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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
Oval
오발, 발견의 공간
홍대 전철역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나 있는 골목들 사이로 다양한 가게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중에서 조금은 한적해 보이는 골목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면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옥상으로 나 있는 계단을 발견한다면, 간판조차 없는 가게,‘오발’에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오발의 첫인상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높은 계단을 올라 좁은 문을 밀고 들어서면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고, 각자 좋아하는 자리를 선택한 듯 어떤 기준이나 설명 없이 놓여있는 물건들도 낯설었다. 목요일부터 주말까지만 문을 연다는 말도 쉽게 이해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나는 이 불편한 가게에 자주 오게 될 것을 예감했다
한가운데 넓은 자리가 있어도 괜히 구석을 찾아 몸을 구겨 앉는 습관이나 여행지에서 숙소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다 갖춘 화려한 호텔방보다 현지인이 머무는 아늑한 다락방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낡아도 자주 입는 옷,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 마음이 끌리는 건 언제나 약간의 빈틈이 있는 것들이었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결여라고 여기지는 않으니까.
문구점을 연 이유
오발은 문구점이다. 필기구와 노트, 문진, 도장, 편지지 등 책상 서랍을 열면 들어있을 법한 물건들로 가득하다. 홍익대학교 정문 근처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문구류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제법 알려졌다. 그런데 어느 날, 오발의 대표 김수랑은 오래 머물던 자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처음과는 달리 주변 상권이 복잡해진 것도 이유였지만 마침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눈에 띄는 외관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오발은 더욱 비밀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아는 사람조차 쉽게 찾아오기 힘든 위치에도 초연한 그녀가 혹시 매출마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궁금해졌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가게를 운영하면서 매출 걱정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웃음) 현실적으로 봤을 때 상권 중심부나 건물 1층에 가게를 내기엔 무리가 있었어요. 예전 가게에서부터 형성된 고객층도 있고, 문구를 좋아하고 찾는 분들이 직접 ‘발견’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지금의 옥상으로 옮겨왔죠.”
오발에서 취급하는 모든 물건은 김수랑 대표가 직접 선택해서 들여온 것들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갖고 싶은 제품을 모아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기에 지금까지 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직접 발품을 팔아 해외에서 들여온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제품은 평소 지켜보던 브랜드에 의뢰해서 샘플을 받아보고, 판매 의사를 밝히고, 아시아 지역에 배급업체가 있는지 알아보는 과정으로 진행한다. 국내는 물론 가까운 일본에서도 이렇게 문구 제품만 다루는 형태는 거의 없기에 그 희소성은 인정할 만하다. 간혹 있다 해도 홈리빙 제품, 패션 소품들과 연계하거나 자체 브랜드를 운영하는 경우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물건에 대한 애정이 있게 마련이지만 왜 굳이 문구 제품이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어릴 때 크레파스 써 보셨죠. 처음에는 24색을 쓰다가 어느새 60색을 가진 친구를 부러워하잖아요. 결국은 100색 크레파스에 대한 로망이 생기고요. 문구 제품에 대한 애착은 ‘나도 한번 다 써보고 싶어’ 하는 그때의 욕심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오발은 그런 마음을 가져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고요. 물론 필기구나 종이 제품을 모으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수집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이런 판매의 공간은 존재할 수 없겠죠.”
변하지 않는 물건들에 대하여
영어사전에 ‘문구’를 검색해보면 ‘Stationary’와 ‘Stationery’라는 두 개의 단어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게 된다. 전자는 ‘움직이지 않는, 변하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후자는 ‘문방구, 필기용구’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어원에는 모두 ‘Station’, ‘~가 멈추는 장소’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생각해보면 문구 제품들은 대부분 형태가 쉬이 변하지 않는 단단한 물성을 지니고 있다. 만드는 과정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물론 유독 본연의 쓰임에 충실하다. 이것이 우연일까? 중세시대에는 Stationer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행상과 달리 늘 같은 자리에서 가게를 운영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고 한다. 주로 대학가에서 책을 파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다가 나중에는 종이와 필기구를 판매하는 이들까지 총칭하게 되었다고. 김수랑 대표가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문구 제품의 속성에 대해 어떤 신념을 가진 것만은 확실했다.
