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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언제나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든다. 나는 이 단순한 진리를 예술가의 걸음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매일 끼니를 챙기듯 성실하게 밖으로 나서고, 낯선 길로도 주저 없이 나아가며, 그 길에서 무수한 기척과 조우하는 여정이라니. 그에 비해 우리의 산책은 어떤가. 미처 해소하지 못한 일과 감정에 쫓겨 겨우 밖으로 나선 날엔, 도피처를 찾듯 숨 가쁘게 걷는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처럼. 걸음걸이를 조금 바꿔보려 해도 이내 익숙한 리듬으로 되돌아온다. 어쨌든 나는 나이기에 내가 아는 박자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어제와 조금은 다른 자세로 걷고 싶은 날이면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오늘의 산책점을 쳐본다. 어떤 문장이 나를 걷게 만들지, 그 밑줄에서 시작된 발걸음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연필로 그어둔 트랙 위에서 운동화 끈을 고쳐 맨다.
발저의 문장은 나라는 우람한 그림자 뒤에 숨어있던 작고 연약한 존재들에게 빛을 비춘다. ‘발저식 산책’이 필요한 날에는 생활 산책의 대가인 엄마를 꾀어 밖으로 나선다. 우리 엄마는 정신없는 출근길에도 하천가에서 반상회를 여는 하얀 새들의 수다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늘어지게 하품하며 집으로 돌아오다가도, 텅 빈 가지에 어느새 움트기 시작한 봉오리를 보고 감탄한다. 그만큼 길 위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 시야를 한곳에 고정한 채 직진만 거듭하는 초보 운전자에게 넓게 보는 법을 가르쳐 주듯, 엄마는 주목해야 할 풍경을 콕콕 짚어준다. 윤슬에 멍하니 시선을 두다가도 엄마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저 오리 가족은 최근에 이사했나 봐. 지난주까지만 해도 여기엔 원래 시꺼먼 오리가 살았는데, 어딜 갔는지 안 보이더라고.” 그런 이야기가 내면의 동굴로 숨으려던 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낸다. 잔디 저편에서 쉬고 있는 어른 오리들과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급류를 타며 노는 작은 오리를 발견한다. 며칠간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난 걸까. 유속이 제법 거세다. 장면의 맥락을 따라가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꺼먼 오리의 안부를 상상해 본다.
인간에게 하루란 변화를 감지하기에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자연의 하루는 모든 일이 일어날 만큼 충분히 길다. 한 발을 내딛는 사이에도 주변 생물들은 찬찬히 변한다. 매일 지나던 이 길 위에는 내가 미처 몰랐던 오늘의 새 소식들이 수두룩하게 쌓이고 있다. 발저의 문장을 거쳐 어느새 《걷기 예찬》 속 브르통의 문장에 닿는다. “도보 여행자는 이름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다.” 그 ‘이름’이란 산이나 마을처럼 산책자의 좌표를 설명해 주는 지명이다. 대신 나와 엄마는 우연히 알게 된 이름을 하나씩 주워 담는다. 태양을 따라 한 뼘 더 자라난 서양벌노랑이, 혀를 한껏 내밀고 달려가던 몰티즈 코코, 콧물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로 엄마를 보며 까르르 웃는 시우. 몰랐던 이름을 되뇌다 보면, 이 세계가 한층 더 다정해지는 듯하다.
주말의 올림픽공원은 응원봉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팬들과 양손 가득 피크닉 용품을 챙겨 온 가족들로 북적인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겠지만, 오늘은 그들을 지나쳐 공원으로 향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그저 바라보기보단, 다가가 품에 한 아름 안아보기 위해서다. 능선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저마다의 초록빛을 지닌 수목을 구경하다 문득 친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마침 친한 친구가 콘서트를 보러 왔다기에 산책 전 잠깐 만났다. 무슨 일로 왔느냐는 물음에 “나무를 안으러 왔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오늘의 여정에 영감을 준 《산책의 언어》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자연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천 가지 언어를 안내하는 책인데, 그중에서도 나무와 포옹을 나누는 장면에 밑줄을 그었다고. 어떤 나무와 인사를 나눌지 고민하다 ‘나 홀로 나무’를 찾아왔다고 덧붙였다. 친구는 신기하다는 듯 웃어넘겼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나 또한 지천으로 널린 나무들과 그런 식으로 마음을 나눠본 적은 없었으니까. 하물며 그늘 아래 머무는 이들조차 나무에 등을 기대거나 손을 뻗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상상력이 결핍된 세상에서, 언덕 한가운데 뿌리내린 나무를 끌어안으려니 괜히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자세까지 연구해 갔는데, 결국 시도도 못 해보고 발길을 돌리게 될 줄이야. 울타리에 가로막혀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다. 선 밖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곁에서 나무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나 홀로 나무는 측백나무. 측백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르고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 소나무 다음으로 손꼽히는 정원수다. 나 홀로 나무 역시, 한때는 동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수많은 나무 중 하나였다. 88 올림픽을 앞두고 삼십여 채 가까이 되는 민가를 철거하면서 주변 나무들까지 모조리 베어버렸다. 급격하게 재편되던 풍경 속에서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와 수형이 고운 나 홀로 나무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오랜 시간 이 자리에서 서서 희로애락을 새겨온 나무라면 나의 어설픈 몸짓쯤은 넉넉히 받아주지 않았을까. 두 팔로 감싸안는 순간, 어쩌면 소중히 간직해 온 어리숙한 포옹의 기억을 들려주었을지도.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가는 길, 나 홀로 나무와 수형이 비슷해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마주한다. 책에서 본 것처럼 사람들이 시선을 거둔 틈을 타 어색하게 안아본다. 단단하고도 포근한 어른의 품 같다. 바람 따라 볕뉘가 나를 가만가만 어루만진다. 잠시 눈을 맞추고 함께 호흡한다. 나무가 내뿜는 짙푸른 숨을 오래도록 기억해 두고 싶었다. 눈앞에서 손톱만 한 벌레가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바람에 금세 물러서고 말았지만.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설익은 기억을 담아 두기로 한다.
