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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 소설가
비가 조금 내린 뒤, 여전히 하늘은 흐렸다. 잔잔한 호수와 푸른 나무. 해사한 벽화와 작은 동물들. 우린 조용한 공원을 걸었다. 까치 한 마리가 그의 뒤를 따른다. 벤치에 앉은 그의 주변을 총총. 새는 직감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알아보나. 언제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사람. 불행해도 함께하자고 말하는 사람. 글의 끝마다 사랑을 놓지 않는 사람. 오늘 최진영 작가를 만났다.
얼마 전까지 제주에 머물다 파주로 오셨죠.
제주에서 삼 년 정도를 보냈어요. 그동안 육지에서의 일들이 끊이지 않아서 자주 오갔거든요. 출간이 이어지면서 일이 더 많아졌고 결국 다시 돌아오기로 했어요. 어디에서 살까 고민하다가 친한 편집자가 파주가 좋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게 됐어요.
단순한 이유였네요(웃음). 오늘 인터뷰 장소로 운정호수공원을 추천했는데 여긴 자주 오시나요?
저녁마다 산책하는 곳이에요. 매일 비슷한 일과를 보내는데, 외부 일정이 없는 날은 아침 8시 반에서 9시 반 사이에 일어나요. 스트레칭하고 씻고 밥 먹으면 12시 정도예요. 그때 제 방으로 들어가서 저녁 5시에서 6시 사이에 나와요. 하루 작업하는 시간이 딱 그렇게 오후 다섯 시간 정도. 글 쓰고 밖으로 나와서 한 시간 반 정도 걷는 곳이 여기예요. 그러곤 다시 집에 들어가서 씻고 밥 먹으면 9시. 그동안 계속 야구를 틀어놓고 보면서 움직여요.
야구를 좋아하시죠. 가장 최근 출간된 산문집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에도 야구 이야기가 자주 나와요.
저는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는데, 기적처럼 이 책의 출간 시기에 맞춰 이글스가 1위를 한 거예요. 이 팀은 매년 꾸준히 성장했어요. 10위에서 9위… 점차 올라가다가 이번에 드디어 1위를 했더라고요(웃음).
책에도 기쁜 마음을 여실히 기록했어요. 에세이를 소설 쓰기보다 어려워하시는데, 지난 산문집 《어떤 비밀》보다 더 내밀하고, 마치 일기를 그대로 옮긴 것 같았어요. 작가님의 혼잣말을 듣는 느낌이랄까요.
완전히 다른 작업이었어요. 《어떤 비밀》은 24절기에 맞는 24통의 편지와 연결된 에세이를 모은 책이고, 이번 산문집은 매거진 《Axt》에 ‘다이어리’를 주제로 연재한 글을 한데 엮은 책이에요. 정말 그날그날 일기 쓰는 마음으로 썼어요. 연재할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묶어보니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모였더라고요. 조금 걱정됐는데 어떤 독자분들은 이런 글을 더 읽고 싶지 않을까, ‘에세이’라고 쓴 글 말고 진짜 제 일기장 같은 얘기를 읽고 싶은 독자분들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만들게 됐죠.
독자로서는 작가 최진영과 일상 대화를 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어요. 일상 이야기가 더 궁금해요. 저녁 산책 후 9시부터는 완전한 자유 시간인 셈인데 어떻게 보내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유튜브도 보고 책도 읽고… 가장 최근에 본 콘텐츠가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였어요.
많은 사람을 울린 드라마였죠.
저는 사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잘 울지 않는데요. 제가 아이유 배우를 좋아하거든요. 아이유가 울면 항상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왜 그럴까요?
글쎄요… 드라마 〈프로듀사〉에서도 아이유가 아이처럼 우는 장면이 있는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나요. 〈나의 아저씨〉에서도 지안이(아이유의 극중 역할 이름)가 길에서 주저앉아 우는데 그 장면에서도 같이 울고 있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진짜 울음 같아서랄까요.
마음에 울림을 주는 배우가 있는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 취향도 궁금했어요. 작가님 인스타그램 프로필 이미지는 영화 〈헤드윅〉(2001)에 등장하는 그림이라고요.
좋아하는 영화예요. 일단 음악이 좋고, 영화 속 사랑에 대한 접근법이 너무 공감돼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고르라면, 항상 〈멜랑콜리아〉(2011)를 말해요.
