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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명 태극당 실장
변하지 않는 빵,
변하지 않는 가족
장충동에 있는 ‘태극당’은 삼대가 이어가는 빵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느 빵집과 다른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시간이 멈춘 듯한 예전 그대로의 빵과 과자들이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다. 빵에서 공간으로 시선을 옮기다 이 독특한 공기의 비밀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끔한 양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계신 할아버지와 손을 마주 잡은 엄마와 어린 딸, 이어폰을 끼고 공부하는 학생들. 다른 세대가 ‘변하지 않는 빵’을 매개로 한데 어우러져 있다. 여기서 ‘빵 아저씨’가 빵을 만들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아들이 이어나갔고 이제는 그 손주들이 지키는, 빵으로 쌓아온 가족의 시간. 그들이 변하지 않고 지켜가는 건 비단 빵만이 아니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간에 정갈한 빵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태극당은 어떤 곳인가요?
1946년 서울 충무로에 처음 문을 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에요. 할아버지가 만든 빵집을 아버지가 이어오다 지금은 삼대가 운영 중이에요. 저는 큰 손녀딸이자 아버지의 장녀죠. 태극당의 브랜드 마케터로, 태극당을 정돈하고 예쁘게 단장하여 알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 세대의 손님들도 많이 오셔서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시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이 공간이 주는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해요.
70년이 넘는 시간, 삼대째 빵을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처음 매장에 일하러 왔을 때 객관적으로 궁금한 거예요. 사람들이 왜 여기까지 빵을 사러 올까? 프랑스 빵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 말이죠. 하지만 이유가 있더라고요. 태극당이 지금까지 온 거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꾸린 태극당을 이어받아 빵 맛이 변하지 않도록 지킨 거죠. 어떤 음식 가게의 전통이 있다면 그 집만의 철학을 오랜 시간 여물어 쌓은 거라 생각해요. 태극당은 71년간 ‘맛있는 빵’이라는 하나의 철학으로 숙성된 공간이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태극당 대표 슬로건도 ‘변하지 않는 건 맛있는 일’이에요.
오롯이 지키기가 더 쉽지 않은 시대예요.
그렇죠. 아버지가 지켜 오신 빵 맛을 이어가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사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우리에게 빵 맛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당연하고 중하다는 건 살면서 배웠어요. 누구보다 이 집 빵 맛은 우리가 가장 잘 알기에 자신 있었어요. 공장이 바쁠 때는 사라다 소를 빵에 담는 일을 했어요. 미묘한 간, 빵 안에 사라다 소가 얼마큼 들어가는지, 베어 물었을 때 얼마큼 씹히는 게 맞는지 우리가 가장 잘 아니까요.
맛을 지키는 일을 우선으로 여기고, 여기에 우리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 예전 그대로의 패키지들을 정돈하는 작업 등을 다음으로 해나갔어요. 다행히 우리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이 많이 늘었고, 곧 매출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죠.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시고 자랑스러워하세요. 가장 바쁜 점심시간 때 쓱 오셔서 카운터 뒤에서 한 시간씩 손님 오는 풍경을 보고 가시곤 하시죠. 그럴 때 큰 보람을 느껴요.
태극당의 역사가 곧 가족의 역사인 셈이네요.
맞아요.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제게 태극당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곳이었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 충무로에서 장충동으로 옮겨서 80년대에는 지금의 태극당 4층에 할아버지 댁이 있었죠. 생각해보면 태어나고 지금까지 장충동으로 출근하는 기분이에요.
늘 매장의 빵 매대를 지나 할아버지 댁으로 계단을 올라갔고, 올라가는 중간중간 공장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들과 인사를 하면서 지나가곤 했어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려보면 할머니는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고 할아버지는 가게를 지키고 계셨어요. 할머니는 할아버지 곁을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시며 내조를 하셨어요. 많은 분이 할아버지가 태극당을 잘 운영할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공 덕분이라고 하셨죠. 아버지가 태극당을 이어받은 후에는 손님을 맞고 단골들과 호탕하게 이야기를 나누시던 모습이 생생해요.
가업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했나요?