산책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다름 아닌 날씨다. 오죽하면 ‘날씨가 다했다.’는 말까지 있을까. 내리쬐는 햇살, 바람 세기, 구름 빛깔 하나하나 산책자의 걸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산책했죠〉 속 화자는 궂은 날씨에도 빗속을 걷는다. ‘우산을 사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네 문장을 읽자마자 페이지 모서리를 접어 두었다. 비가 내린다고 해서 산책을 미룰 이유는 없다. 필요에 따라 가방을 꾸리듯, 마음가짐 또한 날씨에 맞게 재정비하면 되는 법이다. 시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를 테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결론을 내렸다.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기다렸다는 듯 우중 산책을 나섰다. 작정하고 비 오는 날을 즐겨본 게 도대체 언제였던가. 우산을 쓰지 않아 볼 위로 자꾸만 빗물이 떨어졌다. 무해한 감촉에 기분이 개운해졌다. 무엇보다 어디선가 운명처럼 내가 원하는 우산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 우산으로 이 순간을 기념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느 고전 영화 속 비를 맞으며 노래하고 춤추던 사람들처럼 한 보 한 보 경쾌하게 나아갔다. 이내 눅눅한 습기가 온몸을 잠식했다. 설렘 또한 서서히 시들어갔다. 적당히 즐겼다고 생각했을 때 발길을 돌려야 했던 건 아닐까. 망설이는 사이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산책했죠〉 속 화자가 비가 그치진 않을까 초조해했던 것과 달리, 나는 빗줄기가 더 거세지진 않을까 조급해졌다. 아직 우산을 고르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마치기엔 어쩐지 찝찝했다. 결국 한참을 더 걸어야 하는 소품 가게 대신 가까운 초등학교 앞 문구점으로 향했다. 한구석에 놓인 진열대에는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 우산과 눈이 시릴 정도로 쨍한 핑크색 땡땡이 우산뿐이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투명 비닐우산을 집었다. 화자처럼 ‘우산 같은 건 무엇인지’를 고고하게 사유하며 다음 행선지로 가볼까도 고민했지만, 점을 찍듯 목표만을 향해 걷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했던 건 우산보다 산책이었으니,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만약 화자가 우산을 샀다면 시의 제목은 “산책했죠”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끝끝내 우산을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에 그 모든 순간이 산책으로 남게 되었던 건 아닐까. 산책은 선과 선을 잇는 여정이고, 기대와 실망을 외줄 타듯 오가며 걷는 일이기도 하니까. 내 산책은 비록 ‘비 오는 날 괜히 나가서 쓸데없는 비닐우산을 샀죠.’로 끝날 뻔했지만, 얼렁뚱땅 마침표를 찍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산책했죠.’로 간직하고자 꿋꿋하게 전진했다.
구체적인 지명은 다 다르더라도, 모두의 상상 속 ‘사람 많은 대도시’의 생김새는 비슷할 테다. 을지로에서 종각을 가로질러 광화문으로 향하며 셸레의 문장을 고스란히 통과한다. 걷는 내내 수많은 행인을 마주친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라 느긋하게 걷는 이는 드물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이들은 한 치의 틈도 내어주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목적지를 향해 흘러간다. 마치 해리 포터의 투명 망토를 두른 듯, 유령처럼 거리를 누빈다.
