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드문 인생들

흔치 않은 삶이라도 괜찮아! 좋아하는 것을 좇다 보니 특별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 사람들, 무슨 일 하냐는 질문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그들을 만났다. 당신, 정말 뭐 하는 사람인가요?

책, 수선합니다

재영책수선
재영

어떤 책은 찢어지거나 망가져도 다시 새것을 살 수 없다. 오래된 일기나 희귀한 서적처럼, 종이가 품은 기억과 가치가 너무나 고유한 것일 때다. 그러한 기록은 책 수선가 재영에게 모여든다. 고유한 가치는 그대로 유지한 채, 좀더 튼튼하고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재영의 손을 거치면 찢어졌던 책은 새살이 돋고 무너진 등이 곧게 선다. 그의 일은 오래된 기록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우연히 마주친 재미가 낳은 오늘

마포구 연남동의 조용한 골목. ‘재영책수선’의 문을 열자 책 수선가 재영이 반려견 단체Danche(커피 원두의 이름을 땄다.)와 함께 환히 반겼다. 처음 보는 커다란 기계와 세밀한 작업에 필요한 듯 보이는 금속 도구들이 한가득이다. “이건 100년 정도 된 책이에요. 저는 망가진 책 보는 게 좋아요.” 작업대 위 낡은 종이가 지나온 시간을 태연히 말하는 그에게 놀라다. 이런 책을 수선까지 한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란다.

‘수선’은 그가 쓰는 독특한 단어다. “직업의 정확한 이름은 책·지류 보존가예요. 지류를 보존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죠. 이 일이 사람들에게 친숙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수선’을 썼어요. 옷 수선, 가방 수선처럼 일상적인 용어잖아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을 쉽게 이곳에 맡기길 바라요.” 시작은 유리를 후후 불어 작품을 만드는 블로잉이었다. 순수미술을 전공하다 그래픽 디자인을 배웠고, 관련 회사에 취직도 했다고. 하지만 수작업의 매력을 잊기 어려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가 좋아하는 종이를 매만지는 북아트와 제지를 배웠다. 하지만 그간 쌓아온 지식과 무관한 전공이었기에 쉽지만은 않았다고. 그때 지도 교수님 조언으로 학교에 있는 책 보존 연구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건 뜻밖의 재미였다. 지금까지 책 수선을 지속하게 해준, 가슴 뛰는 커다란 재미.

한국에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 목표는 ‘내년에도 같은 일을 하기’였다. 생소한 직업이었기에 5년, 10년까지의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었단다. 하지만 미국에 머물 때부터 작업물을 꾸준히 SNS에서 공유해 온 덕에 의외의 관심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망가진 종이를 들고 그를 찾는 이들이 늘며 지금은 자신의 일과 함께 좀더 먼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외롭게, 자유롭게, 부지런히

의뢰자 품에는 다양한 물건이 들려 있다. 개인 일기장이나 노트, 고문서, 보증서, 포스터, 종이 상자 등 종이로 된 것으로 대부분 의뢰자의 추억이 담겼다. 오래된 서적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사람도 재영책수선을 두드린다. 작업에 돌입하기 전, 그는 의뢰자가 물건에 대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졌는지 귀 기울이고 작업 방향을 결정한다. 공들여 책을 수선한 뒤 돌아오는 건 의뢰자의 환한 얼굴이다.

하지만 책에 얽힌 의뢰자의 개인적 감정에서 한 발 떨어져 작업을 대한다. “책 보존은 이성적이고 기술적인 작업이에요. 소중한 누군가의 사연에 과도하게 깊이 빠져들면 조심스러움에 오히려 작업이 어려워지죠. 지류 보존가로서 오래된 책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나의 허들을 뛰어넘는 계기로 여겨요.”

흔치 않은 직업이라 고독할 때도 물론 있었다. 개인 사업자이기에 회계부터 운영, 홍보까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야 할 게 많았다고. 동료와 교류하며 발전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하지만 매뉴얼 없이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단다. 흔한 직업은 비교 대상이 언제나 존재하니 부담감이 클 테지만 자신은 좀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독특한 생활로 외부의 관심을 쉽게 받지만 그만큼 순간적으로만 소비된다는 생각도 떨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속된 짧은 주목은 정체되지 않고 부지런히 나아가게 돕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어딘가에서 저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라지지 말자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 오래오래 일하자고요.” 흔치 않은 조각이 되어 이 세계를 이루는 그에게서는 두려움보다 업에 담은 애정이, 뭉근한 자부심이 비친다.