저는 조소과를 나와 조교를 하다가 결혼하면서 전업주부로 살아왔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아프셨고 중환자실에 보름을 머무셨어요. 일선에 나오기 힘들어지셨죠. 당시 남동생은 2년 가까이 태극당에서 일하고 있었고 저는 셋째 아이가 7개월 되던 때였어요. 혼자 꾸려가던 동생이 도움을 요청했어요. 언젠가는 가업을 이어나갈 거라 생각했지만 시기가 급작스러웠죠. 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당연히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전화를 받은 그다음 날부터 출근했어요.
식구들 간의 이해와 배려가 어떤 곳보다 남다를 것 같아요.
가족이 함께 일하면서 좋은 점은 확실히 많아요. 이 일이 남의 일이 아니잖아요. 물론 서로 의견이 다를 때는 격렬하게 부딪쳐요. 하지만 그것이 형제간 감정싸움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걸 체감하면서 태극당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크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셋이고 모두 어린지라 일과 육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 동생이 많이 격려해주고 시간도 배려해줘요. 함께 일하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많이 느끼죠.
돌이켜보면 첫 과정에서 어머니의 역할도 매우 컸다고 생각해요.빵을 만들면서 수려한 말과 거창한 계획보다 묵묵히 나아갈 때 뿜어내는 진심이 더 멀리 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더라고요. 사 남매를 키우며 분주한 가족들 사이에서 늘 묵묵하게 본인의 역할을 해나가셨어요. 제가 남매 중에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아서 유독 그렇게 생각하나 봐요. 우리 가족은 속으로 지지고 볶고 해도 묵직한 움직임이 몸에 익어서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보는 느낌이에요.
격렬하게 부딪칠 때는 어떤 경우인가요?
태극당을 재단장하면서 동생과 많이 다퉜어요. 하지만 집에서 동생한테 하듯이 싸울 수는 없어요. 여기서 일하는 순간부터는 “야, 너.”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회사에서는 서로 존칭을 쓰고요. 남동생은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고 했고 저랑 엄마는 합리적인 매대로 바꾸자고 했었어요. 동생은 할아버지가 만든 매대이며 왜 저렇게 생겼는지 의미를 주장했어요. 조금은 불편해도 사람들이 찾아올 거라고 말이죠. 롤케이크도 무척 크고 무거워서 크기를 조금 줄이자고 제안했어요. 그런데 줄이지 말고 패키지도 예전 그대로 하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다양한 의견을 내는 편이고 동생은 중심을 잡는 편이에요. 중심이 있어서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 큰 무리는 없었어요. 감정싸움이 안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동생은 운영자로 엄청난 책임감이 있고 그 마음이 쉽지 않다는 걸 아니까 힘이 되어줘야겠다고 생각해요.
전통과 새로움 사이에서 지금의 태극당으로 자리 잡은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3세대로 넘어왔다는 걸 알렸을 때, 많은 분이 새롭게 개혁되는 게 아니냐 우려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배운 건 오직 빵 맛을 지키는 것 하나였어요. 맛을 지키는 것에는 시대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처음 우리가 일하러 나왔을 때, 실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오래 근무하신 장인분들과 묘한 거리감도 있었죠. 하지만 남동생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 덕분에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할아버지 때부터 함께 일하신 분들인데, 우리가 젊다고 시스템을 다 바꿔버리면 나가실 수도 있죠. 저분들이 없으면 우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복지를 최우선으로 했어요. 월급도 다시 조정하고 충원도 많이 하고 환경을 바꿔드렸어요. 유니폼에 이름을 박아드리는 것도 너무 좋아하셨죠. 명절 때는 손편지를 직접 다 써드리고 손에 고기며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가실 수 있게 해요. 태극당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결국 사람의 힘이에요. 아빠가 가르쳐준 적은 없지만 본인이 보고 배운 거 같아요.
최근 그림책을 펴냈어요. 어떤 작업이었나요?
