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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익 — 그래픽 디자이너
휴일의 송정은 그야말로 물 반 서퍼 반이다. 해변을 따라 걷는 동안 파도에 따라 쉼없이 흔들리는 보드, 물결 위로 올라타기 위해 몇 번이고 뛰어오르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마주쳤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서핑 숍들을 지나쳐 골목으로 들어서자 그라핀이 모습을 드러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다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꽤나 수줍어 보인다. 바다로 향해 거침없이 달겨드는 서퍼들과는 사뭇 다른 몸짓을 지녔다.
송정 바닷가 분위기가 정말 활기차네요. 서핑하시는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그래요? 오늘 파도가 있나? (휴대폰 앱을 켠다.) ‘오늘 서핑을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 싶은 날에는 이 앱부터 켜봐요. 바람이 얼마나 불고, 파도가 어느 정도 치는지 확인할 수 있거든요. 일기예보처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데 어느 정도는 참고할 만해요. 출근길에 해안가를 따라오면서 살짝 확인했다가 파도가 있는 날이면 슈트랑 보드를 챙겨서 서핑 숍으로 향해요. 파도가 없는 날엔 바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요(웃음).
요즘은 서핑할 여유가 좀 있었나요?
그래도 쉴 틈이 좀 있었어요. 저는 ‘그라핀’이라는 이름으로 바다나 서핑을 주제로 일러스트나 그래픽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개인 작업 외에도 외주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요.
보통 외주 프로젝트를 받으면 ‘그라핀의 느낌을 담아주세요.’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실 것 같은데요. 성익 씨가 정의한 그라핀의 색깔은 무엇인가요?
오랫동안 고민을 해봤는데요. 단순하고 심플한 디자인이나 원색적인 색감에서 저의 색이 묻어 나오지 않나 싶어요. 근데 아직 조금 애매하긴 해요. 작업물이 조금 더 쌓여봐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초반에 클라이언트분들과 만날 때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체크하려고 하죠. 정말 제 스타일대로 했는데, 정작 클라이언트가 생각한 디자인과는 달랐던 경우가 꽤 있었거든요.
부산에서 자라 줄곧 디자인 공부를 하셨죠. 영국 유학 시절 방학을 맞아 잠시 들어왔다가 우연히 서핑을 접했다고요. 그것이 그라핀의 시작이라 들었어요.
당시 영국에서 알게 된 한국인 친구랑 방학을 맞이해서 함께 귀국했는데요. 그 친구가 부산 송정에서 서핑을 배워보고 싶은데 같이 하자고 조르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원래도 송정 쪽을 자주 놀러 오긴 했지만 서핑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도 못했어요. 무엇보다도 ‘서핑’ 하면 떠올리게 되는 장면이 있잖아요. 엄청나게 큰 파도가 오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미지요. 우리나라 파도는 느낌이 다르니까 재미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굳이 강습비까지 내주겠다며 같이 하자고 꼬드기는 거예요. 그렇게 3-5일 동안 코스로 배웠는데요.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한껏 즐기고 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마침 첫 학기 과제가 자유 프로젝트였던 거죠. 큰 주제가 ‘하나에 대한 모든 것’이었어요. 바로 서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죠. 서핑을 배우면서 제일 인상 깊었던 점이 규칙이나 에티켓이 참 많더라고요. 거기에 영감을 얻어서 포스터랑 스티커 작업을 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그때 이 일을 해봐도 되겠다 싶었죠.
처음 서핑 신에서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서핑을 즐기기 전이었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에게 생소한 문화를 디자인을 통해 설득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나 봐요.
처음에는 서핑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재미있는 디자인만 제시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죠. 좀 괜찮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서핑 컬처랑 연관이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그런 시나리오를 꿈꿨어요. 브랜딩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때라 그런 무모한 상상을 한 거겠죠. 막상 시작하고 나니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서핑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럼 서핑 신 반응은 어땠어요?
좋진 않았죠. 그때 서핑 신에 계시던 분들은 서핑 문화가 없던 시기에 우리나라에 전파한 1세대였거든요. 그분들께선 서핑조차 모르는 풋내기가 와서 룰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한 거죠. 요즘은 서핑에 관한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가 등장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하진 않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아마 그분들 눈에는 서핑이 인기를 끌 것 같으니 슬쩍 발만 들였다가 브랜드 이름만 알리고 금방 사라질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몰라요.
장벽이 꽤 높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나요?
서핑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요. 송정 서핑 학교에서 서핑을 배우고 나서 여러 서핑 숍을 이용하며 바다에 자주 드나들었거든요. 그러면서 서퍼들과 안면도 트고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커뮤니티 안으로 스며들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근처 서핑 숍에서 로고 디자인을 부탁해도 되겠냐는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인연이 돼서 작은 일부터 하다가 추후 다른 서핑 관련 작가분과 협업도 진행했죠. 마켓이나 행사가 있으면 꼬박꼬박 참여하기도 했고요.