재영의 작업 도구

1. 마이크로 스패츌러
약품을 덜거나 섞을 때도, 종이를 세밀하게 눌러야 할 때도 다방면으로 유용해요.

2. 본 폴더
종이를 매끈하게 접거나 접착제를 바른 후 종이를 누르는 용도로 써요. 테플론이라는 신소재로 만들어서 내구성이 좋고 접착제가 묻지 않아요.

3. 칼
일본 문구 브랜드 ‘엔티커터NT Cutter’ 제품이에요. 세밀하고 튼튼해서 20년 가까이 썼고, 안전하기까지 해요. 그야말로 최고입니다.

김밥 좋아하세요?

김밥 큐레이터
정다현

수많은 음식 중 좋아하는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정다현은 김밥을 고를 것이다. ‘김밥 큐레이터’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맛있고 재밌는 김밥을 찾아 전국을 여행한다. 마음에 드는 곳은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 계정에 게시! 고소한 맛과 냄새를 좇는 걸음은 용감하고 유쾌하다. 김밥 한 봉지 들고 그와 나란히 광장시장과 청계천을 걸어본다.

내가 만든 직업

사람들로 북적이는 광장시장. 사방이 비슷한 풍경이라 길이 헷갈릴 법도 한데, 익숙하다는 듯 걸음을 옮긴다. “광장시장 자주 오세요? 여기 꼬마김밥 맛있는 집이 있어요.” 다현 씨는 4월 초 광장시장에서 열릴 팝업 행사를 준비 중이다. 전국 8대 김밥 레시피를 현지에서 배워, 팝업 현장에서 팀원들과 재현하는 자리다. “놀러 오세요. 제가 있을 거예요(웃음).”

그의 직업은 김밥 큐레이터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맛있는 김밥을 선별하고 콘텐츠로 소개하는 자신의 일을 설명하기에 딱 맞는 표현이라 여겼단다. 흔치 않은 이름만큼 일과도 이색적인 풍경이다. 오전에는 협업 제안처럼 소통이 필요한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점심 겸 김밥 투어에 나선다. 오후엔 콘텐츠를 만들어 SNS에 업로드한다. 그의 세상은 온통 김밥으로 가득하다. 그는 F&B 업계 대기업의 온라인 마케터로 일하다.

늘 친숙하고 쉽게 먹을 수 있어 좋아했던 김밥을 콘텐츠로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 홀로서기를 결심했다. 회사를 다닐 땐 여러 의사 결정을 거쳤어야 할 일들이 이제는 마음먹은 대로 빠르게 실현되는 재미가 있다고. 그는 하고 싶은 일을 내 방식대로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대가는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이 소개하고 싶은 가게만을 알린다. 만드는 법이나 먹는 방식이 특별하고 재밌어야 피드에 오를 수 있다고. 가장 중요한 것은 속 재료의 밸런스! 다양한 맛이 섞이는 음식이니 조화를 유심히 느껴본단다.

잘 맞는 옷을 입고

“누군가 혹은 사회가 만든 직업이 아니라 제가 직업을 만든 거잖아요. 기존 직업이 기성복이라면 김밥 큐레이터는 저한테 꼭 맞는 맞춤옷을 입은 느낌이랄까요.” 세상에 없던 일을 해도 괜찮았다. 내게 꼭 맞는 길이라면 몇 번이고 나아가볼 용기가 솟았으니. 회사라는 울타리를 떠나 무엇이든 혼자 해내려다 보니 벽을 마주할 때도 있단다. “한 번씩 무너질 때도 있는데 계속 나아가려 노력하다 보면 해결이 되더라고요. ‘어떡하지?’보다는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 이렇게 해보자!’라는 자세가 업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시장부터 청계천 산책로까지 다현 씨의 쾌활한 에너지가 주위를 데웠다. 이런 사람이기에 김밥 찾아 전국 일주를 할 수 있겠어! 가방에 달린 김밥 키링과 그립톡, 김밥의 유래를 빼곡히 적은 노트, 긴 고민 없이 집 근처 분식집을 추천해 주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이 일을 좋아하는지 말해준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럼에도 나아가자는 말을 건네고 싶단다. 전에는 없던 직업이라도, 내가 이름 붙인 일과 함께 살아가며 한계에 부딪혀도, 좋아하는 마음 안고 살아갈 수 있다면 아무렴 어떠한가. 다현 씨의 발걸음은 가볍고 또 즐겁다.