장차북스 차영은 씨랑 인연이 있어요. 지난해 여름 태극당 전시를 했어요. 전시를 보면서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나 봐요. 어느 날 다시 태극당으로 찾아오셨는데 둘이 앉아서 태극당 이야기를 몇 시간이나 했어요. 재미있게 듣고 간 영은 씨가 얼마 뒤 연락을 해서 “우리 동화책 하나 만들어 봐요.”라고 하더라고요. 언젠간 태극당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고 싶었는데 동화책이라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아이 셋을 둔 엄마로서 그 제안이 기뻤어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야기 나눈 것들을 글로 정리해서 보내주었는데, 그 글이 마음에 든다고 글 작업을 직접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까지 받았어요. 이런 자세한 이야기는 제가 가장 잘 쓸 수 있었던 거죠. 어쩌다 보니 글을 썼고 이렇게 태극당의 《빵 아저씨 이야기》가 나왔어요.
할아버지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는 이야기 같아요. 할아버지의 따뜻한 추억으로 함께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얘기하듯이 아이들한테 들려주고 싶었어요. 너무 많은 역사보다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는 내용이기를 바랐죠. 할아버지는 늘 허리가 곧고, 지팡이 하나면 못 가실 데가 없을 정도로 건강한 분이었어요. 힘 있는 목소리와 빛나는 눈빛으로 삶에 대한 의지가 뜨거운 분이었죠. 그런 할아버지가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돌아가셨어요. 가족들 모두 믿기 힘든 이별이었고 아무도 할아버지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했어요. 항상 엄격하고 카리스마가 넘쳐서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떨어본 기억도 없어요. 하지만 만나면 손에 전병을 쓱 쥐어주시거나 무심한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어요. 증손주를 보며 저희한테 하지 않았던 표현을 하시더라고요. 이제는 할아버지가 했던 일들을 우리가 받아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언젠가 한 번은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빵 아저씨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저에게 특별해요. 빵 아저씨는 제 할아버지니까요.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글을 쓴 건가요?
아니요. 할아버지에게 태극당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없어요. 글은 제가 창작한 거예요. 따뜻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나누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수익의 일부분을 중구 결손 가족들에게 나누고 있고, 할아버지부터 쌓은 역사가 3대 까지 안전하게 왔으니 이걸 지키고자 해요. 할아버지가 쌓아온 걸 나누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림책에서처럼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특별한 케이크를 만들어준 기억도 있나요?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 항상 태극당의 하얀 버터케이크와 함께해요. 버터케이크를 보고 있으면 그 자체로 이미 너무 특별하죠. 아버지가 굉장히 위트 넘치는 분인데, 만 19세 어린이날 케이크에 ‘마지막 늙은 어린이 사랑한다.’라고 써주신 게 기억나요. 아버지의 그 위트 있는 레터링을 이어가고 싶어서 주문이 들어오면 아빠에게 배운 그 느낌으로 레터링을 제안해드려요. ‘당신의 인생을 응원합니다.’(환갑), ‘여전히 그렇게 아름답기오?’(결혼기념일), ‘딱 좋은 나이 서른둘.’(32세 친구 생일)
케이크를 받아먹던 꼬마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요. 집에서는 어떤 아내와 엄마인가요?
남편과는 대학 때 만나서 20대를 함께 보냈어요. 지금은 같이 ‘전투 육아’ 하는 사이죠. 아이를 좋아해서 많이 낳고 싶었어요.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아이 셋을 모두 키웠고, 어린이집을 일찍 보내지도 않았어요. 제가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집에서 북적대며 지지고 볶고 그렇게 사는 삶을 좋아해요.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서 바로 육아에 돌입해요. 저녁을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놀아주고 재우면 한밤중이 되는 게 일상이죠. 잠도 제 침대에서 다 같이 자서 아침에 일어나면 등이 막 부러질 거 같아요(웃음). 미술 공부한 실력을 점토 만들기나 종이접기로 발휘해요. 아이들이 진심으로 인정해주는데 지금은 그런 소소한 것들에 박수받으며 만족감을 느껴요.
아이마다 개성이 뚜렷해 보여요.