신에 스며든 후로 자연스레 인정받게 된 거네요.
당시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이었어요. 계속 배우고 바다에 자주 드나들다 보면 서핑이랑 디자인을 좋아해서 이 신에 머무르려는 거란 걸 알아주겠지 싶었어요. 사실 제 성격상 어떤 신에 적극적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편인데요. 서핑에 한해서는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 나름 묵묵하게 노력했죠.
서핑하며 바다를 온몸으로 느끼고 나면 영감이 쌓일 것 같아요.
학부 시절에는 서핑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제가 몰랐던 부분이나 역사를 공부하면서 디자인했어요. 서핑이나 비치 컬처에 대해 알게 된 뒤엔 신에서 통용되는 것들을 저만의 방식대로 구현해 보려 하고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서핑하는 동안에는 디자인을 생각할 겨를이 없긴 해요. 어떻게 하면 더 잘 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저 파도를 타도 괜찮을지 판단하느라 바쁘거든요. 바다에서 나와 스튜디오로 돌아와서 어떤 파도에 대한 이미지를 작업할 때가 되어서야 제가 경험한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해요. 파도의 곡선이나 물결, 부서지는 포인트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죠. 이게 작업에 온전히 다 표현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상상에 기대며 막연하게 접근하진 않는 것 같아요.
서퍼들에겐 각자 파도에 대한 기억이 있을 텐데요. 디자인은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 구체성과 보편성을 어떻게 녹이려고 하는지 궁금해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게 어렵긴 해요. 그래서 처음엔 서퍼들이나 바다에 관심이 많은 사람한테 와닿을 만한 디자인을 하려고 했어요. 제 작업 중에 ‘웨이브 아나토미’라는 인포그래픽 포스터가 있어요. 파도가 생성되고 변하면서 부서지는 장면을 도면으로 표현한 건데, 공을 꽤 많이 들였어요. 감사하게도 서핑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더 눈여겨보게 돼요. 아까 학부 시절 서핑을 배우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규칙과 에티켓이라고 했죠. 어떤 룰이 있나요?
제일 기본적인 규칙이 ‘하나의 파도에는 한 사람만 탈 수 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새치기를 하지 말자는 거죠. 보통 파도가 부딪치고 깨지면서 해변까지 오잖아요. (손으로 물결 모양을 만든다.) 서핑하기 좋은 파도는 어느 한 지점부터 조금씩 깨지기 시작해서 하얀 면이 넓게 퍼지는 모양으로 밀려오거든요. 완전히 부서지기 직전에 올라타서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져야 해요. 쪼개지는 면이랑 가까운 서퍼가 우선권을 가지게 되는 거고요. 먼저 올라탄 사람이 깨진 면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옆에 있던 사람이 타이밍을 잘못 잡아서 동시에 파도를 타게 되면 충돌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거든요. 모두가 안전하게 즐기기 위해선 최대한 파도를 잘 보면서 길을 잘 계산해야 해요. 때로는 양보도 필요하고요.
요즘 서퍼가 많아졌잖아요.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리면 자유롭게 파도를 타는 것도 쉽지 않겠어요.
맞아요. 파도가 괜찮다 싶으면 다들 보드를 들고 찾아오거든요. 바다가 그리 넓지는 않아서 안전상의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최대한 조심하며 타긴 하는데, 쉽지는 않아요. 최근에 그런 뉴스를 봤어요. 올 여름에 송정 해수욕장 개장 시 서핑 구역이 반 토막이 될 예정이라고 하더라고요. 해당 기사의 요지는 서핑 문화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모두가 안전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레저 구역을 넓혀야만 한다는 이야기였어요. 서퍼들에게 비난을 전가하는 댓글들을 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 나요. 실제로 서퍼들은 해수욕이 가능한 시간 전후에 서핑을 즐기는 편이에요. 그때는 레저 구역 제한을 두지 않으니까요. 여름철 해수욕 개장시간 동안은 주로 서핑을 처음 배우는 분들께서 서핑을 즐기는데요. 그분들도 일반 해수욕장을 찾은 손님들처럼 바다를 즐기러 오셨다가 비좁은 공간에서 위험하고 불편한 경험만 하고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심이 들었어요.