어떤 영화인가요?
지구를 향해 멜랑콜리아라는 거대한 행성이 돌진해요. 주인공 저스틴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정작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와 가까워질수록 담대해져요. 마침내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삼킬 때 저스틴과 그의 언니, 조카는 함께 손을 맞잡고 최후의 날을 맞이하는데, 그 순간마저도 저스틴은 초연한 태도를 잃지 않아요. 저스틴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걷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때 저스틴의 발에 까만 실뭉치가 엉켜서 저스틴을 힘겹게 만들어요. 우울함에 대한 묘사가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 소설 속 인물들이 떠오르기도 해요.
저도 모르게 자신과 닮은 것을 좋아하는 거겠죠.
책장에는 어떤 책들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일단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많아요(웃음). 이사를 자주 해서 그때마다 책을 정리했거든요. 제주로 떠날 때는 다 읽은 책들을 고향에 보내기도 했어요. 지금 책장엔 언젠가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사둔 것들이 많죠. 네 군데로 나뉘어 있는데, 크게 시, 국내 소설, 외국 소설, 과학으로 분류했어요. 여성 작가의 작품이 많아요. 김애란 작가님 신작도 궁금하고, 정용준 작가 신간도 빨리 읽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못 보고 있어요. 평소 독서량이 많은 편도 아닌데 점점 책 읽을 시간이 줄어요. 그래서 저에게 읽는 일은 스스로 보상을 주는 일이에요. 비타민 먹는 것처럼. 쓰는 일은 항상 부담인데 독서는 그저 즐거움이에요.
작가로서 읽는 일이 때로 부담되지는 않나요?
그렇기도 해요. 작가로서의 저는 더 이상 쾌락만을 위해서 책을 읽을 수는 없죠. 그 안에서 배움을 찾아야 하니까요. 읽으면서도 늘 쓰기를 염두에 둬야 하는데 그럼에도, 그 과정마저도 저에겐 즐거움이에요.
책장 속 아직 읽지 못한 도서 중에 가장 먼저 읽고 싶은 한 권을 꼽아볼까요?
오늘 가져왔어요. (가방 안에서 앤 카슨의 《에로스, 달콤씁쓸한》을 꺼낸다.) 앤 카슨의 글을 좋아해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인데, 앤 카슨의 글은 너무 어렵거든요. 분야를 따지면 ‘시’의 형식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우리와 다른 언어이니 번역되는 과정에서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데, 너무 아름다워요. 사유가 아름답고요. 이해하지 못해도 무척이나 아름답게 읽을 수 있는 경험을 선물해 준 작가죠. 예전에는 어떤 책을 읽으면 내용을 다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생각을 버리게 됐어요. 이제는 저에게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문장을 만나기 위해 책을 읽고 있어요. 이런 태도로 책을 보니 독서에 대한 부담이 많이 줄기도 했고요.
오늘 가져오신 《에로스, 달콤씁쓸한》은 어떤 책인지 궁금해요.
앤 카슨이 쓴 논문을 모은 작품이에요. 그의 작품 중 그나마 가장 쉬운 책이기도 해요. 논문은 이해가 되게 써야 하는 글이니까요. 같이 보실래요? (책을 펼쳐 보인다.)
밑줄이 많이 있네요. 메모도 많고, 별 표시도 있어요. 작가님도 책 모서리를 접어서 기록하시네요.
요즘은 집에서 글 읽을 시간이 없어서 이동하면서 읽을 때가 많거든요. 이 부분도 비행기 안에서 읽었는데 그때 인덱스가 없어서 급하게 접었어요. 여기 보면 밑줄들이 다 구부러져 있네요(웃음).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어떤 문장들은 밑줄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이건 너무 좋아.’ 이러면서 별 표시를 해요(웃음). 책을 깨끗하게 읽는 편은 아니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책에 자취를 많이 남겨요. 이런 흔적들은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다시 펼쳤을 때, 마치 과거의 나를 만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줘요. 미래의 나를 위해서라도 책을 지저분하게 보는 편이에요. 나이가 들면 생각이 바뀌기도 하거든요. 오래전 책에 남겨둔 메모를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면서요. 작정하고 독후감을 쓰는 것과는 다른 즉흥성이 있어요. 언젠가 날아가 버릴 생각들이잖아요. 이런 게 더 소중할 때가 있죠.
