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되는 종이 1

바깥의 좋은 점을 안으로 가져오자

바깥의 좋은 점을 안으로 가져오자

Prologue

얇은 종이 한 장만으로 여럿의 분위기를 상상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종이 한 장 그 이상의 의미까지는 필요 없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나는 얼마든지 만끽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 속한다. 그런 사람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충분히 망상해도 되는 시간이 주어지면 그제야 대놓고 즐거워진다.

한데 합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종이는 집과 작업실 곳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다. 엽서, 전단지, 포스터, 편지, 책 등 산 것도 있고 홍보용으로 받은 것도 있다. 어딘가에 쌓여 있기도 하고, 대충 비슷하게 엮인 것들과 뭉쳐 있기도 하고, 나름의 분류로 정리되어 있다. 이는 정리라기보다는 대기에 가깝다.

‘언젠가’를 위해 모아둔 것들은 아무 날에 불현듯 필요해진다. 언뜻 비어 있는 벽을 멍하니 바라보는 날, 문득 어떤 기운이 필요한 날에 내가 모았던 종이를 찾는다. 이는, 뚜렷한 이유로 내려앉아 버린 마음에게 일단 동네 빵집의 빵 하나를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 별거 아닌 사물이기에 바짝 다가가기가 쉽다.

오래간만에 고개를 숙이고 고심하며 고른 종이에 조심히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고 작업실 책상 가까운 벽에 무심히 붙여 본다. 아무것도 없던 벽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다. 움직임이 없는 그림은 오늘 나에게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기도 아른거리기도 한다. 기분이 뚝 하고 잠잠한 날이면 그림 또한 똑같이 군다. 종이는 꼭 나를 향해 언제까지고 망설이고 있는 것 같다.

붙여 둔 여러 종이 중에서 오래 쳐다보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때때로 창문으로 여긴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종이를 볼 때마다 여기가 아닌 곳 같아져서 이상한 힘이 번쩍하고 생겼다가 사라진다. 나의 힘으로 원하는 벽에 창문을 낼 수는 없지만, 망상의 힘을 빌린다면 나의 벽은 현실의 밖보다 재밌어진다. 크고 작은 것들을 모으기 좋아하는 나는, 집 안에서 느끼는 바깥의 좋은 점 또한 나의 취향대로 모으고 있는 걸까. 바깥의 좋은 점을 안으로 가져오기로 마음먹었더니, 집 안에서 바깥이라는 단어가 한없이 가까워졌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밖이 되는 종이를 내 손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결심 비슷한 기운으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미 나의 그림을 창문으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잘한 상상들을 부지런히 표현하고 싶어진다.

조심히 죽 둘러서 친 네모 칸 안에는 앞으로 어떤 창문이 모일까. 담백한 장면을 오래 기억하는 것처럼, 바깥의 싱거운 분위기들이 그려지지 않을까. 내가 바라보고 싶은 바깥은 내가 있지 않은 외부가 아니라 내가 있던 어딘가일 것이다. 나는 나를 얼마든지 그려 넣을 수 있는 장소에 방문하길 좋아했으니까.

바깥에서 쉬이 나를 잃을 뻔한 적이 많았기에 한동안 집 안에서만, 작업실에서만, 나가봤자 잘 아는 곳만 갔다. 이제는 나가지 않는 게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기에 보란 듯이 집 안에서의 생활만을 꾸려나갔고 바깥보다는 안을 향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자 더 이상 들어갈 구석이 없어서 점점 나라는 사람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창문을 내고 싶어졌다. 안에서의 나와 제법 가까이 사귀었지만, 나와의 대화거리는 대부분 밖에 있을 때의 내 모습에 대해서였다.

집 안 분위기는 한 장의 무게로 얼마든지 바뀐다. 그 한 장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런 하루를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종이를 사랑하기에 언제까지라도 종이로 된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고 싶다. 고작 몇 그램의 물건에 이만큼이나 기대어 살았으니, 받은 힘에 나를 더해서 전에 없던 기운을 선보이고 싶다.

밖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들은, 거짓보다는 지금에 가깝지 않을까. 이제부터 어딜 가보면 좋을까. 입을 다물고 오래 머물 수 있던 장소들도 하나둘 떠나고 싶다.

안녕하세요. 임진아입니다. 혹시 창문을 자주 보시나요? 지금은 10월 초인데요. 오늘 아침에 창밖을 보면서 오늘 같은 날이 한 10일쯤만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정한 일들에 끝없이 속한 기분으로 집과 작업실만을 오고 가다가 문득 너무나 열심히 가을인 창문을 보니 마음이 울렁거리더라고요. 출근길에 동네에서 제일 큰 공원에 들러 벤치에 앉아 귤을 까먹고 생활견 키키와 신나게 뛰어논 후에 언제나처럼 다시 작업실의 책상에 앉았더니 저도 조금은 가을다워진 것 같았답니다. 흐릿한 창문을 닫아도 밖은 드리운 파란 하늘. 창문을 빼꼼 열어 하늘의 쨍한 파란색을 자꾸만 봅니다. 고른다는 건 역시 마음으로부터 즐거워지는 일이에요. 바깥의 모든 걸 좋아할 수는 없지만, 오늘부터 하나둘 가져와 보자고 작게 외쳐보면 바깥의 좋은 점이 보이니까요. 보고 싶을 때 가만히 눈을 두는 이런 창문 같은 그림에 여러분의 모습을 더해 그려 넣어 주세요. 저는 여러분의 하루에 얇은 종이를 가만히 쳐다보는 시간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답니다.

임진아
읽고 그리는 삽화가. 생활하며 쓰는 에세이스트. 만화 풍의 생각을 쓰고 그립니다. 종이 위에 표현하는 일을 좋아하며, ‘임진아 페이퍼’라는 이름으로 지류를 선보입니다. 만화 에세이 《오늘의 단어》를 쓰고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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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임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