정다현의 작업 도구

1. 짐벌 카메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올릴 김밥 영상을 주로 촬영해요. 가볍고 음식 색감도 예쁘게 나와서 자주 사용합니

2. 노트와 볼펜
개인 일정이나 김밥 관련 기록을 적습니다. 군더더기 없어 질리지도 않고 편해서 1년째 쭉 사용하고 있어요.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허밍그린
이강미

병든 식물도 의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어디가 언제부터 아팠는지 묻고, 적절히 치료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식물은 생기를 되찾을 수 있다. 식물상담소 ‘허밍그린’의 이강미 대표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식물들을 돌본다. 아픈 이유를 알아채면, 새순이 돋고 썩었던 뿌리가 건강해질 때까지 살뜰히 지켜보다가 비로소 다정히 손 흔들며 안녕을 바란다.

식물을 고치는 사람

마포구 창전동 허밍그린을 지키는 반려견 밍순이의 환영 인사와 함께 초록빛 가득한 공간에 발을 들였다. 이강미 대표가 나를 맞이하며 화분이 놓인 작업대 건너편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흙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기는 처음인걸. 자연스럽게 분갈이를 하며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누가 찾아오는지. 허밍그린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걱정을 한시름 안고 있다. “식물을 데려온 분들을 보호자라고 불러요. 병원처럼요. 보호자들은 식물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어요. 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식물을 다시 잘 키울 수 있다는 걸 알려줘요.” 그는 식물이 아픈 이유를 파악하고, 치료하며 건강하게 키울 방법을 제시한다. 입원, 호텔링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고. 식물은 매개일 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기를 더 좋아한다 말하는 그였다.

이곳을 찾는 식물들은 보호자가 애착을 갖고 키웠기에, 아프다는 이유로 쉽게 버릴 수 없던 존재들이다. 애정으로 물을 준 기억, 나도 모르는 사이 돋은 잎에 환호하던 기억을 안았다. 그 마음을 이해하는 이강미 대표는 보호자가 어떤 환경에서 식물을 키웠는지, 언제부터 시들했는지 세심히 묻는다. “보호자들이 식물을 살려내려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아요. 원인을 발견하는 게 첫 번째죠. 일반 병원과 똑같은 질문을 하니까 보호자들이 친절한 소아과에 온 것 같대요.”

소문난 솜씨가 이끈 오늘

식물을 고치는 마법 같은 능력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걸까. 그는 북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취미로 가죽 공예를 배우며 공방을 열기에 이르렀다. 당시 공방에서 키우던 알로카시아는 겨울 추위로 죽은 듯 보였다. 하지만 봄이 돌아오면서 갑자기 새순이 돋았고, 이 일은 이강미 대표가 식물의 생명력과 경이로움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는 어느 날 이웃 가게에서 시들어 버려진 알로카시아를 발견해 공방으로 데려와, 식물을 좋아하던 엄마에게 어깨너머 배운 지식으로 화분을 되살려 냈다. 신기한 솜씨는 주변 이웃들에게 소문이 나면서 내 것도 좀 봐달라는 사람이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이후 식물 의학을 전문적으로 배워 지금의 상담소를 열었다.

꽃다발을 엮는 플라워숍, 판매에 집중하는 일반 식물숍과 달리 식물 상담을 주로 하는 공간은 흔치 않다. 이 길을 먼저 가본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점은 역시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지치지 않으려 했다. 평범하지 않은 직업이기에 내가 아는 지식이 다가 아니라는 점도 늘 기억했다.

“제 일이 이색적인 직업인지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좋아하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오래 해온 일이라서요.” 독특한 직업명보다 더 귀하고 특별한 것은 자신의 업을 다정하게, 진심으로 대하는 그의 마음이었다.

이강미의 작업 도구

1. 갈퀴 핀셋
줄기나 뿌리가 얇은 식물을 심을 때는 흙을 화분에 먼저 넣어요. 그리고 식물을 갈퀴 반대편 핀셋으로 집어서 꽂아요.

2. 화분 칼
분갈이할 때 흙과 화분 사이에 꽂아 빙글빙글 돌리면 식물이 쉽게 빠져요. 탄성이 있어서 흙을 찔러도 뿌리가 다치지 않고요.

3. 스패츌러
뿌리 사이 흙을 꼼꼼하게 채워 넣을 때 써요. 벌레를 잡을 때도 유용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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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