미래의 나를 위한 습관이네요. 이렇게 밑줄과 별이 많은데, 이 중에서도 좋아하는 문장을 꼽는다면요?
음… 너무 많은데,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요. “움직이는 것은 욕망이다. 에로스는 동사다.” 이 책에서는 에로스에 관한 이론이 이어지는데 그게 다 사랑에 대한 정의로 읽혀요. 이런 문장들이 제게 영감이 돼요. 이런 문장도 있어요. “너는 곁에 있을 때는 고통이고 떠나 있을 때는 연인이다.” 사실 그렇잖아요. 함께 있으면 싸우고 멀리 있으면 그립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소설들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어떤 문장이 스스로 쓴 소설을 떠올리게 했는지 궁금해요.
“내가 당신을 욕망할 때 나의 일부는 사라진다. 당신의 결핍은 나의 결핍이다. 당신이 나의 일부를 먹어 치우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겠지. 당신은 나를 마모시켰다. 내 피를 빨아 먹었다. 내 생식기를 베어버렸다.” 제 소설 중 《구의 증명》이 담이라는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인 구를 먹는 내용이잖아요, 왜 죽은 연인의 시신을 먹는 소재를 떠올렸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이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론 《원도》가 떠오르기도 했죠.
《원도》의 첫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마치 영화를 본 것처럼 그려지더라고요. 낡은 여관방에 다 쓰러져가는 중년 남자 ‘원도’가 홀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시작하죠.
맞아요. 시작과 끝이 같은 소설이었어요. 결국엔 《원도》도 결핍과 존재의 구멍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담’이와 ‘원도’를 생각하며 밑줄을 치게 되더라고요. 이런 문장들을 만날 수 있어서 앤 카슨을 좋아해요. 사실… 앤 카슨이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어떤 작가인지 설명하라고 하면 참 어렵고 설명할 수도 없는데, 언젠가는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요.
어떤 글일까요?
장르가 없는 글, 장르를 붙일 수 없는 글이요. 시인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그 어떤 분야에도 구속되지 않는 글을 쓰고 싶어요.
《원도》 이야기를 더 묻고 싶어요. 작가님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여성이거나 청소년인데, ‘원도’는 중년 남성이고 다른 인물들과 많이 달라서 놀라기도 했어요. 뭔가… 이 사람이 조금 징그럽게 느껴지는데 한편으로는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2012년에서 2013년 넘어가는 겨울에 쓴 소설이에요. 꽤 오래됐죠. 《원도》의 개정판 이전 제목은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였어요. 딱 이 제목이 그 당시 저의 질문이었어요. 보통 ‘난 왜 살지?’라고 묻는데 저는 그 질문조차도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졌어요. 그때 제 상태가 정말 안 좋았거든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고립돼 있었어요. 《원도》 이전에 쓴 소설에서는 인물이 자꾸 죽었어요. 죽지 않았으면 하는 인물들은 계속 죽고, 원도처럼 어떻게 보면 죽어도 괜찮은 인물은 아등바등 살려놓았거든요.
원도는 왜 계속 살게 됐을까요?
그 당시 제가 원도였어요. 원도처럼 결핍을 느끼면서 사랑을 원하는데,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상태였어요. 그때의 저는 그런 사람이 너무 필요했죠. 죽어 마땅하지만, 끝까지 죽지 않는 인물이요. 힘들었던 시기의 상황 자체를, 소설을 쓰면서 풀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 스스로 결핍 덩어리라는 사실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 시기이기도 했고요.
괴로우셨겠는데요.
네. 그래도 제가 그런 존재라는 걸 받아들여야 살 수 있어요. 안 그러면 계속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 것 같아요. 나에게도 상처를 주고. 어쨌든 더 나쁜 짓 안 하고 소설 쓰면서 그 시간을 보낸 게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작가님이 좋아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면요?
