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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다 보면 접히는 시간. 다시 만나는 나.
8화 오래된 분식집
한 해를 보내는 의식 중 하나는, 모처럼 맛있는 식당을 떠올리며 여럿의 근사한 그릇들을 계획해 보는 일이다. 비싼 호텔 뷔페를 예약할까, 오래전에 저장해 둔 맛집을 찾아갈까, 올해 한 번도 안 먹어 본 음식을 입에 넣을까. 연말에 어울리는 음식은 뭐가 있더라?
지도 앱을 샅샅이 훑어보다 보면 결국 내 몸이 가장 반응하는 가게들에 멈추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여전한 음식들을 먹고 싶어 한다. 음식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여전한’ 사람이 된다. 보글보글, 따뜻한, 안에 든 모든 게 마음에 드는, 내가 제일 재밌어하는 음식. 한 해와 또다시 안녕 하는 음식은 결국 즉석 떡볶이가 되었다.
회사에 다닐 때 후배와 즉석 떡볶이를 먹으러 간 적이 있다. 후배는 즉석 떡볶이라는 음식이 처음이라고 했고,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다는 걸 알고 너무 놀랐다고 했다. 놀란 이유는 너무 맛있고 자신에게 완벽했기 때문이란다. 그 맑은 말에 나는 와하하 하며 웃었다. 당시 우리는 ‘즉떡탐방대’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고, 회사 내에서 뒤집히는 마음을 잠재우러 때때로 ‘즉떡’ 앞으로 내달렸다. 이제는 회사 후배가 아닌, 이 긴 인생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가끔 친구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무엇이 다행인지 모르고 지나기 쉬운 이 삶에서, 적어도 나는 즉석 떡볶이를 먹고 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우르르 즉석 떡볶이를 먹으러 가던 나는, 학생이라면 모두가 이런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다락방 같은 2층 자리에 앉아, 우리들 인원수를 말하고, 이제 막 끓기 시작한 밍밍한 즉석 떡볶이의 육수를 저마다 맛보며 시작하는, 이 떠들썩한 즉석의 자리. 뒤늦게 나를 키운 이 시간을 떠올려 본다. 한 그릇의 조용한 떡볶이만이 아닌, 요란하게 끓는 박력 터지는 떡볶이를 마주하며 자라서 좋았다고.
즉석 떡볶이를 먹기 위해 버스에 올라 내가 잘 아는 도시인 서울의 일부분을 보면서 오랜만에 지난 즉떡들을 회상한다. 학교와 멀어질수록 맛있어지던 시간. 회사에서의 무표정을 싹 잊고 웃던 시간. 내가 어떤 정리를 기념하며 즉석 떡볶이를 먹고 싶어 했던 건, 단지 중독적인 탄수화물의 힘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보글보글 즉석 떡볶이를 그리며 앉아 있었더니 연말 즉석 떡볶이에 가까워졌다. 버스 한 대를 타고 거뜬히 도착한 연말이었다.
도착한 즉석 떡볶이 가게 여기저기에는 아련한 분위기의 정물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묘한 옛 가구들이 놓여 있고, 정물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소품들도 저마다 자신의 기분을 뽐내고 있다. 오래된 분식집의 매력이 이것이다. 입장하는 동시에 기대되는 맛이 있다. 오늘 처음 만난 새로운 맛이 아닌, 친숙하기에 몇 배 더 맛있어 하는 맛. 아는 맛에 오늘의 따끈함과 오래전의 그리움이 모두 함께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맛.
즉석 떡볶이를 먹으며 자란 사람은, 어느 즉석 떡볶이 가게에 가도 당황하지 않고 오늘 자 토핑을 고른다. 아는 식감을 떠올리면서 어떤 건 작대기 하나, 어떤 건 작대기 둘, 욕심내고 싶은 건 셋. 볶음밥도 먹어야 하니까 그럼 이건 하나만 할까? 찍찍 지우고 다시 작대기 하나. 당장 도래할, 내가 정한 맛있는 미래. 곧 만날 냄비를 이렇게 저렇게 그리는 시간은, 어쩌면 연초에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간 동거인은 “여태까지 내가 먹은 즉떡 중, 이게 단연 1위.”라고 단칼에 말했다. “오!” 하고 놀랐더니 “넌 아니야? 이게 맛없다고?” 하며 또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물론 너무 맛있어. 하지만, 고등학생 때 먹은 건 못 이기네.”
나의 지난날을 차마 좋아할 수 없지만, 무언가 하나쯤은 기꺼이 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 그 목록이 생겨날 때면 아득해진다. 그래 놓고 어느 순간 나도 “진짜 맛있다.” 하며 냄비 안에서 뜨겁게 늘어진 온갖 좋아하는 것들을 싹싹 긁어모으고 있었다. 배가 불러오니 이제야 연말을 회상하며 당장 떠들고 싶은 이야기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순간 내 기분은 고등학생 그대로. 다락방 즉석 떡볶이를 먹던 때와 완전히 같았다. 배가 부르자 몸을 뒤로 눕히면서 그제야 편한 표정을 지으며 떠들던 내 표정이 오늘 오랜만에 지어졌다. 즉석 떡볶이 앞에서 떠들다 보면, 내가 접어 둔 페이지를 다시 만난다.
떠들다 보면 접히는 시간, 다시 만나는 나. 나는 이 기분을 즉석 떡볶이의 기분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집에서 해 먹으면 만나기 어려운, 반드시 오래된 분식집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였다.
언제나 여전한 마음이 되는 음식이 있으신가요? 저에게는 즉석 떡볶이가 그렇답니다. 떡볶이 가게는 언제나 배가 너무 고플 때 갔던 것 같아요. 한 그릇에 담긴 떡볶이는 금방 먹을 수 있지만 즉석 떡볶이는 눈앞에서 한바탕 끓어야만 먹을 수 있지요. 그래서인지 더 맛있어 보이고, 안달이 났던 것 같아요. 여전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즉석 떡볶이를 마주하면 여전한 마음이 됩니다. 단지 당장 끓기만을 기다리는 아주 단순한 마음이요. 연말에 그 마음을 다시 만나면 홀가분해집니다. 여러분들에겐 어떤 음식이 그러한지 궁금해요. 알기 쉬운 단순한 마음을 오래간만에 느끼며, 새로운 한 해를 편안하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글·그림 임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