스로 정한 루틴이나 규칙이 있을 것 같아요.
혜림: 일단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부터 지켜가고 있어요. 요즘은 7-8시에 일어나려고 노력해요. 저는 회사에 다니다가 프리랜서가 됐는데 퇴사 직후에 생활이 많이 무너졌어요. 밤에 일어났다가 아침에 자는 일이 빈번했고요. 그런 생활이 꽤 행복했지만(웃음) 점점 자괴감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일찍 일어나기부터 시작해서 낮에 절대 침대에 가지 않기를 약속처럼 지키고 있어요. 책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할 일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져요.
언제 처음 도자 작업을 시작했어요?
혜림: 고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전공해서 자연스럽게 그림 일을 하고 있었어요. 어느 순간 권태를 느끼면서 취미 생활로 도자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제가 그림 그리는 것보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흙 만지는 느낌이 너무 좋더라고요. 어릴 때 지점토로 뭔가를 만들던 기억도 떠올랐고 차가우면서도 촉촉한 감각이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네요. 아직까지도 작업할 때 그 감각이 좋아서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작지만 기분 좋은 감각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었네요. 그래도 집에서 일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있지 않나요.
혜림: 아무래도 심바가 있어서 괜찮아요(웃음). 심바를 보면 마음이 편해져요. 쓰다듬고 있으면 불안하던 마음도 진정되고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심바가 꼭 제 어깨 사이에 기대는데 그럴 때 하루를 잘 마쳤다는 안정된 마음을 느끼기도 해요.
우리: 심바도 저희가 없으면 안 되겠지만 저희야말로 심바에게 의지하고 있거든요.
혜림: 저는 식물도 굉장히 아끼는데 심바와 식물을 돌보면서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있어요. 늘 곁에 있어서 인지하기는 어렵지만 작은 변화를 서로 바라보고 돌봐주며 살아가요. 이제 저희 가족에게 너무 당연하고 소중한 일상이 됐죠.
이곳에서 심바와 함께 만들어 간 루틴도 많겠어요.
혜림: 심바 덕에 저희가 본의 아니게 규칙적인 일상을 살고 있기도 해요. 아침에 커피를 내리고 심바와 꼭 산책을 나가요. 심바가 실내 배변을 하지 않아서 매일 꼭 반복해야 하는 일이에요.
우리: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꼭 나가야 해요(웃음). 날이 좋을 때는 하루에 세 번은 꼭 나가려 하고요. 심바가 저희를 부지런하게 만들어 주고 있어요. 동네 사람들이 알아봐줘서 심바 덕분에 좋은 인연들이 생기기도 했죠. 동네 주변에 성곽길이 있어서 심바가 너무 좋아하고요.
심바가 여러모로 이로운 역할을 하네요(웃음). 각자 작업하다가 막힐 때는 어떻게 풀어가나요?
혜림: 저는 풀기보다 피해요(웃음). 안 풀리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얼른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려고 노력하는데 오히려 그게 전환점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이런 문제 해결 방식에서도 우리 둘의 차이가 드러나요. 예를 들어 집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저는 좀 외면하는 편인데 여기는 뭐라도 찾아서 해결하려는 성향이거든요.
우리: 문제에 접근하는 걸 좋아해요. 완전 반대죠.
혜림: 각종 컴퓨터 문제나 세무서 일 등은 다 알아서 해줘요. 제가 못 하는 부분을 채워주는데 우리 씨가 항상 져주는 편이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네요.
우리: 보통 이런 차이가 있으면 갈등이 생길 수도 있는데 저희는 많은 부분을 대화로 풀어가요. 정말 긴 시간 대화를 하거든요.
혜림: 저는 감정 기복이 조금 심한 편이기도 한데, 그런 점도 잘 알아줘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대화로 이해하는 시간을 지나왔죠. 이젠 서로를 잘 기다려줘요.
우리: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괜찮아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 무엇보다 대화가 정답이죠. 이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함께 대화하며 서로를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과 공간, 식물과 심바까지요.
혜림: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서로에게 의지한다기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바라봐 주는 시선을 쌓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식물에 새 잎이 나는 걸 발견하고, 기록하고, 심바를 쓰다듬으며 아픈 곳이 있는지 살피고, 물건을 정성 들여 정리하는 일들처럼요.
우리: 사소하지만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마음을 툭 하고 건드리는 때가 찾아오죠.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