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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즐겨 찾던 독립 서점을 거닐다 책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이나 저자 이름 대신 빵과 햄, 치즈와 토마토를 겹겹이 쌓아둔 표지의 책이었다. 그간 샌드위치 패스트푸드점에서 5년간 일하며 수많은 샌드위치를 목격한 나는 ‘훗, 어디 한번 볼까?’ 하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책을 집어 들었다. 첫 페이지의 첫 문장은 이러했다. “본 도감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샌드위치 장면을 수집한 책으로, 1980년대부터 2020년대 초반 사이의 해외 영화 100편에서 샌드위치가 등장하는 장면과 해당 장면에 얽힌 서사를 기록했다.” 이어서 햄치즈 샌드위치와 피넛버터 샌드위치, 타마고 고로케나 달걀프라이를 넣은 샌드위치, 심지어는 뭉개진 것이나 곰팡이가 핀 샌드위치까지(먹으면 안 되잖아!), 어딜 넘겨봐도 전부 ‘그 메뉴’뿐이었다. 나는 저자의 집요함에 놀라며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이 책을 만든 샌드위치 프레스는 1인 출판사이자 디자인 스튜디오로 시각 디자이너 주혜린이 이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빵 사이의 재료들이 힘을 모아 궁극의 맛을 자아내는 샌드위치처럼 신선하고도 유쾌한 작업을 쌓아가길” 바라며 지은 이름이다. 샌드위치 외에도 푸딩이나 까눌레 등 본인이 너무나 사랑하던 음식들을 분석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책을 만들었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를 먼저 떠올렸다면 그다음에는 ‘내가 무얼 잘하는지’를 찾아 작업에 자신감을 붙였다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자신 있게 풀어낼 수 있고, 그 과정들을 정제된 형태로 엮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독립 출판의 묘미. 《영화 속 샌드위치 도감》을 비롯해 《푸딩의 세계》, 《이거 먹을래 까눌레》는 앞면에 제목과 이름 대신 메뉴 사진만 크게 채워넣었다. 독자가 책을 집어 드는 순간부터 책에 대해 자유로이 해석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애정 넘치는 대상을 대하는 그의 ‘귀여운 집요함’을 본 독자들은 각자만의 ‘좋아하고 맛있는 세계’로 자유로이 떠난다.
《영화 속 샌드위치 도감》
개정판, 2024, 224페이지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 주혜린 디자이너는 대학원 수업에서 ‘자기만의 방Wunderkammer’을 만들어 보라는 과제를 받았다. 자신의 방을 꾸며 누군가를 초대했을 때, 그곳이 마치 작은 박물관처럼 느껴지도록 책을 만드는 수업이었다. 평소 곁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어야 방을 채울 만큼 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그가 떠올린 건 ‘샌드위치’. 분주한 생활 속에서의 끼니는 어제는 연어 바나나 베이글 샌드위치, 오늘은 에그마요 샌드위치, 내일은 칠리 비프 샌드위치처럼 간단한 메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본인의 또 다른 애정을 하나 더했다. 바로 영화. ‘N차’ 관람을 즐기고 씨네 페미니즘 매거진 《세컨드》의 디자이너이기도 한 그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샌드위치 모습 100개 찾기’를 목표로 세우고 하나씩 손수 모아갔다. 온갖 사이트에 샌드위치가 등장하는 영화를 검색해 1차 리스트를 만들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모든 영화를 다운받아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며 장면들을 찾아냈다. 더불어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감독의 작품과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해 존중이 부족한 작품은 최대한 솎아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듯한 과정 때문에 《세컨드》 동료들을 비롯해 주변 친구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 (때로는 “이 영화에서 샌드위치를 봤어?”라는 친구의 제보로 같은 영화를 다 함께 세 번이나 돌려봤지만 나오지 않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초판에는 70편만 수록했으나 2024년에는 30편을 마저 모아 100편의 영화, 100편의 샌드위치를 담은 개정판을 출간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에서 ‘해리’와 ‘샐리’가 마주 앉아 먹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에서 ‘론’이 챙겨 온 소금에 절인 소고기 샌드위치 등 꾸준히 사랑받는 영화에서 반가움을 느끼는 한편, 〈더 스퀘어〉(2018)에서 노숙인이 거부한 양파를 빼지 않은 샌드위치처럼 음식 소품의 역할과 기능까지 유추해 보는 재미도 있다. 물론, 아까도 말했지만 〈꾸러기 클럽〉(1994)에서의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 샌드위치처럼, 전부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라이스보이 슬립스Riceboy Sleeps〉(2022)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소영은 공장에서 일하며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다.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하지만 기운 내며 굳세게 버티는 중이다. 소영은 우연히 공장에서 한국인 미선을 만나게 되고,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반가워한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둘은 함께 식사하는데, 미선의 도시락에는 흰쌀밥과 젓갈 등의 반찬이 있는 반면, 소영의 도시락은 샌드위치와 과일이 전부다. 자신의 밥을 같이 먹자는 미선의 말에 젓갈을 한 입 먹는 소영. 오랜만이라 맛있다고는 말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샌드위치를 베어 문다. 이곳에서의 삶을 위해서는 약해지면 안 된다는 듯이.”