“누구에게나 일상에서 계속 쓰게 되는 물건이 있잖아요. 요리하는 사람 곁에는 조리 도구가 있을 테고, 가구를 만드는 사람에겐 나무와 톱이 있겠죠. 저는 디자인 공부를 해서 늘 문구 제품과 종이가 있었어요. 어떤 작업에 항상 쓰이는 물건들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연필 하나만 보더라도 그 정해진 형태 안에서 발현되는 힘이 엄청나잖아요. 쓰임에 따라 각기 다른 미적 감각을 보여주죠. 그건 사용하는 사람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해요. 저는 이렇게 한정된 틀 안에서 다양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물건들이 좋았어요.”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종이책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책은 수저나 망치, 가위 혹은 바퀴와 같다’고 말했다.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더 이상 발전이 불가능할 만큼 완전한 물건, 그가 목록에서 빠트린 것 중 하나는 바로 연필이 아닐까? 김수랑 대표 역시 이 작고 얇은 물건에 대한 묘한 집착이 있음을 고백했다. 매일같이 연필을 깎는다는 사실도. “펜보다 연필을 많이 쓴다고 하면 그건 솔직히 거짓말이고요. 대신 더 많이 쓰려고 노력한다는 정도가 맞겠네요. 연필을 쓸 때의 느낌이 좋아요. 사각사각하며 닳아 없어지는 것도요. 그리고 연필을 깎는 건 고등학교 때 미술을 하면서 생긴 습관인데 쓰지 않더라도 모두 깎아서 정렬을 맞춰놓아요. 그게 그렇게 만족스럽더라고요.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어서 좋고요.”
Interview with Oval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하나씩 찾아서 모으다 보니 오발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처럼, 그녀의 옥상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함께 있으면 꽤 보기 좋은 식물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가게를 구석구석 둘러보다가 그동안 오발을 드나들며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오발’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어요
저는 가게 주인이기 전에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디자이너입니다. 처음에는 마음 맞는 친구 몇 명과 시작했지만, 지금은 각자 스타일을 찾아 독립한 상태예요. 현재 저와 직원 한 명이 함께 편집디자인부터 웹, 인테리어, 브랜드 아이덴티티까지 디자인 전반에 걸쳐 작업하고 있어요. 최근에 한 것 중에 ‘미수아바흐브Misu a barbe’라는 의류 브랜드가 기억에 남네요. 저에게도 새로운 시도였는데 F/W 시즌 컬렉션의 제품 디자인, 촬영 및 홍보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할 수 있는 무척 흥미로운 기회였어요.
‘오발’은 무슨 의미인가요?
Oval은 영어로 ‘타원형’이라는 뜻이에요. 도형의 형태를 좋아하는 데다 기본 도형을 제외한 다른 것이 없을까 하다가 떠올랐어요. 보통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가장 많이 쓰잖아요. 처음에는 단순하게 접근했는데 이름이라는 게 점점 의미가 생기더라고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문을 여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많이들 물어보세요. 사실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가게를 운영하는 게 녹록한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직원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예요. 둘이서 가장 효율적으로 작업과 가게 운영을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가게에 직원을 뽑으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판매나 매출에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그동안 해오던 대로 천천히 가려고요.
오발을 만들면서 영감을 받은 곳이 있나요?
