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수많은 민박집(혹은 게스트하우스)이 있다. 부르는 명칭은 같아도 키워드는 다양하다. 만남, 휴식, 동행 등 후기만 찾아봐도 민박집의 성격을 얼핏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녀민박은 어떤 분류에 넣어야 할까. 어쩐지 이곳은 명사의 분류에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 소녀민박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들이다. 이상한, 묘한 그리고 수상한.
다사다난 제주 정착기
그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30대에는 결혼과 돌잔치에 관련된 이벤트 사업을 했다. 그녀 인생에서 처음으로 큰 돈을 벌었고 모은 돈으로 제주에 내려왔다. 10년이나 몰았던 중고차와 함께였다. 그녀는 방을 구한 후 민박집을 열기로 했다. 용담동 해안가의 엔제리너스 카페에서 20대 친구들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정착은 쉽지 않았다.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살기도 했고, 이게 웬 떡이냐며 말도 안 되게 큰 집에 입주했다 한 달 만에 다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다 지금 소녀민박이 된 집을 만났다.
9000층인 1층, 호텔인 민박집
소녀민박은 공항 근처에 있다. ‘공항 근처 민박’으로 검색에 노출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용두암이 있는 해안로에서 조금 들어오면 보이는 동네의 분홍 지붕 집. 걷다 보면 비행기가 머리 위로 뜨고 진다. 그녀가 제주행을 선언했을 때, 어린 조카가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재미 삼아 호텔 지으러 간다고 말했다. 조카는 로켓을 타고 갈 수 있는 9,000층의 호텔을 그려줬다. 그 안에는 딸기 방, 수박 방, 포토 방, 티브이를 봐야 하니까 꼭대기엔 안테나도 하나. 그래서 민박집에는 곳곳에 ‘HOTEL’, ‘9000F’라는 글이 붙어 있다. 어떤 민박집을 만들고 싶었냐는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어떤 것을 하나하나 꾸밀 때도요. 집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사랑과 비슷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런데 사랑이건 민박집이건, 어쨌거나 미궁으로 빠진 건 똑같아.”
피곤한 물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집
민박집의 물건들은 희한했다. 각기 다른 집에서 나온 게 분명한 소파와 거울, 스탠드, 선풍기, 핸드백, 손거울, 장식인 것 같지만 멀쩡한 티브이, 조각조각 이어진 각기 다른 장판. 분명히 누군가 쓰던 물건이지만 모두가 묘하게 낯설었다. 이곳에 있지만 누구의 것도 아닌 것. 제주에 오기 전 블로그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그녀는 주웠다는 대가족의 사진 액자 아래 이렇게 적었다. ‘처음에 이 사진을 갖게 되었을 때 그냥 참 묘한 가족사진이네, 라고 느꼈다. 묘하단 표현 이외엔 딱히 다른 느낌은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 이 사진을 보게 되니 애나 어른이나 그 누구 하나 애써 웃고 있지 않은 모습이 대단한 편안함으로 와 닿는다.’ 그 글처럼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예쁘기 위해서, 멋있기 위해서, 사진 찍기 좋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제주에 밤늦게 도착한 새카만 청년들이 급하게 검색해 찾아오던 이곳에도, 인스타그램 사진 한 장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말이다. 물건들은 여전히 조금은 피곤한 모습으로, 내 생에 마지막 자리로 나쁘지 않아, 라는 인상으로 있다. 씻어주는 대로 씻겨져 주고 누렇고 씻기지 않는 부분은 나름의 위로를 주면서 말이다.
취미는 빈집 방문
민박집 입실을 도와준 후 그녀는 종종 좋아하는 동네를 돌아다닌다. 처음에는 사람들 다 간다는 데를 찾아다녔고 그건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그 후에는 주변 마을 구석구석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마을의 빈집을 만났다. 부수고, 짓고, 떠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제주에 남겨진 빈집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수많은 사람이 수차례 기웃거리는 곳이지만 정작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팽팽 놀리는 그런 곳. “빈집에 가면 모든 게 끝이 난 듯해서 좋았어요.”
안 온전한 공간 계약 중독자
낡은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그녀가 창고라고 부르는 집으로 향했다. 그즈음부터 그녀는 자신을 ‘언니’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아직도 번듯한, 온전한 공간은 없어요. 대신에 안 온전한 공간이 많아요. 중독증이야. 안 온전한 공간 계약 중독자.” 그녀의 창고에 있는 것들은 부서진 석상, 그릇장, 접시와 냄비, 오래된 바닥재, 주운 물건, 중고상에서 산 물건, 혹은 낡은 승용차에 양쪽 문을 다 열고 빨랫줄로 묶어 나른 물건이었다. 어쩌면 그들도 소녀민박의 물건들처럼 마지막 거처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래된 장에서 나온 문틀을 보고 “예쁘다!”라고 말하자마자 그녀는 테이프와 뽁뽁이로 문틀을 싸기 시작했다. 갖고 싶은 건 가져가라고 해서 소심하게 접시를 하나 골랐더니 아예 세트를 챙겨줬다.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냐고 묻는 내 말에 그녀는 말했다. “언니는 또 생겨요.”
당신이라면 이곳에 어울려요
소녀민박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집 구경이 쇼핑보다 즐거운 사람, 온통 희고 깔끔한 집에 가면 어쩐지 불안한 사람, 민박집 주인이 자신의 관광 코스를 다 짜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 선선한 여름은 선풍기로 버틸 수 있는 사람(몹시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민박집을 열지 않는다. 꼭 오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경우에만 할인가로 예약을 받는다), 제주 공항에 밤늦게 도착하는 사람, 혼자서 느긋한 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 자그마한 벌레 정도는 혼자 잡을 수 있는 사람.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아는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은 민박집이 아니라, 좋아하는 몇몇에만 알려주고 싶은 곳이라고.
소녀민박 A. 제주시 흥운길 21 H. blog.naver.com/9000floor T. 010 3381 6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