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되는 종이 2

내 뒷모습이 있는 풍경은 어떤 분위기였을까

내 뒷모습이 있는 풍경은 어떤 분위기였을까

2화 미술관

무언가를 오래 쳐다보게 되는 날이 있다. 가만히 서서, 가볍게 뒷짐을 지고, 단지 오래 응시하는 것만이 당장의 유일한 할 일이라는 듯이 나를 내버려 두는 날. 작은 목적은 있지만 열심히 다니지 않고, 하나의 공간이 나를 잔뜩 품어주었으면 하는 기분. 그럴 때면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 산책을 좋아하게 된 건 홀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미술관이라는 장소에 산책이라는 단어를 더하게 된 것도 여행의 힘이 컸다. 어떤 일과를 만들기는 해야 하는데 눈에 힘을 풀고 싶은 날. 이런 날은 여행 도중에 반드시 찾아왔고 그날의 목적지는 어떤 날씨든 미술관이 되었다.

보름이 조금 안 되는 여행 일정 중에 한 미술관을 세 번 방문한 적이 있다. 모르는 곳이기에 번뜩하며 눈이 떠지는 자극보다, 가봤기에 당연히 마음에 들 것이라는 안심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번 더 그윽하게 좋아하게 되는 순간들을 얻게 되자 자꾸만 탐이 났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몰랐던 것들이 펼쳐질 때, 자극은 더 크게 일어났다.

버스를 타고 미술관으로 향하며 지난날보다 익숙해진 풍경들을 눈에 넣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설게만 느껴지던 이 풍경은, 어느새 나의 기억 안에 흐릿하게나마 그려져 있다. 며칠 전에는 닫혀 있던 과일가게가 오늘은 밝게 열려 있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버스의 속도로 번진다. 과일 가게가 열린 모습은 이렇구나, 닫혀 있을 때가 겨울이면 오늘은 꼭 여름 같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미술관이 있는 마을에 가까워진다. 마음으로 느끼는 속도감이란 꽤 재밌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면 어느덧 내릴 준비를 할 시간이다.

아는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고 싶었다. 처음 봤을 때 내 발목을 붙잡던 그림 한 점. 이제 이 정도 봤으면 그만 옆 그림으로 옮겨야 할 테니 내 몸이 나를 움직이려 하는데도 시선은 ‘아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작은 그림은 불현듯 내 것이 되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눈으로 몇 번이나 담았던 그림을 또 한 번 오래 쳐다보고 싶은 순간만이 오늘의 유일한 목적지. 세 번째 방문한 미술관이지만 언제나 시작과 끝의 흐름은 같다. 오늘 바라보고 싶은 한 점의 그림에 우다다 달려가는 것도 꽤 로맨틱할 것 같은데, 나는 일상의 지루함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미술관에서 꾸려준 방향으로 거듭 감상하는 걸 택한다. 주어진 시간을 늘 이렇게 비슷하게 허비한다. 이 그림들이 내 집에 걸려 있는 게 아닌 한 절대 싫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와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감각이 이 안에만 있다. 이 공간을 추억하며 곱씹을 언젠가의 나는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차근차근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 쳐다보고 싶은 그림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 번 본 이후로 계속 그리워서 눈 안으로 상상하며 그려 보기만 하던 한 점의 그림. 그 그림을 다시 만났을 때, 처음의 기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을까. 당연히 느끼지 못하겠지만, 다시 만나러 가는 시간 동안에는 전에 없던 설렘이 두둥실 커진다.

오래 쳐다볼 것을 다시 만났다. 그제야 서 있던 내 몸이 미술관 바닥에 고정된 것처럼 꽤 안정적인 자세가 된다. 뒷짐을 지며 숨을 깊게 쉰다. 첫날에는 같은 그림을 두 손 모으고 봤었지. 그날의 미술관과 오늘의 미술관의 풍경은 혹시 내 뒷모습으로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을까. 이런 생각을 멋대로 하며, 언제까지고 그림 앞에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나. 나는 그날의 오후를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꽤나 선명한 공기로 기억하고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전시, 같은 그림. 하지만 다른 날에다가 날씨도 다르고 서 있는 나의 기분도 다르다. 좋아하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 안에 녹아든 나까지 보고 싶어진다. 어쩌면 내가 오래 쳐다보고 싶은 건 이 그림을 마냥 쳐다보는 내 뒷모습이 아닐까. 뒷모습까지 포함된 이 그림이 걸린 미술관 풍경이 아닐까. 내 뒷모습이 있는 풍경은 어떤 분위기였을까. 한 점의 그림으로 인해 모처럼 내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개인이 평범한 일과를 꾸리는 데 이런 기억들이 큰 힘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무언가를 오래 쳐다보고 싶어지는 날이라는 건, 고요하게 힘을 받고 싶은 날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되는 날이 듬성듬성하게나마 놓일 때, 내가 있는 분위기를 찬찬히 좋아하게 된다.

가만히 앉아 추운 계절이 오는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는 요즘,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침실에 있는 창문에는 어느새 빨간 물이 들었어요. 여름에는 초록색이었는데 어느덧 붉은색으로 변해 불투명한 창문의 반을 채우고 있습니다. 닫힌 창문으로 바라보면 꼭 붉은 바다 같기도 하고, 묘하게 따뜻해 보이기도 해요. 잠시 일과에 집중하며 지내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잎이 다 떨어져 나뭇가지만이 남겠지요. 그렇지 않도록 매일 몇 번씩 창문에 눈을 두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본다는 건 그 장소가 어디든 나를 포함한 다각적인 풍경이 만들어지는 일입니다. 그건 마치 스노우볼의 세상같기도 하고, 동화책의 중요한 장면 같기도 해요. 미술관 산책을 한 지 꽤 되어서 그런지, 집 안에서는 이렇게 창문을 한 점의 그림처럼 바라봅니다. 매일 색감이 바뀌는 그림이지요. 설거지를 마치고 느린 걸음으로 방에 들어와 바라보는 창문이라는 그림 한 점. 내일은 어떤 색감일까요. 문득 너무 멀지 않은 가까운 미술관에 찾아가 창문 앞에 가만히 서 있고 싶어졌어요. 많은 그림을 본 후에 가만히 복도에 서서 바깥의 창문을 바라보던 시간 역시 미술관 산책의 시간이니까요.저에게도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이번 겨울에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임진아
읽고 그리는 삽화가. 생활하며 쓰는 에세이스트. 만화 풍의 생각을 쓰고 그립니다. 종이 위에 표현하는 일을 좋아하며, ‘임진아 페이퍼’라는 이름으로 지류를 선보입니다. 만화 에세이 《오늘의 단어》를 쓰고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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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임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