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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아무때나 시작을 응원합니다
10화 지난날
작년 여름에 2023년 일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했던 시간 여행은 누구보다도 먼저 미래에 가보는 게 아닌 지나온 하루하루씩의 계절들을 찾아가는 과거 여행이었다. 1월 1일만 되면 했던 생각이 뭐였더라, 봄이라고 느낀 날은 언제였더라, 매일 아침 테이블에 그려지는 커피 그림이 ‘따뜻’에서 ‘시원’으로 바뀌는 날이 몇 월 며칠이었더라, 꽃집에서 튤립을 선보이는 날이 어느 즈음이었더라, 라일락 냄새는 언제 느꼈더라, 왠지 기운이 내려가는 달은 언제더라, 가을에는 대체로 어떤 기분으로 지냈더라, 이맘때에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였더라. 지나치던 모든 날이 하나의 일력을 위한 영감으로 쏟아졌다.
365개의 네모 칸에 1월부터 12월까지의 단어와 문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24절기, 기념일, 공휴일에는 확실하게 넣을만한 단어들이 있었다. 일 년 중 그런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특별한 날도 아니고, 계절에 딱 들어맞는 날도 아닌 애매하게만 보이는 날. 그런 아무 날을 지내던 나는 뚜렷한 오늘을 보냈겠지만, 떨어져서 바라보니 이렇다 할 분위기가 그려지지 않았다. 지난 내 계절에 대한 기록들이 필요했다. 그저 오늘에 대해 아무 말이라 적었던 나의 SNS 피드, 다이어리 구석구석에 남긴 낙서, 힘들 때 면 긴 글을 쓰던 블로그 등, 우선 지난 기록을 다시 읽으며 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런 사람으로 지냈다. 대체로 3월에 시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라일락이 피기 시작할 때면 찾아가는 골목이 있는 사람이었고, 아직 추운 날에도 장미 덩굴의 모양을 살피며 말을 거는 사람이었다. 새해가 되자마자 목표를 세우는 사람은 아니었고, 1월과 2월에는 작년에 즐기지 못한 것의 목록을 모아 맘껏 즐기는 사람이었고, 제철 채소와 제철 과일을 챙기느라 바쁜 사람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주말에는 대체로 뒹굴뒹굴하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한 달이 지나면 지난달을 돌아보는 사람이었고, 기운이 빠질때에는 듣고 싶은 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무엇이 될지 모르고 떠들던 나의 하루의 이야기들은 아무 날의 단어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세상이 특별하다고 정해둔 날 또한 아무 날처럼 다가왔다. 1월 1일의 단어는 ‘표지’로 정하고, 12월 31일 단어는 ‘책등’로 정했다. 동네 서점에서 샅샅이 살핀 책을 사서 그날만 반짝 가까이하다가 집 책장에 표지가 보이도록 한참을 진열해 두는 날과 1월 1일은 어쩐지 닮은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 어느 날 단숨에 읽어 버리고 책장에 책등이 보이도록 꽂아두는 날을 만나게 되는데 그건 꼭 12월 31일 같았다. 일 년이 한 권의 책이라면, 보고 싶은 곳에 올해의 표지를 걸어 두고 싶지 않을까. 그리고 지난 한 해를 언제든 쉽게 빼서 다시 볼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곳에 꽂아두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빼서 읽어보고 싶은 한 해를 살면 더 좋고.
3월 1일 단어는 ‘일기’로 정했다. ‘새해에는 일기를 꼭 다시 쓰고 싶다’ 중얼거리던 내 마음은 언제나 연말만 되면 피어났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매일 일기를 쓰기란 쉽지 않다는걸. 흩어져 있는 자국들을 모으면 충분히 한 권의 일기장이 되겠지만 그걸 대체 누가 정리해 준단 말인가. 나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1월과 2월이 아닌 3월 첫날에 ‘일기’라는 단어를 심어둔 것인데, 일력을 사용하는 분들 또한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신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올해는 1월 말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나는 되도록 많은 안심 장치를 심어 놓는 사람이라 3월 31일에는 ‘아직’이라는 단어를, 4월 1일에는 ‘슬슬’이라는 단어를 심어두었다. 4월이 되었을 때 좋아하는 작가님이 4월 1일 일력을 SNS에 올리면서 이런 말을 남기셨다. “나만 늦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위안이 됩니다.” 이 말에 나 또한 위안 받았다. 누구든 연초에는 뭐든 시작하고 싶다. 누가 봐도 시작하기 좋은 때니까. 하지만 언제든 시작해도 괜찮다는 말을 살아가며 듣기란 쉽지 않다. 그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그려 넣었을 뿐인데, 많은 분이 끄덕여 주는 그림이 그려졌다. 4월 1일 ‘슬슬’ 단어 밑에는 잠을 다 잔 키키가 기지개를 켜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내가 아주 좋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키키는 매일 단잠을 잔 후에는 슬슬 움직여 볼까 하며 기지개를 켠다. 그 그림 곁에는 “생각만 하던 일로 다가갈 준비를 해볼까” 문장을 적어 두었다.
“아직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어”라고 적힌 3월 31일 ‘아직’ 일력을 뜯은 다음 날, 기지개를 켜는 ‘슬슬’ 일력 읽으면서 내가 한 말인데도 정말로 응원받았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아무 때나 시작을 응원한다. 전에 못 한 무언가를 해봐야 하는 게 아니라, 봄이라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바빠 보이니 나도 뭐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조급해지는 게 아니라, 켜켜이 쌓인 생각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날이 찾아오면 그게 언제든 내 자리에서 일어나면 된다고.
그럼 ‘시작’이라는 단어는 어디에 넣었을까? 바로 6월 1일. 지나 보면 정말로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그려지는 날, 한 해의 중간에 머무는 날, 이제 더운 것도 잘 알겠고 추운 것도 기억나는 날.
“나의 구석구석을 좋아하기 시작했어.”
거울 속 나와 마주 보는 그림 위에 피어난 ‘시작’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의 하루에 살포시 다가갔으면, 잘 그려지지 않던 ‘시작’이라는 단어에 하루만큼은 기댔으면 좋겠다.
일력 덕분에 만난 나의 지난날들로 일력의 단어가 채워졌다. 잘 모르는 내일이 어째선지 두렵지 않게 느껴진다.
글·그림 임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