그렇죠. 큰애는 늙은이 같아요. 바둑과 주산을 좋아하고 운동은 전혀 관심 없어요. 화장실도 안 가고 프라모델을 만들어서 손에 늘 습진이 있죠. 둘째는 발달이 느린 아이예요. 두 돌 때까지 첫째보다 두 배 더 노력이 필요했어요. 발달이 늦으니까 안 자라는 거 같은 거예요. 어린아이를 계속 키우는 느낌이라 무척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체력이 좋은 편이라 버틸 만했던 거 같아요. 막내는 발랄한데 속이 깊고 성격이 정말 좋아요. 애교까지 넘치죠.
힘들고 슬플 때는 무엇으로 극복하나요?
아이들한테 화도 내죠. 제가 지쳐 보이면 남편이 안주를 만들어서 술상을 차려줘요(웃음). 그러면 또 풀리더라고요. 가장 힘든 건 둘째였어요. 상담을 받아보면, 아직 대화가 잘 안 되지만 상태가 나쁘진 않대요. 평범한 가정은 아니지만 이 정도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살면서 어려웠던 순간이 없었어요. 삶이 항상 순탄했어요.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엄마가 항상 집에 계셨고 할아버지가 주신 유산을 좋은 줄 모르고 살았죠. 결혼하고 둘째까지 낳고 제가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간다고 느꼈을 때 한번 팍 무너진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자식 일이면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되잖아요. 빨리 올라왔어요. 누구나 인생에서 힘든 게 있을 텐데 나는 자식으로 왔나보다 생각했어요.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없는 거 같아요. 남편과 저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서로 아는 거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렇다는 걸요. 지금은 완전 일상이에요. 자식 일은 늘 당연하잖아요.
조금은 느린 아이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싶었나요?
둘째가 일곱 살에 어린이집을 처음 갔어요. 동생이 있으면 마음이 놓일까 봐 막내를 같이 보냈죠. 깨끗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기에 자기 전에 꼭 몸을 씻기고 손톱을 깎아요. 일주일에 한 번은 이발기나 가위로 머리카락을 직접 잘라주고요. 저희 엄마가 그렇게 해주셨거든요. 단정한 머리에 옷도 무조건 깨끗이 빤 옷으로 입혀요. 어느 날 선생님이 치원이는 어떻게 늘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냐고 하시더라고요. 깨끗해서 아이를 보면 기분이 좋고 안아주고 싶다는 거예요. 제가 한 학기 동안 노력한 걸 알아주시니까 순간 눈이 뜨거워지더라고요. ‘내가 잘 해온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를 가도 지켜보는 눈이 많기에 제가 해줄 수 있는 도움은 이런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아이들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거 같아요.
저는 아이들을 그냥 애답게 키우려고 노력했어요. 주변에서 다섯 살 때는 한글 학습지 하는 게 좋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안 보내면 애가 뒤처진다고도 했죠. 하지만 아이들이 엄마랑 붙어있는 시간은 정말 짧은 거잖아요. 열 살만 돼도 엄마랑 붙어있진 않겠죠. 저도 아직 엄마랑 붙어있던 그 기억이 좋아요. 아이들도 그 기억으로 평생 살 거고 무조건 좋게 작용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아이들을 따로 재우고 CCTV로 보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저는 그게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크면서 좋았던 기억처럼 옛날 방식으로 키우는 거 같아요. 귀가 가벼운 편은 아니거든요.
복도와 사무실, 곳곳의 좁은 공간에서도 아이들끼리 북적대며 잘 노네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배워갔나요?
가족 관계도 연습이 필요해요. 첫째는 프라모델이나 레고를 대칭해서 수학적으로 만들어요. 다섯 시간을 꼬박 만들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둘째는 그거를 무너뜨려야 하는 아이인 거예요. 첫째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거기에 강박관념을 가지면 스스로 괴로우니까 어릴 때 빨리 깨줬어요. 동생은 앞으로도 계속 이거를 무너뜨릴 테니까요. 먼저 속상한 거를 충분히 알아줬어요. 아이의 완성품이 무척 훌륭하다는 거를 치켜세워주면서, 완성하는 데 의미가 있지 보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죠. 이게 부서지면 다르게 만들어서 더 좋은 게 나올 수 있으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위로했어요. 그런 시간을 여러 번 거쳤어요. 지금은 만들어 놓은 건담을 무너뜨려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아요. 막내는 정말 발로 키운 거 같아요(웃음). 그래도 감사하게 속 깊은 아이로 잘 컸어요. 잠잘 때는 엄마가 옆에 있기를 바라는데, 오빠 먼저 재워야 하는 상황을 속상하지만 이해해요.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고 많은 노력이 필요했어요. 사실 아이들도 힘들었겠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잖아요. 바라는 게 있다면요?