어떤 곳을 보고 ‘아, 여기처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보다 길 가다가 우연히 돌멩이를 하나 보고 ‘이런 모양 재미있네’ 하고 어딘가에 접목해보는 스타일이에요. 주로 소재나 재료를 보고 영감이 떠오르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여행할 때도 한정된 장소에 많은 요소가 있는 ‘도시’를 선호해요. 특히 일본에 자주 가고요. 더 멋진 도시는 많지만 같은 아시아라서 편한 것도 있고, 지인들이 있어서 자유로운 작업이 이뤄지거든요. 좋아하는 예술가 중에는 독일인이 많은데 그들의 여유롭고 진지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고 보니 오발의 제품은 일본과 독일에서 온 것이 많네요.
가장 애착을 느끼는 공간이 있다면요?
직접 꾸민 공간이라 한 군데만 꼽지 못하겠어요. 사실 자주 변하는 편이에요. 그날 기분에 따라 음악 선곡이 달라지는 것처럼요. 다만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 인상적이었어요, 비밀스럽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올라오다가 갑자기 문이 열렸을 때, 그 느낌이 특별해요. 어찌 보면 이곳에서 가장 꾸며지지 않은 공간이지만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울 것 같아요.
빛이 워낙 잘 들어 겨울에도 생각보다 춥지 않아요. 여름은 확실히 더운 편이죠. 그래서 올해는 여름 나기 준비를 마쳤어요. 삼각형 유리 지붕에 방수 소재의 천을 달아놓았죠. 평소 친분이 있는 이광호 작가님과 패션 디자이너 미수 씨가 도와주셨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활판 인쇄에 관심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조금씩 만들어보는 중이에요. 조만간 제품과 연계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올가을, 노리타케Noritake라는 일본 일러스트 작가의 전시를 진행할 예정인데요. 손글씨와 일러스트를 기반으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해온 그와 함께 작업했어요. 이번 전시 때 협업으로 제작한 상품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작업 주제는 오발, ‘타원형’이에요.
오발이 신뢰하는 브랜드와
사려 깊은 제품들
01. Snap Pad, 2 Notebook
포스탈코Postalco의 서류용 패드와 넘김이 부드러운 노트. 포스탈코는 전통 우편 시스템에서 엿볼 수 있는 정갈한 아날로그 감성을 제품에 고스란히 반영한 브랜드로 노트와 서류가방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가격 8만원, 2만 6천원
02. Edition Nord – Notebook
일본 작가 마사나오 히라야마Masanao Hirayama의 노트 시리즈. 위트 있는 주제와 대담한 필치의 드로잉으로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활동하는 그의 작업물을 모티브로 제작했다.
가격 1만 7천원
03. Pencil Villa
가구 제조 과정에서 남은 목재를 활용해 만든 연필깎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무지붕을 덧씌워 ‘연필의 집’을 표현했다. 제품을 만든 파피에 라보Papier Labo는 활판 인쇄와 종이소재 제품을 제작하는 브랜드다.
가격 2만 3천원
04. 8B Pencil & Pencil Cover
일본의 기술 장인들이 만든 8B 연필과 가죽으로 만든 연필 뚜껑. 겟코소Gekkoso는 1970년대 문을 연 화방으로 지금은 문구 브랜드로 성장했다. 색채가 가진 순수한 아름다움, 투명함을 쫓는 화방 용품을 모토로 기본에 충실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
가격 6천원, 2만원
05. Mechanical Pencil
오토포인트Autopoint의 펜 시리즈. 1918년에 창업한 이래, 꾸준히 필기구를 생산하고 있는 미국의 문구 브랜드 오토포인트는 All-American Jumbo
펜으로 견고하면서도 간결한 디자인이 특징이다.가격 2만 3천원
06. Brass Hex Weight
디자이너들의 협업으로 완성된 육각형 문진. 브랜드 아이아콜리 앤 맥캘리스터IAcoli&McAllister는 제이미 아이아콜리Jamie Iacoli와 브라이언 맥캘리스터Brian McAllister가 결성한 디자인 스튜디오다. 공예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제작 방법에 신소재를 접목해 독창적인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가격 14만원
에디터 오혜진
포토그래퍼 임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