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보라 사람들

환상의 빛

보라보라 사람들

환상의 빛

처음 그곳을 알게 된 건 서울의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였다. 친구가 자기 교수님의 작품이라며 보여줬는데, 보라색과 주황색의 실크 원단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원단 색이 예쁘다는 나에게 친구가 뭔 소리냐며 웃었다. “앤텔로프라는 협곡이야. 미서부에 있는데 여기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색이 죽이게 나온대.” 다시 보니 돌이었다. 엄청나게 큰 돌이 빛을 받아 다채로운 색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순간 덜컹거리던 지하철 소리가 사라졌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얼마 전, 외가 식구들과 함께 가기로 한 미서부 여행 일정에서 다시 그 이름을 보았다.

그곳으로
가는 길

새벽같이 도시를 빠져나온 12인승 렌터카는 고속도로를 따라 빠르게 질주했다. 덕분에 어른들의 허리가 뻐근해지기 전에 목적지인 앤텔로프 협곡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차들이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어 놀랐다. 인디언 부족인 나바호Navajo족의 가이드 없이는 출입이 제한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언어를 쓰는 관광객들이 예약 순서에 따라 팀을 이뤄 자신들의 가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대열에 합류했다. 그때부터는 어린이날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부터 대기 시간 한 시간입니다. 여기서부터 삼십 분입니다. “태연이 여기 이렇게 사람 많은 거 알았니?” 둘째 이모는 별 뜻 없이 물었는데, 어째서인지 이곳에 사람이 많은 것이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뜨겁고 건조한 태양 아래 여든을 앞둔 가족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죄책감이 들었다.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물을 나눠 마시고, 사진을 찍어드렸다. 마침내 우리의 가이드가 다가왔다. “자 이제 앤텔로프 협곡 아래로 내려갑시다. 계단이 무척 가파르니 가족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해줘요.”

그곳에 도착했을 때
벌어지는 일

협곡의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시원해졌다. 먼저 내려간 큰 이모부의 작은 탄성이 들려왔다. 바로 뒤이어 울리는 막내 이모의 웃음소리. 그것만으로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햇빛이 우리와 함께 오랜 시간의 틈을 비집고 내려와 여러 색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계단을 유독 무서워하던 둘째 이모까지 바닥에 모두 도착하자 가이드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잃어버린 가축을 찾아 헤매던 어린 인디언 소녀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에요. 이 앞의 길은 한두 사람만 겨우 지나갈 만큼 좁으니 먼저 온 팀이 다 지나간 후에 이동할게요.” 다시 기다림이었다. 계단 위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다음 팀은 벌써 내려오고 있었다.

가이드를 따라 일렬로 서서 협곡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운 머릿결처럼 보이는 곡선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빗물이 세차게 흐르며 깎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따로 통역이 필요 없었다. 보는 순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침식, 풍화, 사암 같은 단어들이 가족들에게 나오고 있었다. 가이드는 씽긋 웃더니 내 카메라를 가져가 사진이 잘 나오는 색온도로 조작해주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엄마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위를 올려다보면 색이 계속해서 달라졌다. 노랬다가 붉었다가 푸르스름했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빛깔의 변화를 만끽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필 사진을 찍는 데 열중하는 앞 팀과 빠른 이동을 원하는 다음 팀 사이에 우리가 끼어버리는 바람에 상황이 복잡해졌다. 앞 팀의 가이드는 “여기서 찍어보세요.”, “이 돌의 이름은.”, “이 필터로 찍으면 잘 나와요.”라고 외치는데 뒤 팀의 가이드는 “움직여.”, “앞쪽으로.”, “사진은 사진일 뿐.”이라고 외쳤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나가는 좁은 통로가 계속되자 둘째 이모는 답답함을 호소했다. “갇혀 있는 느낌이야. 더 안 봐도 좋으니까 빨리 나가고 싶어.”

앤텔로프 협곡. 환상의 빛이 있는 곳. 가족들과 함께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으로 여행을 오는 데는 적지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계획을 세워야 했고, 일정을 조율해야 했고, 무엇보다 경비를 모아야 했다. 지금 이곳을 걷고 있는 다른 여행자들도 모두 그랬듯이. 그렇다면 그들은 예상했을까? 기대로 가득한 곳을 실제로 여행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나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당이 떨어졌는지 발이 후들거렸다. 황홀하게 휘어지는 갈색 돌을 빠져나가면서도, 그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 초코케이크나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은 목적지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무사히 협곡을 나와, 다시 차를 탔다. 다음 목적지까지 또 한참을 달려야 한다고 했다. 이제 쉬고 싶어 하는 어른들과 하나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어 하는 사촌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부모와 함께하는 여행은 자식의 마음과 부모의 체력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다수결에 따라 숙소에 가기로 결정되자, 막내 이모부가 웃으며 말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여. 시원하게 소주나 한잔 허게.” 모두가 따라 웃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뒤에서 여행 가방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보조석에 앉아 있던 나는 몸을 뒤로 돌려 차 안을 둘러보았다. 엄마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을 뿐, 모두 미동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끝없이 이국의 풍경이 지나갔다. 쨍한 하늘과 들판 너머로 기묘한 돌산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문득 가장 낯선 풍경은 바로 이 차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벅꾸벅 함께 졸고 있는 외가 식구들이라니. 우리 엄마와 이모들, 이모부들 그리고 사촌들이 미서부의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믿기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보고 있으려니 엄마가 물었다. “아가. 뭐 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엄마는 내 대답을 들었으면서도 아이스박스에서 포도를 꺼냈다. “이거 먹어.”, “아니라니깐.”, “그럼 물 줄까?” 나는 보조석에 있는 물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냥 신기해서 보는 거야.”, “뭐가.”, “우리가 다 여기 있는 게.”

엄마는 아무 대답도 없이 멈춰 있다가, 갑자기 눈가를 쓱쓱 닦아냈다. 나는 얼른 몸을 돌려 앞을 보고 앉았다. 거의 울 뻔했다. 찾는 것도 없이 선반을 열어 안을 더듬어보았다. 운전 중인 사촌이 헛기침을 했다. 옆을 보니 사촌이 울고 있었다. “…왜 울어?”, “몰라. 그냥 눈물이 나.” 덕분에 웃음이 터졌다. 사촌과 엄마는 한참 동안 조용했다.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들 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새로운
목적지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모든 여행에는 여행자가 미처 알지 못하던 숨겨진 목적지가 있다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앤텔로프 협곡을 기점으로 이번 여행의 숨겨진 목적지는 장소가 아닌 사람들, 함께 여행하는 가족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 조금씩 용기를 내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점차 더 길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끔은 미웠고, 피곤했고, 자주 막막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시간이나, 유명 관광지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시간이 전처럼 지루하지는 않게 되었다.

엄마와의 대화가 제일 어려웠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한 가지 생각만이 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몰랐다. 물론 나도 엄마를 몰랐다. 이제는 엄마를 안심시키기보다, 진짜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땅이어서 그랬을까. 모르겠다. 다만 내가 솔직해질수록 엄마는 더 당황했다. 말을 돌리기도 했고, 상처받은 표정이 되기도 했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엄마는 곧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건 곧 내가 엄마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뜻이고, 엄마가 내게 무척 실망할 것이란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진짜로 쌓아가려면 일단은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슬프고 무척 기쁜 마음으로 엄마가 내게 실망할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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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