바라는 건 오로지 건강이에요. 크게 욕심내지 않아요. 엄마가 되고 보니 세상에 당연한 것이 한 가지도 없더라고요. 아이는 내 배를 빌려 나왔을 뿐, 내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이를 키우는 길의 목적지가 이별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언젠가는 헤어지는 걸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하는 거라고요. 둘째를 길에서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저에게 그 순간이 더 빨리 올 수 있다고 생각했죠. 본인들이 원하는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도움이 필요하면 돕고 힘을 주는 조력자가 되고 싶어요.
쉬는 날엔 가족끼리 주로 무얼 하며 보내나요?
어디 가는 게 쉽지 않아요. 키즈 카페에 가도 옆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면 바로 나와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요. 남편이 요리를 잘해서 먹고 싶은 걸 말하면 뚝딱 만들어내요.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하죠. 남들 다 사는 거처럼 살아요. 저도 남매끼리 마당에서 놀고 그랬거든요. 애들은 같은 집에서 맨날 가지고 노는 장난감과 작은 공간도 편하고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들끼리 너무 잘 놀아요.
여행에 대한 갈증은 없나요?
여행은 우리 가족에겐 도전이에요. 최근에도 둘째를 집 앞 놀이터에서 잃어버렸어요. 한 시간 만에 경찰차를 타고 집 근처 지하철 역에서 찾았죠. 그런 일이 두 번 있다 보니 사실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요. 남편이 어릴 때 자란 시골집이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은 가는데 저희한테는 그게 여행이에요. 지난여름에는 바다를 보러 다녀왔어요. 오롯이 우리 다섯 가족이 다녀온 첫 여행이었죠. 막내가 만 네 돌인데 바다를 한 번도 못 본 거예요.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미안하기까지 했어요. 첫째도 주변 친구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행을 가고 싶어 해요. 새로운 숙소에서 노는 것도 신기해하고요. 집을 떠난다는 것 자체로 어른과 아이들에게 확실히 재충전이 되는 것 같아요. 겨울 방학에는 도전해보려고요. 근데 아이들 데리고 음식점 가서 밥 먹는 걸 상상하면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웃음).
일하는 엄마로 2017년 참 바쁘게 보내셨죠. 2018년 일과 가정에서 이루고자 하는 게 있을까요?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태극당에서 재미있는 협업 작업들도 있었고 플리마켓 행사를 통해 외부에 홍보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앞으로 우리 매장 안에서도 재미있는 마켓을 열고 싶어요. 수익금을 좋은 데 쓰면서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이 훌쩍 성장한 한 해였어요. 둘째가 올해 초등학교에 가요. 좀 더 신경 쓸 부분이 많지만 아이는 자기 방식으로 적응을 해나가겠죠. 기부나 아이들을 돕는 일을 개인적으로도 해보려고요. 태극당에서 꾸준히 기부를 하는데 개인이 움직이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아이 셋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감사한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태극당
서울시 중구 동호로 24길 7
02 2279 3152
instagram.com/taegeukdang
7:30~23:00
빵 아저씨 이야기
글 신혜명 | 그림 김수정 | 장차북스
이 책은 71년 전 세워진,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태극당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삼대가 이어가는 태극당의 맛과 나눔에 대한 철학을 따뜻한 글과 그림으로 풀어냈다. 태극당의 시그니처인 모나카 아이스크림과 카스텔라, 전병, 케이크 등 실제 판매하는 제품을 포근한 색감으로 담았다. 변하지 않는 빵을 보며 아빠, 엄마는 기억 저편에 묻힌 추억이 되살아나고 아이들은 호기심에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맛있고 다정한 태극당을 그림책으로 만나볼 기회다.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Hae Ran 자료 협조 장차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