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청혼

결혼이란 항해와 같아서

 

신호등 너머 그 애를 봤다. 내가 좋아하는 하늘색 셔츠를 입었다. 날이 제법 선선해 경복궁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야간에 개장한 경복궁은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이어서 어딘가 모르게 비밀스러운 고혹함이 느껴졌다. 궁이 어찌나 넓은지 눈앞에 보이는 문을 향해 계속 걷다 보면 어느덧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외진 곳에 닿곤 했다. 쉴 새 없이 걷느라 체온이 오른 그 애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고 나도 마루에 걸터앉아 손부채질을 했다. 근처에 있던 아저씨마저 어디론가 가버리고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은 순간. 그 애가 결혼하자고 했다. 어떠한 전조도 없는 청혼이었다.

내가 성인이 되던 해 4월, 엄마와 아빠는 따로 살기로 합의를 봤다. 네 식구가 함께 외식하는 날은 더이상 오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아빠와 저녁을 먹었고 또 다른 날에는 엄마와 한 상에 앉았다. 아빠는 엄마의 안부를 물었지만, 엄마는 아빠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상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다 종내 침묵과 한탄을 반찬 삼아 밥을 밀어 넣는 저녁들이었다. 우리는 넷이서 살던 집을 빼고 작은 집으로 옮겨야 했다. 아빠 없이 이사 간 집은 셋이 살기에 빠듯했는데 안방만은 기형적으로 컸다. 엄마가 혼자 안방에 있는 걸 알면서도 왜인지 그쪽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만 헤어진 게 아니라 네 사람이 각자의 섬에 고립된 것 같았다.

엄마가 가장이 됨에 따라 나도 스무 살부터는 쉬지 않고 일했다. 기울어진 집안에 보태야 하기도 했지만,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살 수 있어서 일하는 게 더 편했다. 호수에 떠 있는 백조처럼 겉은 평범해 보여도 속은 몸부림치는 날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막연히 결혼을 상상하기도 했다. 언제 누구와 할지, 아니 할 수 있긴 할지. 열심히 사는데도 계속 실패하는 연애 탓에 두려움은 커져갔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는데 나도 엄마처럼 살게 되는 걸까. 영원히 고독의 수렁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제 발로 찾아간 정신의학과에서 이런 조언을 들었다. 결혼은 둘이 한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내 파트너가 노를 저을 수 있는 사람인지, 성실하게 물고기를 잡아서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할 사람인지 유심히 봐야 한다. 무엇보다 기나긴 여정인만큼 둘이 있을 때 재미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연 내 인생에 그런 사람이 나타날지 괴로워하던 숱한 날을 지나 그 애를 만났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켜본 그는 의사 선생님이 제시한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다. 육체는 물론 정서적으로도 균형을 갖춘 사람. 그래서 함께 있으면 나도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졌다. 행복 뒤에 도사리는 불행을 기다리는 내게 그는 행복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살면서 이런 안도를 느끼게 해 준 사람은 그 애가 유일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청혼을 받으면 귓가에 종소리가 울린다고 하던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결혼은 앞으로 열어야 할 수만 개의 문을 동반하고 있었을 뿐이다. 당장 상견례 자리부터 막막했다. 과연 엄마와 아빠가 한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그 애의 부모님은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실까? 그리고 돈. 속으로 세어본 통장 잔고는 딱 150만 원이다. 그 달 적금을 넣어야 겨우 200만 원이 턱걸이로 채워질 것이었다.

 

“지영아.”

 

생각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다시 눈앞의 그를 봤다. 그 애는 6월과 9월 중 언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은지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으나 내년 여름에는 정말 드레스를 입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내려앉은 경복궁 한 구석에서 나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내 앞의 파도가 거세고 험할지라도 그와 함께 기어코 순항하는 앞날을 그려보기로 했다.

 

We Around Project

결혼, 문을 열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해 6,800명의 구독자를 모은 에세이스트입니다. 어떤 문은 큰 노력없이 쉽게 열리지만, 어떤 문은 문고리를 잡는 것조차 버거운데요. 재산이라곤 200만원의 잔고뿐인 이혼가정 자녀에겐 ‘결혼’이라는 문이 딱 그랬습니다. 무거운 문을 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 속 안개를 걷어주는 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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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윤지영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