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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기에 만날 수 있는 계절
5화 채소시장
한 달에 한 번 작업실 근처 가게에서 작은 채소시장이 열린다. 애써 기다리지 않고 하루하루를 그저 보내기만 하면 다시금 나의 마을에 찾아오는 계절. 채소시장을 둘러보기만 해도 딱 이맘때의, 오늘이기에 만날 수 있는 계절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날을 보상처럼 여기고 싶어서 일부러 모른 척하고 지내는 것도 같다. 오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해내면서 하늘보다는 모니터와 일거리에 고개를 숙이고 지내다 보면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금방 지난다. 어느 날 평소처럼 출근한 오전, 멍하게 SNS를 보다 보면 어느새 나의 근처에 또다시 채소들이 도착해 있다. 이날은 점심 메뉴도 달라지고 산책길도 달라진다. 에코백과 빈 파우치를 들고 밥을 먹으러 가면서 먼저 채소시장에 들른다. 밥을 먹고 오면 오늘 만날 수 있는 채소들이 몽땅 사라져 있을지도 모르기에 곧장 채소시장으로 향해야 한다. 여유만만하게 밥 먼저 먹고서 늦게 왔다가 빈 바구니들만 만나고 돌아선 적이 있어서 꼭 지키는 순서다.
채소시장이지만 과일이나 저장 음식, 천연 재료로 만든 수세미, 원두나 빵 등 볼거리가 다채롭다. 겨울에는 채소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딸기 냄새가 진동했다. 도착하기도 전에 내 장바구니에는 이 계절의 딸기가 담긴다. 겨울은 이미 멀어졌는데도 그날의 딸기 향은 아직도 기억으로 맡아질 정도다.
밤을 한가득 산 날도 있었다. 밤 농부가 손수 건네준 깐 생률을 그 자리에서 아작아작 씹었다. 같이 간 동거인은 생률이 이렇게 맛있었냐며 감탄했고, 나는 후후 웃으면서 마치 내가 밤농사를 지은 것처럼 뿌듯해했다. 한가득 담긴 한 봉지를 사서 반은 쪄서 먹고, 반은 생으로 먹었다. 냉장고에 밤이 있는 계절은 그 언제보다도 풍요롭게 느껴진다.
여름이 다가올수록 채소시장은 풍성해지기 마련이다. 주어진 시간을 오로지 자라나기 위해 썼을 채소들을 만나는 일은 여름에 느낄 수 있는 뭉클함이기도 하다. 그간 나는 어땠는지 돌이켜본다. 지난 계절을 허투루 쓰지 않았는지, 혹 자라나기 싫은 마음이 든 날이 있던 건 아닌지, 둥글고 길쭉하고 푸릇푸릇한 채소와 열매를 보며 뒤늦게 나를 챙긴다. 같은 시간 속 자연과 나를 비교해 보자면 언제나 자연 쪽이 씩씩하다. 로즈메리, 루콜라 등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마치 꽃다발처럼 바리바리 사 들고 시장을 떠나는 동네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힘이 난다. 다시금 오늘부터 시작될 한 달을 힘차게 걷고 싶어진다. 오늘을 챙기고, 내일을 바라보며, 냉장고에 계절을 채우는 장면은 그 어떤 장면보다도 기운차다.
최근에 간 시장에서는 사려던 토마토가 금세 다 팔려서 아무것도 못 샀지만,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구경하면서 나의 냉장고 속에 아직 오늘이 되지 못한 채소들을 떠올렸다. “오늘 저녁엔 시금치를 볶아야겠다.” 하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작업실에만 앉아 있었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오늘의 계절이었다.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오늘 중 저녁의 순간이 얻어진 날이었다. 시장에서 장을 보면 바로 오늘의 이야기들이 나에게 새로 쓰인다.
나는 이토록이나 오늘이라는 말을, 오늘이라는 계절을, 오늘이라는 마음을 좋아한다. 오늘이기에 만날 수 있는 것은, 오늘만 알아챌 수가 있다. 내일이 되면 다시금 내일의 오늘들을 만나기 바쁘고 지나치기 바쁘다. 우리들은 오늘의 바구니에 오늘 만난 계절들을 담으며 지내고 있다. 과연 누구의 바구니에 오늘의 계절이 더 그득할까. 가끔 그 바구니들을 구경하고 싶어진다. ‘오늘’이라고 적힌 각자의 계절 바구니들을.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했던 말을 가끔 떠올린다. 일기를 쓸 때는 ‘오늘’과 ‘나’ 두 단어를 되도록 쓰지 말라는 당부였다. 어차피 오늘의 일이고 어차피 내가 쓰는 글이니 오늘과 나 두 단어는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써봤자 어차피 중복적인 표현이라고 말이다. 그 뒤로 나는 두 단어를 신경 쓰느라 오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곤 했다. 지난 일기들의 첫 문장에는 오늘과 나 둘 모두 자주 등장했다. 어느 날은 “오늘은 사촌언니랑 수영장에 갔다.”로 시작하는 하루였고, 어느 날은 “나는 물냉면을 참 좋아해서 여름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로 시작하는 하루였다. 처음에는 선생님 말도 맞긴 하다며 신경 썼지만, 점점 다른 표정이 지어졌다. 오늘이니까 오늘이라고 쓸 수 있고, 내가 쓰는 거니까 나라고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오늘이라는 말은 오늘만 쓸 수 있는데요? 책상에 앉아 선생님께 뒤늦은 대답을 하면서 그냥 원래대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글이나 일기를 쓸 때 오늘과 나, 두 단어를 자주 쓴다. 그리고 오늘 일을 쓰면서 오늘이라는 단어를 매번 새롭게 만난다. 오늘은 하늘처럼 매 순간 바뀌고, 나 또한 바람처럼 쉬이 달라진다. 내가 나의 동네로 오는 채소시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 달에 한 번 채소시장에 갈 적에 칠해지는 나의 오늘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딱 오늘만의 계절의 색이 입혀지는 날. 어딜 가지 않아도 오늘의 계절을 만나는 날.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계절을 골라 냉장고에 넣으면서, 다가오는 시간을 다시금 잘 만나자고 다짐한다.
글·그림 임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