제가 좋아하는 거… 책, 혼자 있는 시간, 저녁, 산책, 노을, 이런 것들을 좋아해요. 초록이 짙게 푸르고 모든 생명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여름도 좋지만, 겨울을 더 좋아하거든요. 겨울은 나무도 나뭇잎을 버리면서 최소한의 상태로 존재하는 계절이잖아요. 동물도 동면에 들듯 사람도 내면의 동굴로 들어가는 시기인 것 같아요. 저녁이라는 시간대도 사람들이 모든 활동을 접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때라 좋아하고요. 전반적으로 에너지 상태가 낮고 고요한 상태가 편해요. 뭘 안 하는 걸 좋아하고요(웃음). 야구를 그렇게 좋아해도 직관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거든요. 결국엔 혼자인 걸 좋아하나 봐요. 책 읽는 일도 그렇잖아요. 누군가와 함께할 수 없는 일이니까.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도 책만 펼치면 그 안으로 도망갈 수 있고요.
반대로 싫어하는 건요?
집단 활동을 안 좋아하죠(웃음). 어릴 때 야영, 소풍, 운동회 정말 피하고 싶었어요. 수학여행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리고 무례한 거, 정말 안 좋아하죠. 그런 건 본능적으로 피해요.
무례에는 다양한 경우가 있잖아요. 어떤 상황이 있을까요?
너무 친하다고 함부로 하게 되는 거. 저는 아무리 친한 관계에도 선을 지키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무례한 경우가 있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나의 성별과 나이와 외적인 면만 보고 무례하게 굴 수도 있잖아요. 이 얘기하다 보니까 저는 제가 쳐놓은 울타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여기까지니까 넘어오지 마, 라고 하는 사람이요.
혹시 사람을 안 좋아하시나요(웃음).
사람을 좋아하는데 두려워하죠. 그래도 요즘은 좀 사회화가 많이 됐어요(웃음). 청소년기에는 더 심했거든요.
청소년기에 관한 이야기도 궁금했어요. 작가님 소설에는 청소년이 많이 등장하고, 스스로 어린 시절의 정서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아직도 혼란스러운 거죠(웃음). 성장기에는 신체도 변하고 전두엽도 만들어지고 그러면서 대혼란의 시기에 빠지잖아요. 이런 질문도 많이 하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뭐지. 저는 여전히 그 질문을 계속해요. 저 자신을 너무 모르겠거든요. 나에 대해서 대단히 오해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요. 그래서 경계도 많이 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는 확언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어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웃음). 이런 마음을 다 소설에 담는 거겠죠.
어떨 때 자신을 더 모른다고 생각하나요?
나조차 나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되게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부끄러움 많은 어린이였다고, 어떻게 보면 나에 대해 편하게 생각하며 살았던 거죠. 그런데 부모님 말씀을 떠올려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한테 예민하다고 하셨거든요(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성격이 참 별났던 것 같은데 순화해서 얘기하신 거겠죠. 저는 속으로 내가 얼마나 참고 사는데… 하면서 믿지 않았어요.
여러 감정을 품고 사는 아이였네요. 작가님 소설 속 청소년 인물들 주변에는 항상 어른들이 등장해요. 나쁜 어른도, 좋은 어른도 있죠.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요?
책임지는 존재요. 청소년은 책임지지 않아도 돼요. 이미 사회가 그렇게 규정하고 있잖아요. 미성년자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투표권도 안 주고 기호식품도 못 사게 하고. 제가 생각하기에 청소년 친구들은 해야 할 일은 많은데 그에 비례한 권리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른이라면 책임을 져야 해요.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대해서 잘못했으면 사과해야 하고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죠. 결국엔 어른이라면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구의 증명》의 한 단락이죠. 제겐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구절이었어요.
아마 그 당시에 제가 생각하는 사랑이었을 거예요.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난 언제나 기다리는 존재인 것 같은 마음. 이게 사랑의 본질적인 면 같아요. 함께 있어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의 모순이 바로 결핍이거든요. 기다리는 일도 결핍과 연결되는 정서잖아요. 사람은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그 사이를 사랑으로 메꾸려 하지만 사랑을 한다고 해서 이 구멍이 채워지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결핍을 지우려 하죠.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죠. 이 기다림이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무한으로 반복하죠.
저는 이 문장 읽으면서 감추던 마음이 눈앞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괴로웠달까요(웃음).
하지만 결핍이 없으면 사랑도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인간이란 존재는 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다들 그렇게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문득, 작가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묘사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하실지 궁금해요.