‘문화’는 많은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누려야 확산이 되잖아요. 반면에 서핑을 할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다 보니, 한국에서 서핑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기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
아직 이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어요. 학부 시절 프로젝트 하면서 자료 조사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요. 오래전 캘리포니아에서 서핑 붐이 일어나면서 서핑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도 바다는 한정적이었고, 제대로 된 룰조차 없다 보니까 서퍼들끼리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거죠. 지자체에서 어느 지역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파도를 탈 수 있다고 적힌 스티커를 유료로 발급했대요. 근데 그마저도 관리가 잘 안 돼서 금세 사라져 버렸다고 해요. 나중에는 서퍼들끼리 자신들만의 에티켓을 만들어낸 거죠. 사람들이 의식을 가지고 질서 있게 즐기는 방법이 답인 것 같아요.
스튜디오가 위치한 ‘송정’은 성익 씨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라고 들었어요.
서핑의 관점으로 바다를 보았을 때, 송정의 특징은 계절을 타지 않고 틈틈이 파도가 들이쳐요. 동해는 겨울이나 늦가을, 초봄 쯤 파도가 제일 좋거든요. 날이 조금 따뜻할 때는 남해 쪽에 파도가 많이 들어오고요. 부산은 동해와 남해에 살짝 걸쳐져 있다 보니 사계절 내내 파도를 맛볼 수 있죠.
그럼, 부산 사람의 시선으로 봤을 땐 어떠한 매력이 있나요?
주차 공간과 해변이 가까워요. 생각보다 그런 해변이 많진 않거든요. 광안리랑 해운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해변 공영 주차장을 이용해야 해요. 다대포는 여름엔 송정보다 파도가 훨씬 괜찮아요. 그렇지만 해변이 넓어서 서핑하러 가는 길이 멀죠. 송정에 오면 바닷가 앞에 주차하고 트렁크에서 짐을 뺀 다음 바로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을 수 있거든요. 물론 분위기도 좋아요. 옛날 해변 느낌이 나서 정감이 가요. 근처에 모여 있는 식당이나 상점을 보고 있으면 꼭 촌에 온 것 같아요. 아직 다른 바다에 비해선 예전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변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이상해지진 않나요?
저는 첫 아르바이트를 송정 바닷가 앞 호텔 식당에서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가게들도 띄엄띄엄 있었고, 빈 곳이 정말 많았거든요. 매번 친구들이랑 여기 스타벅스 하나 차리면 대박 날 것 같다는 농담을 정말 많이 했죠. 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에 스타벅스를 비롯한 가게들이 이곳저곳 많이 생겼더라고요. 지금은 바닷가 따라 서핑 숍도 많이 생겼고요.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좀 새롭죠. 다만 자본의 힘이 느껴지는 식당이나 카페가 금방 생겨났다가 망하는 걸 볼 때마다 아쉬워요. 아무리 목 좋은 자리라고 하더라도 개성 있는 가게가 많이 들어오면 좋을 텐데, 고민 없이 들어왔다가 반짝 잘되고선 금방 사라져 버리니까요. 송정에도 매력적인 공간이 조금 더 많이 생겼으면 해요. 서핑 숍도 그렇고요.
다른 지역들은 서핑 문화가 꽤 잘 잡혀 있죠?
그렇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부산에서도 서핑을 하냐고 묻기도 해요. 보통 제주도나 양양이 메인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런데 송정이 ‘서핑 스쿨’ 샵이나 스킴보드 전문샵들을 가장 먼저 오픈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양양은 제주도나 송정에 비해서 후발 주자였지만 감각 있으신 분들 덕분에 홍보가 잘된 편이죠. 송정에도 재미있는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들어오면 조금 더 활성화되지 않을까 싶어요.
성익 씨는 오랫동안 송정을 지키며 로컬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지요. 다만 부산의 젊은 인재들이 모두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 왜 그러는지 너무나도 이해해요. 저도 부산에서 활동하면서 한 번씩 서울을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디자인 페스티벌이나 마켓에 참여를 한다고 해도 수요나 주목도 자체가 다르거든요. 이전에 서울에서 페어를 나갔을 땐 방문해 주시는 분들께서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궁금한 걸 물어봐 주셔서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지금처럼 쇼룸에 있을 때도 문을 열어두면 구경하다가 나가시는 분들은 대부분 타지인이나 외국 분들이세요. 어쩌면 경험의 문제 같기도 해요. 이런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진열해 놓았을 때, 이걸 소비해 본 경험이 크게 없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이 시대 속에서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궁금해요.
그라핀을 운영하던 초창기에는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점점 송정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식어에 무게가 생기기 시작했고요. 서핑을 주제로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면서, 송정과 서핑 신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이곳이 재미있는 공간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뭔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돼요.
그라핀이 가꿔나갈 서핑 신의 모습도 기대해 보게 되네요.
좋아하는 걸 정말 업으로 삼으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그라핀을 운영하기 위해선 현실적으로 그 외의 외주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을 해야 하니까요. 온전히 그라핀이라는 브랜드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 때까지, 더 열심히 해봐야죠.
에디터 오은재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