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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출산을 앞둔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서 곧 태어날 아기를 맞을 그녀의 설렘이 보였다. 그러다 방 한쪽에 놓인 장난감 하나에 눈길이 닿았다. 모서리도 닳았고 색도 바랜,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오리 모양의 나무 장난감이었다. 친구의 남편이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것이라고 했다. 삼십 년이 넘도록 시부모님께서 보관하시다가 손주를 위해 전해주신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오리의 익살스러운 표정만큼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나와 동년배일지도 모를 그 오리 인형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친구 남편의 어린 시절이 상상이 되어 웃음이 터졌다. 낡은 물건이지만 버리지 않고 곱게 간직하였다가 다른 이에게 전하는 일, 누군가는 지지리 궁상이라고 놀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따뜻한 궁상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스위스에서 사람들은 종종 세월의 온기를 서로에게 전하며 물건의 수명을 늘려간다.
빈티지 가구 카페 Vintage Moebel Café
‘아끼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책을 한 문장씩 아껴 읽는다거나, 좋아하는 옷이라 특별한 날에만 꺼내 아껴 입는다는 말에는 사물에 대한 애정이 한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이고이 아껴 써야 할 것 같은 섬세한 물건으로만 채워진, 빈티지 가구 상점이 동네에 있다. 작은 카페가 딸려 있어 커피 핑계를 대고 자주 놀러 가는 곳이다. 언제나 커피 한잔을 먼저 주문하고 커피가 준비될 동안 크지 않은 가게를 천천히 둘러본다.
한 달에 두어 번씩 진열 구성이 바뀌어서 매번 보물섬에 온 것처럼 신이 난다. 이 보물섬의 보물에는 세월의 여운이 서려 있다. 1960년대의 베르너 팬톤Verner Panton의 셸 펜던트 조명, 특별 제작되었다는 1930년대의 알바 알토Alvar Aalto의 카트, 바우하우스Bauhaus의 티볼, 그리고 이름도 디자이너도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소품들. 흠집 하나 없는 새 상품처럼 번쩍거리진 않지만 정성으로 돌보아져 맨들맨들한 그 자태가 참 곱고 고상하다.
그들의 연식만큼 내 손길도 자못 조심스러워진다. 동시에 궁금한 것도 많아진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을 들어가며 물건의 사연을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내 마음을 눈치채신 것일까. 친절하신 상점 주인은 종종 물건의 뒷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손상된 임스Eames의 안락의자를 완전히 다른 마감으로 수선한 이야기라던가, 어느 수집가의 집 안 물건들을 통째로 가져온 이야기까지. 물건 한 점 한 점마다 구구절절한 사연 하나씩은 품고 있는 것 같다. 그 깊은 뒷이야기에 감동하지만 아쉽게도 살 엄두는 잘 내지 못한다. 하지만 도저히 발길도 눈길도 떨어지지 않는 날에는 끝내 몇십 년 된 쟁반이나 생산이 중단된 유리 접시 같은 작은 소품을 집어 든다. 우리 집에서도 몇십 년 동안 함께하며 아름답게 늙어가길 바라며.
중고 물건 가게 Brockenhaus
물가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스위스에서 통 크게 이것저것 골라 담아도 주머니 사정에 무리가 가지 않는 곳이 있다. 브로큰하우스Brockenhaus라고 불리는 이른바 중고물품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나의 독일어를 도와주시는 스위스 할머니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된 곳이다. 무척이나 다양한 종류의 물건이 뒤섞여있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가게에 들어서자 할머니는 가방 속에서 책 몇 권을 꺼내 가게 주인에게 건넸다. 할머니는 책값을 받지 않았다.
이곳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중고 물건을 공짜로 가져다주면 그것을 아주 싼 가격에 되파는 가게라고 했다. 일부 지점은 자원봉사자가 운영하기도 했고 수익금이 기부되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바젤Basel 시내에는 여러 종류의 중고 물품 가게가 꽤 많이 있다.