(카페 한편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사실 지금 저기 앉아 있어요(웃음). 아까 들어온 것 같아요. 오늘 약속이 끝나면 저를 데리고 가려나 봐요. 이번 산문집에도 등장하는데, 책 속에서는 ‘다크니스’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어요. 본인이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더라고요. 저에게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존재예요. 저는 제가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것 같거든요. 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예측하게 되고 실수하게 돼요. 언제나 ‘나는 너를 모른다’는 생각으로 대하려 노력해요.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이 세상에서 나를 추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요. 그 누구도 저를 추궁할 수 없는데 연인은 할 수 있어요. 너 왜 그랬냐고. 그래서 나의 취약점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지만 다른 마음 한편에서는 꼭 알아줬으면 좋겠고. 결국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약점을 이 사람에겐 드러낼 수 있게 되죠.
소설 속에서 늘 사랑을 말하는 작가님에게 사랑은 뭘까요? 오래전 ‘사랑은 독이다’라고 대답하신 적이 있어요.
그땐 그렇게 답했죠.
지금은요?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요. 사랑을 하려면 너무 많은 것들이 필요해요. 일단 지혜로워야 하고 응용력도, 순발력도 필요해요. 인내심도 필요하고 헌신하는 마음도 필요하고. 사랑을 잘하는 데 필요한 마음이 너무 많더라고요. 마치 수양을 하듯 나 자신을 갈고닦아야 잘할 수 있는 게 사랑이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하게 됐죠. 한 번뿐인 인생(웃음), 사랑을 나를 갈고닦는 수단으로 삼으면 좀 괜찮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잘하고 있는 것 같나요?
아니요(웃음). 며칠 전에도 싸웠어요. 참지 못하고. 그래도 어쨌든 노력하는 마음은 있어요. 매번 다짐해요.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자.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요.
지금 내가 마음이 상했고 화가 난 건 맞지만 이 존재가 오늘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거보다 더 큰 인생의 절망과 비극은 없거든요. 이렇게 생각하면 그냥 모든 게 괜찮아져요.
그래서 내가 이 사람 없이 살 수 있느냐 했을 때, 아니라는 답을 하는 거네요.
맞아요. 가장 근본적인 마음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인지하는 거죠. 언제나 상실에 대해 생각하면 이 사랑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죠. 그러니까, 삶을 가장 강렬하게 인식하는 게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라면, 사랑을 가장 강렬하게 인식하게 하는 건 상실감인 것 같아요. 저는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는 것도 신기하거든요. 다크니스가 아침에 멀쩡하게 일어나는 것도 신기해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요. 《어떤 비밀》에도 썼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을 볼 때 짠한 마음이 들어요. 그 뒷모습을 볼 때요. 이 사람이 날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때, 그 평범한 일상이 잘 유지될 때 저는 가장 큰 특별함을 느껴요.
작가님의 문장 중,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는 것 외에 더 많은 것들이 모여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떠올라요.
우리가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 추상적인 가치들이 있잖아요. 사랑, 헌신, 희생, 고독, 외로움, 결핍. 이런 건 다 추상적인 단어지만 우리 모두 이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요. 바로 그런 것들이 삶을 구성한다고 생각해요. 그저 숨 쉬고 움직이는 일 말고 스스로 살아 있기 때문에 하는 생각들, 품는 감정들, 슬픔, 고통, 절망, 희망, 행복 같은 것들이 깃들어야 그게 진짜 살아 있는 상태 같아요.
《단 한 사람》의 마지막 단락이었어요. 주인공 목화는 할머니와 엄마 때부터 이어진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죠.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고, 남은 사람들을 전부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해요.
제가 죽음에 대해서 아주아주 깊고 진지하게 사유하게 만든 소설이에요. 그래서 쓸 땐 힘들었어요. 매일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으니까요. 책을 다 쓴 다음에는 아주 조금 담대해졌어요. 죽음을 거듭 생각하다 보니 이 삶, 일상의 소중함을 훨씬 더 강렬하게 자각하게 된 거죠. 목화는 저 자신이에요. 제 소설 속 인물들은 전부 저예요. 저는 제가 전혀 모르는 인물에게는 감정 이입할 수 없거든요. 그 인물에 공감하지 않으면 글도 쓸 수 없고요. 그냥 사람 최진영을 이런저런 상황에 놓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감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저는 작품과 거리감이 있으면 글을 못 쓰는 사람이에요.
