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의 마지막 호텔

여행지를 뒤로 하는 아름다운 방식에 관하여.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하루는 ‘호텔 프리메로 프리메라Primero Primera’에서 보내기로 했다. 여행을 하나의 챕터로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마지막 하룻밤을 보낼 호텔을 찾는 데 신중한 편이다. 열흘의 시간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생생하고 다채로운 경험들이 견고한 기억으로 변환되기까지 고요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들떠버린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언젠가는 이 경험을 기록해야 하는 자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 도심 한가운데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호텔은 바르셀로나 중심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트레스 토레스Tres Torres라는 동네에 있다. 숍이나 카페, 흔한 슈퍼마켓조차 보이지 않는 부유한 주택가 가운데의 호텔이라면, 그 도시의 고유한 맥락이 더 진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주변의 여느 집보다는 규모가 제법 큰, 정원이 딸린 저택 앞에서 택시가 멈춰 섰다. 프리메로 프리메라는 1955년 이 저택을 소유한 페레스 살라Perez Sala 가족이 운영하는 부티크 호텔이다. 2012년 대대적인 레노베이션을 거쳐 객실 30개의 호텔로 문을 연 그들은 여전히 이 저택의 한 층에 거주하고 있다. 호텔 소유주와 함께 머문다는 사실이 이곳을 더욱 ‘집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우아한 목재 나선형 계단 옆 어둑한 리셉션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하는 사이, 투숙객들이 계단을 이용해 빙글빙글 오르내리고 있었다. 카드키를 받아 들고 46호 객실로 들어갔다. 디럭스 스위트 룸, 커다란 테라스가 딸린 제법 넓은 방이다. 새하얀 커튼이 살랑거리는 테라스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따라 홀리듯 걸어 나갔다. 차분한 동네 풍경 너머로 티비다보Tibidabo산의 웅장함이 내다보였다. 시내에서는 완만한 능선 같던 산은 내가 북쪽으로 올라온 탓에 제법 늠름하게 보였다.

산꼭대기에 우뚝 선 사그랏 코르 성당Sagrat Cor이 화려한 돌조각 같은 희미한 실루엣을 그렸다. 그 옆 1868년에 문을 연 놀이공원에는 신비로운 대관람차도 있다는데, 왜 티비다보에 올라가 보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바르셀로나답지 않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무는 동안 처음 만나는 비였다. 정원 풀장의 파란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빗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 방 안으로 들어와 푹신한 암체어에 몸을 깊숙이 묻고 앉았다. 하얀 시트의 침대, 둥그스름한 셰이드의 스페인 앤틱부터 조명 브랜드 아르떼미데Artemide의 톨로메오Tolomeo까지 다양한 램프들이 방을 더욱 아늑하게 채웠다. 지중해의 식생들이 섬세하게 조각된 카탈루냐 스타일의 묵직한 책상은 창가로 향해 있어 글이 꽤 잘 써질 만한 자리처럼 보였다. 10시나 되어야 어두워지는 이곳에서 밤은 더디게 찾아오므로 노트를 펼치고 떠오르는 기억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갔다.

밀려드는 빗소리에 잔상 같은 바르셀로나의 찬란한 색들이 마음에 더욱 차올랐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황톳빛 카탈루냐의 땅, 이 모든 걸 보듬어 쓸어내리던 햇살. 살랑거리던 거리의 플라타너스와 그것이 반사되어 끝없이 떨리던 그림자. 노랑과 민트, 분홍이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나 있었다. 조성진의 베토벤과 브람스가 카탈루냐 음악당에 울리던 밤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던 홀의 꿈결 같던 타일 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 속절없이 흐르던 여행자의 시간 속에, 잠시 멈춰버린 것 같았던 순간들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이것들을 기억하고 내내 되새기게 될 테지. 침대에 엎드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꾹꾹 눌러쓰고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늘도 정확히 6시에 눈이 떠졌다. 새벽의 새소리 때문이다. 커튼을 여니 희미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며, 맑은 하늘을 보여줄 것 같은 푸른 섬광이 서려 있다. 어젯밤 끄적거리던 노트를 보니, 술에 취해 있던 사람처럼 멋쩍은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업무들을 메일로 간단히 처리하고 1층으로 내려가려는데,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 쪽이 더 끌렸다. 좁은 나선형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가는 감각이 재미있을 테니까. 이른 조식이 준비된 다이닝룸, 잠이 덜 깬 사람들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들려온다. 라운지에는 이른 미팅에 여념이 없는 중년들이 커피 한 잔만 달랑 두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차분한 분주함은 관광객이 아닌 로컬들이 더 즐겨 찾는 호텔 특유의 분위기다.