교보문고 맞은편 사거리에 서서 신호를 기다릴 때면 늘 시선을 멀리 둔다. 광화문이 도시 산책을 익히기 가장 좋은 장소인 이유는 저 너머에 있다. 높다란 건물 사이 펼쳐진 너른 광장과 고요한 품격이 깃든 경복궁이 시야에 들어찬다. 활짝 열린 창 앞에 선 듯,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몰아친다. 쉼 없이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궁과 사찰은 산책자들이 숨 돌릴 수 있는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담장 밖과 유리된다. 이곳을 ‘산책하기 아름다운 땅’이라 칭송했다는 어느 왕의 유유한 자태를 떠올린다. 발바닥이 유연하게 지면과 맞닿는 자극을 느끼며 지긋함을 유지한다. 궁궐을 무대 삼아 호선을 그리는 이들 덕에 도시의 리듬은 한층 다채로워진다.
인파를 피해 걷는 일에도 엄청난 체력이 필요한듯하다. 서점이나 카페로 피신해 보지만, 어디든 사람들로 빼곡하다. 지친 나그네에게 완벽한 일인용 자리를 내어주는 곳은 오로지 독립영화관 뿐. 타인들로부터 멀어져 어둠 속에 은신한다. 스크린 속 한 사람의 세계에 몰입하다 보면 다시금 나라는 존재가 선명해진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른 뒤에는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상영관을 벗어난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한밤의 광화문은 몇 시간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환한 빛을 내뿜는 빌딩을 지나 한산해진 사거리 한복판에 멈춰서 나를 둘러싼 세계를 찬찬히 감상한다. 아득한 우주 속을 떠도는 먼지 한 톨이 된 것만 같다. 그 감각은 근사한 위로다.
소로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로 못 말리는 산책 광인이다. 하루 두 시간씩 걷던 차이콥스키도 소로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고 머쓱하게 돌아서야 했을 것이다. 그의 확고한 철학이 깃든 문장을 읽고 있자면 경외심에 사로잡혀 밑줄을 치게 된다. 일 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나는 매일 20-30킬로미터를 활보하며 걷기의 효능을 온몸으로 체감했더랬다. 인생에서 가장 건강했던 그 시절을 다시 한번 누려보고자 소로의 문장을 가이드 삼아 도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일부러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한 시간쯤 걷고 나면 귀신같이 집에 가서 눕고 싶어졌다. 해야 할 일을 미룬 채 속 편히 걷고 있으려니 괜히 한량이 된 것만 같았다. (소로도 “마을 일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때가 있다.”라고 했으니 아마 이 정도는 이해해 주지 않을까.) 더군다나 우리 동네엔 드넓은 녹지가 없어서 같은 자리를 네 시간 동안 실컷 어슬렁거리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호기롭게 나섰다가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자 소로에게 진 기분이 들었다. 환경이 이토록 달라졌다는 이유로, 예전의 내가 거뜬히 해냈던 일을 지금의 나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애석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떻게 해낸 걸까. 나를 그렇게까지 걷게 만든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다소 희미해진 여정을 되짚어보려 한 달 동안 품에 끼고 살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기나긴 고행길을 버틸 수 있었던 데엔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스스로를 인정해 주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길 위에서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질 때, 비슷한 속도로 걷던 이들이 앞서가는 걸 보며 속도 차를 실감할 때, 돌덩이 같은 가방을 고쳐 메야 할 때, 잠시 멈춰서 쉬고 싶을 때, 좋은 장면을 기록하고 싶을 때, 눈부시게 행복할 때, 다시 일어나 걷고 싶을 때, 오렌지 주스를 마시거나 노래를 고를 때도.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보내오는 신호를 구분하며 나에게 필요한 걸 조심스럽게 내어줘야 했다. 오늘의 컨디션이 어제와는 다르게 느껴지거나, 이 길이 아닌 저 길이 궁금해져도 의심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나를 말 안 듣는 강아지처럼 여기며 최대한 너그럽게 보살폈다. 한계에 맞설지, 한발 물러설지를 결정하려면 지금의 내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변화무쌍한 기운을 이해하기 위해선 꾸준히 좋은 질문을 건네야만 했다. 오직 그 진심을 이정표 삼아 매일매일의 보폭을 가늠했다. 결국, 그게 전부였다.
마지막 문장은 등을 부드럽게 미는 바람이 되어, 나를 이전과 다른 길 앞에 서도록 이끈다. 어서 그렇다고 인정하고선 너의 속도로 가보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설령 오독일지라도 별수 없다. 이쯤에서 책을 덮으며 처음의 질문을 약간 고쳐본다. 오늘의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싶은지, 그 작은 확신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내게 손을 내밀어 줄 마음속 문장에 희미하게 선을 그어본다. 비틀비틀 걷더라도, 내키는 대로 가보겠다는 믿음으로.
에디터 오은재
일러스트 세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