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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는 그림책

별일 없는 그림책

요즘은 많은 사람이 아이와 함께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러 가지만, 2011년 《아이들과 제주도 에서 한 달 살기》 책으로 공식적인 기록을 남긴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까. 그 후 인터뷰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물었다. “아이는 어떻게 변했나요?”
제주도에서 많이 변하긴 했다. 낯가림 많던 아이가 서글서글해졌고, 도서관에서 빈둥대면서 책에도 재미를 붙였으니까. 하지만 아이의 변화는 그냥 덤일 뿐이다. 덤이 없더라도 우리의 여름은 좋았을 것이라는 얘기를 늘 하고 싶었다. 아이가 변해서 제주도에서 보낸 여름 방학이 좋았던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있고, 매일 웃고 지지고 볶으며 더 가까워져서 그래서 좋았다고 말이다.

몇 년 후, 《웰컴 투 그림책 육아》 책을 내자 또 사람들이 물었다.
“그림책을 읽으니까, 아이가 어떻게 변했나요?”
“글쎄요. 별일 없던데요?”
듣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고 키우면 아이가 남다르게 자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니까 힘이 빠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림책 몇 권 읽었다고 없는 창의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 하늘 높이 자라나지도 않는 것을. 예전에는 나도 별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창의력이 생겼는지 마음의 그릇이 커졌는지 당장 확인할 수 없을 뿐, 사실은 뭔가 달라졌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깨닫는다. 그림책을 읽고 난 후에 생기는 변화 역시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덤’일 뿐이다.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그림책을 읽어봤자 별일이 안 생기니까 기대하지 말라’가 아니라, ‘별일 안 생겨도 좋을 만큼 이미 충분히 다 좋다’라면 설명이 될까? 제주도에서 보낸 시간처럼 그림책을 읽으면서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부대낀 시간들. 그 시간들이 그 자체로 이미 너무 좋았다고 말이다. 그 결과물로 뭔가가 짜잔 나타나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하다. 

그래도 행여나 ‘이 좋은 걸 모를까봐’ 덧붙이자면, 그림책을 읽고 나면 별일이 생긴다. 소극적인 별일은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별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애 놀리면 안 된다고 언제까지 그림책이나 볼 거냐고, 이제 어려운 책으로 ‘진도’를 나갈 때라고 엄마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사람들이 염려해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도 제법 잘하고, 오히려 공부에서 그림책의 힘을 느낄 때가 많으니까. 

꽤 큰 별일도 있다. 가족. 사랑. 즐거움. 나눔. 이런 것들은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일 믿을 만하다. 그 모든 걸 우리 가족은 함께 그림책을 읽던 시간과 웃음 속에서 얻었다. 이만하면 별일 아닌가?
이제 아이들이 제법 자랐지만 나는 여전히 그림책을 사고 또 빌린다. 마음을 울리는 그림과 함께 짧고 웃기면서도 진중하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그림책은 이제 내 책이기 때문이다. 그림책 속의 곰과 토끼, 늑대와 소녀를 통해 나는 위로를 받고, 깨달음을 얻는다. 감히 말하건대 인간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하게 됐다. 그러자 세상이 점점 더 재미있어졌다. ‘그깟 애들 그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큰 별일은 어른인 내게 일어난 것이다. 

여기 그림책에 관한 그림책들이 있다. 아이와 어른 모두 웃으면서 읽을 만하다. 《또 읽어 줘!》는 아차! 지금까지 펼친 그림책 예찬이 무색하게도, 엄마가 그림책을 싫어하는 순간에 관한 책이다. 잠들기 전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줬는데, “또 읽어줘!”라고 할 때면 아이가 책 읽기를 하루 종일 원했던 엄마도 그 순간엔 얼마나 책이 원망스러운지 모른다. 