《푸딩의 세계》2022, 92페이지
푸딩에도 지극한 애정을 전한 주혜린 디자이너지만, 그 이유가 앞선 것과는 사뭇 다르다. 맛보다는 모양, 탱탱한 겉모습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느껴지는데 숟가락으로 푹 뜨면 말캉하게 올라오는 바로 그 모양이기 때문. 쉽게 무너지지도 않고, 마지막 한 입까지 제법 굳건한 모양을 보니 ‘이게 바로 외강내유의 시각화’라고 생각하며 빠져들었다. 유명하다는 푸딩 가게를 찾아가고 편도 두 시간 이상의 먼 곳에서 택배로 주문해 먹다가, 급기야 만들어 먹기까지 했다는 그. (하지만 푸딩은 예민한 불 조절이 필요한 디저트라, 꼭 달걀찜 비스무리한 형태가 되어버렸다고.) 푸딩의 기원이 소시지라는 걸 아는가? 《푸딩의 세계》에서는 그 역사를 비롯해 시판되고 있는 푸딩의 모습을 표현한 스무 가지 일러스트, 지금까지 콘텐츠에서 다뤄지는 모습 등을 정리해 한 음식의 주변을 조망했다.
《이거 먹을래 까눌레》는 푸딩의 말캉함에 지루함을 느낀 뒤 선택한 까눌레를 위한 책이다. 럼 향이 훅 풍기면서도 쫀득하고 바삭한 식감에 완전히 매료되어 집에서도 곧잘 만들었기에, 다른 책들보다 만드는 과정과 음식에 집중해 제작했다. 까눌레를 만드는 법은 복잡하다. (주혜린 디자이너 말을 빌리면 까눌레의 ‘까’는 ‘까다로울 까’이다.) 반죽은 하루 꼬박 숙성해야 하고 틀에 밀랍이나 버터를 코팅해야 한다. 잘 구우려면 온도도 여러 번 조절해야 한다. 주혜린 디자이너는 작품 하나가 탄생하기 위한 수련의 시간 같은 그 과정들도 전부 까눌레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오리지널 외에도 블루베리를 얹거나 쑥 인절미를 더해도, 앙버터를 만들거나 페퍼로니를 넣어도 그에게는 전부 맛있고 사랑스러운 까눌레일 뿐이다.
《이거 먹을래 까눌레》 2024, 88페이지
“최근 천연 오일로 코팅된 국내산 나무 수저 세트를 구매했는데, 이염이나 파손에 취약하기에 ‘세척 시 홍시 닦듯 살살 닦아야 한다.’는 관리 방법을 안내받았다. 이 얼마나 이해가 잘되는 비유인가. 까눌레 역시 비슷하다. 마치 ‘나는 슬러시 기계의 뱅글뱅글 도는 모터다.’ 또는 ‘나는 전날 전완근 운동을 했다.’라고 생각하며 아주 느긋하게 살살 저어야 한다. 힘을 주어 열심히 휘젓는 순간 글루텐이 형성되고, 오븐에 구울 때 반죽이 솟아오를 수 있다.”
에디터 이명주
자료 제공 샌드위치 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