오늘 아침은 친구 유정과 함께하기로 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녀가 도착했다. 우리는 화사한 꽃무늬 벽 아래의 테이블에 앉아 따듯한 스패니시 오믈렛과 양치즈, 하몽을 나누어 먹으며 내일 다시 만날 것처럼 일상적인 수다를 떨었다. 유정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바르셀로나로 나를 이끈 사람. 자신을 매혹한 이 도시의 면면과 사랑스럽고 모험적인 친구들을 나와 만나게 해주었다. 여행 내내 동행하며 호안 미로Joan Miró의 시적인 회화를 음미했고, 아름다운 산트 파우Sant Pau 병원의 눈부신 모자이크 타일 아래에서 숨죽이는 시간을 나누었다. 모두가 가우디를 향해 몰려가는 동안 우리는 그 방향을 거슬러 둘만의 발견을 은밀히 만들어갔다. 함께 있으나 서로 다른 것을 보고 포착해 내면서.

그녀의 친구들은 처음 보는 나를 끌어안으며 “이런 날씨에 바르셀로나에 온 건 진짜 행운이야.”라고 했고, 나는 정말 그렇다고 매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행자의 시선에서 이 계절, 이 도시의 삶 모든 것은 날씨에 대한 화답처럼 보였다. 집을 나서면 햇빛 아래에서 늘 폴짝폴짝 뛰듯이 걸으며 거리의 강아지들을 쓰다듬고 소담스럽게 핀 꽃 한 송이를 한참 바라보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유정의 모습에서 나는 내내 조용한 충격에 휩싸였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서울에서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행복의 실체, 그것이 이 도시에서는 너무나도 가벼웠고 곳곳에 있었으며 현재에 기반하고 있었다. 허브차로 마무리하고 정원으로 나가보았다. 어제 비를 맞은 풀잎들이 더욱 싱그러웠다. 사이프러스 두 그루가 풀장 수면 위에 길다란 모양을 그리고 있다.

물에 몸을 담그기에 4월은 아직 좀 이른 걸까? 살짝 담궈본 발끝으로 알싸한 차가움이 전해졌다. 라탄 의자에 앉아 정원을 하염없이 둘러보다가 화사한 수국과 레드바레리앙 사이로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중년 여인이 보였다. 여행자의 시선은 고독 속에 놓인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한다. 호텔의 오전은 분주히 투숙객들을 떠나보내고 고요 쪽으로 기우는 시간이다. 프리메로 프리메라에서의 하루는 바르셀로나에서의 무수한 인상들을 일종의 유기적인 덩어리로 응축해 주었다. 아직 지중해의 빛으로 채워진 내 안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이곳을 떠나 베를린으로 향한다. 유정에게 짧게 쓴 편지 한 통을 건네고 서둘러 택시에 올랐다. 서두르지 않으려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택시는 속도를 내며 아스팔트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박선영
여행, 아트, 디자인, 건축 등 매혹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쓰는 칼럼니스트. 특히 고유한 히스토리와 흥미로운 디자인을 지닌 전 세계의 장소들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즐긴다. 그중에서도 호텔은 그녀의 여행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데, 이 시대의 건축과 디자인, 예술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장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은 책으로 《유럽 호텔 여행》, 《독일 미감》이 있다.

A.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리아-산트 헤르바시 닥터 카룰라 거리 25번지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사진 박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