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서 만난 구원 ‘술의 식물원’

5월 5일, 제주에서 일주일 살기

어떤 말 한마디는 심장에 박혀 혈관을 타고 온몸을 떠돈다. 결국 나는 그 말과 헤어지지 못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편하게 눕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하얀색 알약을 삼키고 나서야 끝나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겨우 잠에 든다 해도 자주 같은 꿈을 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왕복 12차선 도로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꿈. 꿈속의 나는 춥고 두려워서 온몸을 사정없이 떨었다. 그러다 눈을 뜨면 아직 하루가 시작되기엔 한참 이른 시간. 하루의 ‘끝’과 다른 하루의 ‘시작’ 사이 껌껌하고 깜깜한 시간 속에서 나는 매일 길을 잃었다. 꿈속의 지옥이 끝나면 현실의 지옥이 시작되었고, 현실의 지옥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꿈속의 지옥이었다.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나빠지고 있었다.

가끔 개인에 대한 실망이 사람에 대한 환멸로 번질 때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에는 ‘나’ 또한 포함되기 마련이라서 자조와 자괴가 가장 두렵다. 그 두려움에 맞서 싸우려면 내 안의 있는 용기를 모두 그러모아야 했는데, 그러자니 에너지가 많이 들었다. 따뜻하고 든든하게, 사력을 다해 잘 먹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혼자 있을 때도 누구를 초대한 것처럼 푸짐하게 차려놓고 잘 먹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주방에 섰고, 한 끼 한 끼 꼭꼭 씹어 야무지게 삼켰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사투였다.

가까스로 낸 힘으로는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매일같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목록을 죽 살펴보았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 날에도 그 일은 하염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즉흥적으로 결제 페이지까지 넘어가고야 말았다. 이걸 여행이라고 해야 할까, 도피라고 해야 할까. 정체성은 모호하지만 떠난다는 것은 확실했다.

가는 날과 오는 날의 요일이 같으니 ‘제주에서 일주일 살기’라는 그럴싸한 부제를 달았다. 고작 여섯 밤 자는 것으로 ‘산다’고 하기엔 어쩐지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는 분명 하루하루를 꾹꾹 눌러 살고 있었다. 아니, 살아내고 있었다.

스스로를 유배 보내듯 제주라는 섬에 격리되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 버리고 싶은 때에는 ‘술의 식물원’이 생각난다. 시골 할머니집에 온 듯 정겹고 곳곳에 세심한 센스가 보이는 이곳. 나무로 된 미닫이문을 삐걱이며 열고 들어가면, 내 안의 집채만 한 파도도 잠시 잦아들었다.

 

시간의 무늬가 그대로 아로새겨진 나무 테이블 앞에 앉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기운이 났다. 심지어 아주 조금쯤은 행복한 기분마저 들었다. 누군가의 포근한 환대를 받는 듯한 느낌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원하게 내어주는 구수한 보리차에도 정성이 깃들어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식당에서 보리차를 관리하는 일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대부분의 식당이 생수를 제공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뒤이어 나온 정갈한 플레이팅의 소담한 음식. 고급스러우면서도 재기발랄한 커트러리.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는 이가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내어준 것 같은 정갈한 차림이다. 특히 3,000원짜리 사이드 메뉴 ‘제주 감자와 당근으로 만든 사라다’가 포슬포슬 나를 어르고 달랜다. 탱글탱글한 ‘명랑 명란 파스타’는 이름처럼 명랑한 기운마저 불어넣어주고, 여기에 추천 받은 와인 한잔은 뾰족하게 곤두서 있던 온몸의 신경세포를 몽글몽글 무장해제시킨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를 중심에 콱 찍어놓고 컴퍼스 다리를 넓혔다가 좁혔다가 해본다. 인내할 수 있는 한계의 범위,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의 반경을 가늠하는 것이다. 요모조모 섬세하게 살펴본 후에 마침내 시원하게 동그라미를 휙 그려낸다. 이 선의 안팎으로 나의 형편과 당신의 사정이 분리된다. 조금 단순해지고 싶을 때 이 방법은 썩 도움이 된다. 내내 나를 따라다니는 말 한마디를 선 밖에 두고 나는 선 안쪽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깜냥만큼만 감당하고 그 이상은 내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사람은 ‘극복해야 할 것’과 ‘극복한 것’과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것’ 들의 총합이 아닐까.

 

제주에서 지낸 일주일 동안 나는 조금 단단해졌다. 불현듯 찾아온 불청객과 이별하고, 나를 곧추세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헤어짐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잘 안다. 곧잘 지내는 나를 문득 한 번씩 찾아와 불친절한 안부를 물을 것이다. 나는 또 길을 걷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다가 명치께를 두드려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주만큼 광활한 파도가 다시 몰려올지라도, 이제 내겐 몸을 숨길 작은 동그라미 그리고 ‘술의 식물원’이 있으니 조금은 덜 두렵다.

 

그러니 술의 식물원이여, 내내 울창하기를.

 

술의 식물원

A. 제주 제주시 구좌읍 중산간동로 2253

T. 070 8900 2254

 

We Around Project

내가 오늘 분명히 먹은 것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점심 먹고 나오는 길에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저녁식탁을 치우면서 내일 점심을 고민합니다. 바쁜 일상 중에도 마음에 선명히 남는 한끼의 식사가 있습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의 대화를 적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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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지향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