작가님이 목화라면, 목화라는 인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어떤 단락일까요?
목화의 두 모습이 생각나요. 목화가 사랑했던 정원이 집에 있던 라일락 나무 화분을 뽑아버리는 단락과 나무를 알고 싶어서 목재소에서 일하는 단락이요. 사실 나무를 알고 싶으면 숲 해설가가 될 수도 있죠. 다른 방법이 많은데 목화는 내면에 나무에 대한 증오심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무를 베고 자르는 일을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라일락 나무뿌리를 뽑는 장면은 사실 목화가 이별을 결심하는 장면이거든요. 다만 목화는 인내하고 참는 사람은 아니에요. 목화의 엄마, 장미수가 분노와 증오감을 그대로 표출하는 인물이라면 목화는 그것을 자기 안에서 한 번 해결하는 사람이죠. 바깥에서 보기에는 한없이 고유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내면은 완전히 끓어오르고 있어요.
작가님 자신에 대한 설명처럼 들리기도 해요. 혹, 스스로를 대신하는 한 단어를 꼽아보면 어떨까요?
이건 바람인데, 저는 제가 ‘물’ 같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이 산문집에도 썼지만, 물 같은 사람이 되어서 털어내면 금방 털어지고 또 금방 마르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같은 이유에서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자연스러워지고 싶은 거네요. 문득 먼 미래를 상상해 보고 싶은데,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나요?
실없는 소리를 잘하는 할머니요. 사실 저 되게 웃긴 사람 되고 싶거든요(웃음). 말이 많아서 웃긴 사람 말고, 나이 들수록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말수는 적은데 실없는 소리 잘해서 유머 있는 할머니요.
그땐 어떤 집에 살고 있을까요?
《홈 스위트 홈》에도 그린 집의 풍경인데요. 일단 문을 열고 나가면 땅이 있어야 해요. 흙과 풀이 있는 땅을 밟고 싶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하늘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비가 오면 마당에 앉아서 부추전을 구워 먹을 수 있어야 하고요.
훗날 시골로 이사 가셔야겠네요.
맞아요(웃음). 제주에 있을 땐 하늘과 초록, 바다가 가득한 풍경만 보고 지내다 《단 한 사람》 같은 소설이 나왔잖아요. 미래의 그곳에서는 어떤 글을 쓸지 궁금하네요.
저도 궁금해요. 이제 곧 쓸 소설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언제나 지금 나 자신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지금은 고민 중이에요. 다음 소설은 AI와 함께 써볼지 생각만 하는데 정말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요즘 창작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좀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창작자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지금 제가 내린 결론은 사람들은 창작자에게 어느 정도의 고통을 원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작가가 많이 힘들어하며 쓴 작품에서 진정성을 느낀다는 점에서 마냥 부정적이기만 한 고통은 아니죠. 저 역시 독자로서 그런 생각을 품고 있기도 해요. 어쩌면 독자들이 작가에게 원하는 건, 재미있는 이야기만은 아니에요. 완결성 있는 스토리도 아니고요. 가장 중요한 건 작품에 깃든 작가의 진정성인데, 사실 이건 증명할 수 없잖아요. 수치화할 수도 없고요. 작가가 이 이야기를 쓰면서 얼마나 어떻게 고통스러웠는지는 그냥 독자가 느끼는 거죠. 그 정서를 여실히 느낀 독자는 작가에게 고마워하고 그 소설을 좋아하게 되는 거겠죠.
이런 관점에서 작가 최진영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책 속의 진정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 그렇고요.
그 점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죠. 책을 열면 그 세계 속으로 도망갈 수 있는데, 거기에는 슬픔도 있고 외로움도 있고 고독도 있고 이별도 있죠. 마침내 나의 슬픔과 조용히 마주할 수 있어요. 우리 모두에게 있는 마음인데 남에게 말할 수 없고 쉽게 들을 수 없는 걸 책 속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 우리에겐 글이 필요한 거겠죠.
이제 마지막 질문이에요. 이 지면에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그래 너는 쓸 거야. 꼭 쓸 거야.”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어요. 그래서 이 문장을 남겨 두고 싶네요.
반드시, 꼭 써 주세요.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임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