책 속의 엄마용도 그렇다. 꼬마용이 자꾸만 “또 읽어줘! 또, 또, 또!” 외치는 것이다. 엄마용의 얼굴엔 점점 다크 서클이 내려오고, 슬쩍슬쩍 책을 줄여서 읽는다.

급기야 읽다 말고 쿨쿨 잠이 들고 만다. 그러자 꼬마용이 화가 난다. 속에서 슬슬 화가 끓어오르더니 그만, 화르륵 불을 뿜어내는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책에 불구멍이 뻥 난다. 말 그대로 두꺼운 양장본 표지에 진짜 ‘구멍’이 나는 것이다. 책 속의 꼬마용이 불을 뿜었는데, 실제 책에 구멍이 났다고? 책 속의 이야기가 현실 속으로 뛰어 나오는 순간이다. 

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포인트가 있다. 그림책의 겉표지를 벗겼을 때다. 《또 읽어 줘!》는 꼬마용이 그려져 있는 겉표지와 달리 속표지는 그림 없는 빨간 색이다. 아, 이 책 어디서 봤는데? 그렇다. 꼬마용이 책 속에서 내내 엄마에게 “또 읽어 줘!”라고 요구했던 빨간 책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또 읽어 줘!》처럼 책을 또, 또, 또! 읽어달라고 하는 것도 엄마를 괴롭게 하지만 정말 괴로운 건 아이가 책을 전혀 읽으려 하지 않을 때다. 《브루노를 위한 책》은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를 위한 책이다. 브루노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늘 “그림책은 시시해.”라고 하는 브루노에게 옆집 친구 울라는 책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다. 어느 날 울라는 작정을 하고 말한다. “책 속의 뱀이 나를 물었어.” “설마? 책 속의 뱀이 어떻게 사람을 물어?” 책을 펼친 브루노는 그만 책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자, 책 속의 책으로 모험 여행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글자’가 사라진다. 아이는 즐겁고, 이야기를 지어내며 읽어줘야 하는 엄마에게는 괴로운 ‘글자 없는 그림책’이 되는 것이다. 엄마들이 아이가 책 읽기를 원하는 것은 솔직히 문자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접하기 바라서일 텐데, 책의 즐거움을 깨닫는 여행에 문자가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책의 즐거움에 빠지기 위해서는 그저 색감 좋고 아기자기 멋진 그림을 즐기면 된다. 큰 새의 배를 가르고 친구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브루노가 헉헉거리며 실제로 돌아와 울라에게 또 묻는다. “우리가 지금 어딜 다녀온 거지?” 

“어디긴 어디야? 책 속이지.” 

《브루노를 위한 책》을 읽은 아이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또 읽어 줘!”

또 읽어 줘!
에밀리 그래빗│푸른숲주니어

책의 물성 자체를 책의 매력으로 끌어들인 강력 추천 책. 구멍이 뻥 뚫린 표지와 그 구멍을 가리키고 있는 지은이의 사진도 우스꽝스럽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에게 먼저 장난감처럼 책을 뒤적이며 몸으로 친해질 수 있는 이 책을 추천한다.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 수상자인 에밀리 그래빗의 책은 《또 읽어 줘!》 외에 《늑대들》, 《겁쟁이 꼬마 생쥐 덜덜이》 등 다른 책들도 표지부터 속지, 면지 등을 샅샅이 살펴보아야 한다. 본문의 뒷이야기 등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림책 그 자체를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브루노를 위한 책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풀빛

‘책 읽기 싫어하는 브루노가 책 속으로 모험 여행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라고 쓰니까 어쩐지 너무 진부하게 들린다. 글자가 ‘거의’ 없어서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하는 수 없다.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글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읽어줄 때는 가능한 한 오버해서 “꺄악! 새가 나타났어!” “쉭쉭! 저리 가!” “폭포다. 콸콸콸콸! 물이 쏟아진다!” 등 각종 의성어와 효과음을 많이 써주시길. 엄마의 목이 쉬는 대신 아이가 정말 책 속의 모험에 푹 빠질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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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