중고 서적만 다루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액자, 그릇, 전자제품과 같은 각가지 생활용품부터 덩치 큰 가구까지 판매하는 만물상 같은 곳도 있다. 어떤 물건을 판매하든 가격표가 쉽사리 한 자릿수를 넘어가지 않는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어느 날 찾아간 브로큰 하우스의 가격표는 이랬다. 유리 꽃병 4프랑, 레코드판 3프랑, 플라스틱 테이블 의자 심지어 1프랑. 모두 한화로 오천 원이 넘지 않는 가격이다. 스위스에서 이렇게 인심이 후한 곳을 또 찾을 수 있을까!
사실 품질 좋은 제품을 구할 작정으로 방문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곳은 뒤죽박죽 쌓여있는 물건 하나하나, 진열장 안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훑어가며 오만가지 흔적이 밴 잡동사니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다. 때로는 단돈 몇 푼에 상상도 못 했던 보물을 발견하는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벼룩시장 Flohmarkt Petersplatz
스위스에서 물건이 장수하는 비결은 벼룩시장 덕도 있다. 매주 토요일 광장이나 공원에서 열리는 바젤의 벼룩시장은 약간의 수수료만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조건은 단 한 가지. 새 물건이 아닌 헌 물건만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년 겨울에는 나도 친구 둘과 함께 집 근처 광장에 자리 하나를 빌렸다. 물건을 많이 팔아 돈 좀 벌어보겠다는 야심보다는 현지인들과 독일어를 연습해보자는 계획으로 신청한 것이었다. 벼룩시장이 열리기 며칠 전부터 남편과 함께 집 안의 물건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즐겨 입었지만 언제부턴가 손이 가지 않던 옷가지, 휴대전화를 바꾸면서 크기가 맞지 않게 된 가죽 커버, 발이 아파 몇 번 신지 못한 구두. 거실에 금세 잡동사니 산이 쌓였다. 개중에는 내어놓기 아쉬운 물건도 있었지만 우리 집에서 홀대받는 것보다 새 주인을 만나 다시 제 몫을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터였다.
시장이 열리는 토요일 새벽 여섯 시부터 광장에 나섰다. 제대로 된 진열대도 없어 여행용 트렁크를 테이블 삼아 물건을 죽 늘어놓았다. 여자 셋이 벌린 판이다 보니 옷가지가 가장 많았다. 다행히 친구 하나가 옷걸이를 들고 와 한 쪽이 의류판매대가 되었다.
일일 상점이지만 꽤 그럴싸해 보였다. 진열을 마치고 물건마다 가격을 매길 차례가 되자 온갖 생각이 났다. 마음에 꼭 들어 물건을 샀던 첫 순간, 지불했던 가격, 내가 즐겨 사용했던 시간까지. 직접 나와 하는 장사가 처음이다 보니 초반에는 머쓱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우리 물건이 괜찮은지 손님이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자 독일어 연습을 하겠다는 초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현금을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실 벼룩시장에서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가격 흥정을 위한 밀고 당기는 기술이 필요할 뿐. “5프랑!”, “더 싸게는 안 돼요!”, “정말 마지막으로 4프랑.” 숫자 몇 개와 간단한 문장 몇 마디면 거래가 끝났다. 어스름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판을 거두었다. 큰 트렁크 두 개에 꽉 찼던 물건이 얼마 남지 않았다. 추위에 몸은 꽁꽁 얼었고 다리도 후들거렸지만 기분이 정말 좋았다. 주머니 안에서 짤랑거리는 얼마의 지폐와 동전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것이 더 편리한 요즘 세상에 한 때 내 것이었던 물건에도 시간의 깊이가 새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릴 뿌듯하게 했다.
무료로 가져가세요 Gratis zum Mitnehmen
지난 토요일 빨간색 1인용 천 소파가 집 앞 큰 길가에 덩그러니 나와 앉았다. 얼핏 보기에도 상태가 나쁘지 않아 그냥 내버려진 것 같지는 않았다. 가까이 가보니 역시나 이름표를 달고 있다. ‘무료로 가져가세요Gratis zum Mitnehmen.’ 물건 버리기가 복잡하고 비싼 스위스여서일까. 저렇게 딱지를 달고 있는 작은 가구나 잡동사니가 담긴 상자가 종종 길가에서 새 주인을 기다린다. 저녁 무렵 창문을 내다보니 어느새 소파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가져간 모양이다. 그래, 그 소파는 장수할 상이었다.
에디터 이현아
글·사진 이진주